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ap) lifemail - 강유정의 영화세상 <목숨을 건 사랑>

목숨을 건 사랑


사람들은 '사랑'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매트릭스'의 네오를 살린 것이 트리니티의
사랑이었듯이 말이다. 때로 사람들은 그런 결론은 어처구니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영원한 사랑은 언제나 낭만적 수식으로 가득찬다. 장윤현 감독의 '황진이'의 황진이도 사랑했던
사람의 유해를 뿌리며 영원을 약속하고 '은행나무침대'의 주인공들도 세월을 거듭한 사랑 앞에서
눈물 흘린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게 위대한 구원일까? 때로 사랑은 구원이라기보다는 독약일 때도
있는 듯 싶다.

2007년 8월에 개봉하는 '기담'은 그런 점에서 주목 할 만하다. 분명 공포 영화를 표방하고 있는
이 작품은 '안생병원'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진행된다. 중요한 것은 공포스러운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다름 아닌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딸아이를 지극히
사랑한 어머니, 새아버지를 사랑한 딸, 남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아내.
그들의 질긴 사랑은 일상을 공포로 뒤바꿔놓고 만다. 그리하여 사랑 때문에 그들은
결국 이 세상과 결별하게 된다.

에밀리 블론테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히스클리프 역시
마찬가지이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 대해 가졌던 사랑을 증오의 감정으로 거둬들이고자 한다. 그 지독한 사랑은 대를 이은 복수심으로 변질되면서 독해진다. 변해버린 와인이 독이 되듯이 향긋했던 한 때의
추억은 치명적 환부가 되어 침잠한다. 사랑은 증오로 곪아가다 폭력으로 화한다.

대를 이어 지속되는 사랑, 증오로 변질된 사랑은 장윤현 감독의 '은행나무침대'에도 등장한다.
환생을 거듭해서 만나는 그들은 전생의 악연을 반복하는 듯 보인다.
다시 만나도 그들은 여전히 불행하다. 짝사랑을 하는 누군가는 끊임없이 그래야만 하고
이루어질 수 없었던 연인이었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사지를 잘라 침대에 고이 모셔놓은 남자에게도 이런 잔혹한 면모는 발견된다.
자신을 무시하고 돌아보지 않던 여자, 헬레나. 남자는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녀의 사지를 없앤 후 토르소로 만들어 애지중지 한다. 살아있으되 그녀는 살았다고
말하기 힘든 삶을 산다. '남자가 사랑할 때'로 번역되었지만 '헬레나를 가두다'(Boxing Helena)라는
원제는 남자의 왜곡된 사랑을 훨씬 선명하게 보여준다.

가두고 싶은 것, 어쩌면 사랑은 이 욕망과 뒤섞이곤 한다.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순간 사랑은 달라지고 만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영생을 누리는
악마가 된 드라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세상을 구원한다지만 한 사람의 영혼을 폐허로 만들 수도 있다.
누군가를 폐허로 만들 수도 있기에 사랑은 위대한 아이러니이며 역설일 것이다.
결국 목숨까지 앗아가고서야 만족하는 큐피트도 있다

작성일: 2007년 08월 02일

http://www.lifemaeil.com/news_view.php?print_no=1248&seq=1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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