여자여, 살림을 놓고 책을 들자

» 그림 장한희록




오한숙희의 얘들아 책과 놀자 /




내 친구 중에 절대 책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는 애가 하나 있다. 우리 집에 와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읽어 버린다. 다 못 읽고 가게 되어 빌려 준다고 하면 손사래를 쳐 완강히 거절하며 하는 말, “지금 여기서밖에 읽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나로 하여금 찐한 독서를 하게 만들었는데 가져가면 뭐가 되냐.” 스스로 독서의 배수진을 치는 이 친구 앞에, 남의 책 못 갚으면 마음의 짐이 되니 안 빌린다는 나의 수준은 무색해진다.




하루는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다. 마침 그는 책을 읽고 있었고 주변에는 물컵과 과일 깎아 먹은 접시며 과도, 휴지, 수건 이런 것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약간 겸연쩍어 하면서 치우는 시늉을 했으나 나는 그를 헤아렸다. 그리고 내 입에서 “아, 됐어. 놔둬” 소리가 나오길 은근히 기다리는 그의 마음까지 읽어버렸다. 읽던 책을 냉큼 덮지 못하고 편 채로 방바닥 엎어 놓는 것이 그 증거였다.




책읽기는 오줌누기와 닮았다. 한번 ‘필’을 받았을 때 내리 읽어야지 끊었다가 이어 읽기란 오줌발 잇기만큼 어렵다. 집안 살림하는 아줌마들이 독서와 거리가 멀어지는 까닭이 여기 있다.




우리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언니들과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살림 대충 하고 살아라. 하루에 한 끼는 빵이나 국수로 때워라. 밥 세 끼 다 해 먹고 살림 완벽하게 하다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안 나온다. 그런 삶은 힘이 없고 재미가 없다. 죽는 순간에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심부름도 시키지 않으셨다. (그래도 밥상 앞에서 책 들여다보는 것은 철저히 금지하셨다.)




책은 도서관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집을 떠난 공간은 다 도서관이다. 눈앞에 일거리가 보이지 않는 공간은 다 도서관이다.




집안에 있는 최고의 도서관은? 정답은 화장실. 우선 책읽기의 가장 중요한 조건, 착석이 자연스레 보장되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경주 천마총에 갔을 때를 잊지 못한다. 유난히 배롱나무가 많았는데 그 나무 아래 저마다 앉아 책을 읽는 아줌마들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헝겊깔개와 작은 보온병이 그들의 독서가 어제오늘 우연한 게 아님을 증언하고 있었다. 집을 떠날 수 있는 용기, 집을 나와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는 선택,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몰입하는 소신, 그것은 왕궁을 나와 견성을 향해 고요히 고행하는 붓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제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아이들은 없다. 그러나 어미를 존경하는 자식은 드물다. 책을 읽는 어머니는 존경받지 않을 수 없다.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삶의 수행자이기 때문이다. 살림은 여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여자 스스로 살림을 놓을 때, 책이 깃들 시공이 생기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삶이 움튼다. 그게 자기 집 화장실이면 또 어떠랴. 오히려 더 쉽고 편한 것을.




여성학자

매체명: 한겨레신문

 게재일: 200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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