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세 소설, 향
오한기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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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세 , 오한기

도서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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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향 시리즈의 다섯번째 작품, 인간만세.
블랙코미디를 자처하는 오한기 작가가 생각하는 블랙코미디란, ‘인생을 내려놓았을 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장르’라고 하니 책을 읽는 내내, 드문드문 들었던 알 수 없을 것 같던 의문이 비로소 풀린 느낌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 대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작가가 써내려간 자유로운 이야기들을 그저 받아들이면 되었는데 다소 알쏭달쏭한 느낌 때문에 소설이 어렵게 느껴졌던 거다. 그런 느낌을 이어가면서도 소설을 이끌어가는 소재들을 펼쳐내는 상상력과 엉뚱한 듯 ‘리얼’한 서술에는 괜스레 히죽히죽 웃음이 터지고 이상하게? 유쾌한 도발의 맛을 진정 느낀다. 활개치는 듯, 작가의 세상을 향한 도발에 엮이고 싶다면 반드시 읽을 것.
그것은 곧 ‘리얼리티’다.

실제 작가의 ‘답십리도서관 상주 작가 경험’을 바탕으로 씌여진 소설은 다양한 인간 군상의 정점을 드러내는 일도 한몫, 과학은 문학보다 위대하다고 말하는 전직 화학 교수 KC가 폄하하는 문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반박, 그러다가 인간의 트레이드마크라는 ‘똥’으로 귀결되는 ‘인간 이꼬르 똥’, 상주 작가의 마이크를 가지고 도망쳐버린 초등학교 4학년 ‘민활성’을 찾아 헤매는 사투에서 환청인 듯 아닌 듯 상주 작가의 귀에 줄기차게 늘리는 ‘똥’소리, 똥똥똥똥똥똥..... , 자신의 상주 작가 자리를 빼앗았다며 대결을 펼치자는 ‘진진’이라는 인물의 집요함까지 ...

이상한 것 투성이인 것 같은데 돌이켜 다시 보니 이러한 발랄한 자유와 호기로운 발상은 이 소설의 트레이드마크라고 칭하고 싶은 ‘리얼리티’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한 수순은 아니었을까.
소설의 모든 내용의 연결 지점에는 반드시 문학이 있고 소설이 있었다. 소설 저변에 깔린 문학적 상징성, 즉 그 ‘상징’이라는 것은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티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소설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고 할 때, 소설 속 KC가 집요하게 묻고 또 물었던 문학의 의미와 가치에 답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소설을 읽으면서 그림자처럼 깔려있는 이 문학의 상징 때문에 이 소설을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간혹 품고 있었지만 153p에 언급된 말처럼 ‘상징은 열려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 속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을 향한 ‘인간만세’를 품고서 소설이 함의하는 문학적 상징성을 ‘리얼리티’라 읽게 된 것이었다.

<20p, 대체 문학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소설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 거냐고요. >

<127p, 소설은 현실의 상징입니다. 상징이 바로 리얼리티라고요. 당신은 훌륭한 리얼리즘 소설을 쓴 겁니다. >

<72p, 문학적으로 작가님을 살해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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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들꽃 산책
이유미 지음, 송기엽 사진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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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들꽃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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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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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p 숲속의 꽃들에게 매번 마음을 빼앗기고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꽃 하나하나의 모습과 빛깔, 생태가 그 어느 하나도 예측되는 것이 없고 식상한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

언젠가부터 걷는 도중 마주치는 꽃들과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나무들을 보면 잠시 멈추어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꼿꼿하고 묵묵히 존재를 드러내는 그 아름다움에 반한 것일까. 계절의 순환에 따른 속절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피고 지고 다시 피어나는 생과 멸의 이치는 어떤 고결한 약속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무수히 살아 숨쉬는 꽃과 나무라는 자연의 숨을 맡는 일이기도 하겠다. 드러내는 자태와 뿜어내는 향취는 그들 존재의 이유라도 되는 듯 각양각색이어서 알아갈수록 새로운 개성의 신비를 일깨워준다.
이 책은 식물을 삶의 반려로 삼는,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전하는 식물학자와, 수많은 꽃을 앵글에 담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야생화 사진작가로 자리매김한 사진작가의 합작이다.
봄이 시작되는 3월부터 겨울에 이르는 2월까지 이 땅의 들꽃과 함께 한 1년의 기록을 담아낸 이 책은 1부에는 아름다운 풀꽃 산책을, 2부는 행복한 나무 산책을 이야기한다.

식물을 처음 만난 장소와 추억이 소환되기도 하고 그 꽃과 나무가 가진 개성과 특징, 식물의 고향, 식물 이름의 유래나 사는 곳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생태에 대하여 식물이 전하는 다정한 온기처럼 차분하고 따뜻하게 글을 풀어낸다. 식물에 대한 사랑이 한 줄의 문장으로도 여실히 느껴지고 물 맺힌 듯 그리움 서린 추억이 생생하게 전해지기도 한다. 식물 각각의 자태와 살아가는 방식은 독특하고 신비로워 놀랍고, 더하여 매력적인 감동이 있다.

사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식물의 생태를 읽고 있으니 다른 두 가지 이유로 뭉클하고 먹먹한 마음이 되었다. 살아가기 위해 달리하고 적응하는 식물의 지혜가 고귀한 노동처럼 느껴져 그러했고, 식물에 대한 사랑으로 뭉쳐진 열정의 발자취가 정성어린 글과 눈에 담아낼 사진으로 남았으니 무수한 그 걸음의 여정과 그것의 아름다운 기록에 마음이 일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이 책은 식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의 기록이자 찬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들꽃 산책이란 제목이 마음에 꼭 든다. 산책이 좋은데 수식하는 것이 들꽃이라 더 좋고, 무수히 많은 개성을 지닌 식물 중 나를 더 강하게 사로잡아 마음의 한 가운데 자리잡을 들꽃을 새롭게 갈망하게 되어 설레인다. 이제 내게 산책은 아름다운 결기로 세상을 향해 뻗어있는 꽃과 나무를만나는 특별한 약속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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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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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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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기다렸어요! 작가님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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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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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식스티 나인 , 무라카미 류
<도서협찬>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___무라카미 류

초반부터 실실, 깔깔깔 웃음을 주더니 ‘___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___’으로 시작되는 장난스런 반전의 어투하며, 진지함과 코믹이 어우러지는 향연에, 네모반듯하게 그다지 재미없는 청소년기를 보낸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고교생들의 에너지와 호탕하게 날아오르는 그 기세에, 그만 푹 빠져버렸다. 이 골 때리는 유쾌함과 주인공 ‘겐’을 중심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들의 활력만으로도 돌아오지 않는 우리의 청춘을 미끄러지듯 스치며 추억으로 회귀하고, 나와는 다른 어떤 청춘의 얼굴들과 몸짓과 정신에 아찔한 모험처럼 그들의 길 위를 서성거린다. ‘나도 너희들의 버스에 타게 해줘’라는 간절한 느낌으로다가.

이렇게 에너지 가득하게 빛을 내뿜으며 재미있을 일인가.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라는 무라카미 류의 말처럼 소설은 그에 딱 맞는 즐거운 옷?을 입고 있다. 느긋하게 땅 위에 서 있는 듯 하다가도 이내 하늘로 솟아오르는 자유분방함, 그래서 이 열일곱살 청춘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세는 그저 한낱 꿈만이 아니다.

식스티 나인, 69. 무라카미류의 1969년, 고등학생 시절 일어난 일을 토대로 한 자전적 성장 소설이다. 도교대학이 입시를 중지하고,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가 있었고,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는 히피가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던 1969년. 미국 기지촌 도시에 자리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무라카미 류로 대변되는 ‘겐’과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반체제적이고 선생이나 형사와도 같은 권력에 저항하는 뚜렷한 ‘겐’의 날카로운 사고에 놀라다가도, 제대로 본 적 없고 내용도 모르는 문학과 영화 등을 줄줄이 꿰어 청산유수 같은 느낌 제대로 살리는 허세의 ‘겐’에 팡팡 터지는 웃음 멈출 길 없고,
학교 옥상에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바리케이드’를 침으로써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는 플랜카드 슬로건을 과감히 내걸면서도 그 저항의 기저가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눈길을 끌고 싶어서였으니,

이 웃픈 행위로 온 정신을 빼앗는 겐을 도저히 미워할 길 없고, ‘이야야’라는 그룹의 이름 하에, 겐의 간절한 꿈이었던 페스티벌을 개최하기 위해 벌어지는 각종 에피소드와 그래서 결국 어설플 망정, 연극과 영화와 연주와 노래가 어우러지는 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치루어내는 열일곱 살의 패기와 열정에 도취되지 않을 길 있을까.

그러니 이 소설은 우리의 ‘축제’다. 무엇을 위해?
무라카미 류의 표현대로라면, 즐거움을 위해.
타오르는 에너지를 기저로 무엇보다 즐거운 인생을 살기 위해. 그 즐거움으로 한바탕 웃음을 치르고 싶다면 이 소설, 무라카미 류의 말들로 식스티 나인을 읽으면 그만인 것을.
이 즐거움을 유머로, 유쾌함으로, 생기로, 열정으로 벽돌처럼 쌓아 올렸으니 이 벽돌 하나를 뺄 때마다 즐거움은 이어지고 왠지 그 끝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듯, 벽돌을 들고 무라카미 류가 서 있을 것만 같은 나의 엉뚱한 상상력. 왠지 이거 ‘겐’에게 이어져 온 것 같소!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다.
유머의 포인트를 제대로 펼쳐 보이는 문체에,
각기 다른 개성을 두른 인물들의 즐거운 묘사에,
어긋나더라도 즐거움을 버리지 않는 그 정직함에,
인생이 이 소설과 같이 웃을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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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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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 시몬 드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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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152p
사람이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도, 살 만큼 살았기 때문도, 또 늙었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은 무언가로 인해 죽는다.

📖153p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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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중반 무렵에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며,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소멸 되어버리는 그 때와 내 존재의 기원인 엄마의 죽음을 목도할 때를 상상하고 곱씹으며 불안과 우울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고통스러운 것에 집착하듯 나를 부딪쳐 보면 어느새는 무뎌지고 그 과정에서 체념하게 되겠지, 그러나 결코 ‘죽음’이란 아무리 잘게 곱씹어 삼키려 해도 소화되지 않는 어떤 덩어리로 여겨지는 무시무시한 실체라는 사실만을 고통스럽게 각인해야만 했다. 죽음이라는 그물에 얽힌 물고기처럼 그 속에서 발버둥을 쳐보다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야 할 그물을 나는 고통스러운 안간힘으로 빠져나오는 것으로 의식에서 죽음을 지웠다. 그래야 ‘편히’ 계속 살 것 같았으므로.

그리고 지금 다시, 보부아르가 응시하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존재의 실체로서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남겨지는 일에 대하여, 살고 싶은 열망과 희망을 겹겹이 두른 채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서서 죽음을 통과하는 인간의 결말에 대하여, 그 죽음이 나의 엄마일 때 존재의 실체로서 느끼는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 거짓없이 목도하며 가차없는 마음으로 죽는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무언가로 인해 죽는다는, 반드시 인간의 숙명인 그 죽음이 인간 누구에게라도 ‘하나의 부당한 폭력’임을 규정하는 보부아르를 통해, 죽음이 있으니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미래 희망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죽음,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고야 말았다.

보부아르는 소원했던 엄마의 죽음에 다다른 고통을 지켜보며, 가부장제 속 타자라는 정체성을 끼고 살아올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지난했던 삶을 반추하고 엄마로 대변되는 가부장제 아래 모든 여성의 삶을 통과하며 스스로도 그 여성의 정체성을 두르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보부아르는 엄마의 죽음과 함께 엄마의 삶을 돌이켜 보는 것으로 한 여성으로서의 엄마의 삶을 그대로 응시하며 ‘공감’과 ‘연대’를 통해 엄마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보부아르의 글쓰기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임을 알게 된다. 존재론적 숙명으로 규정되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는 달리, 보부아르의 실존은 갈등을 끼고 살 수밖에 없는 실존 조건 아래 인간 존재들이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부아르의 ‘실존’은 윤리적 실존을 영위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탐구다. (이른바, ‘실존주의적 윤리’)

보부아르는 생의 가장 극적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의 문을 열어,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을 직면하게 한다. 죽음을 응시하고, 또 직면하라는 듯이. 그러니 그 죽음을 응시하는 것으로 나는 한 번 죽었다. 동시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보부아르의 실존적 의미를 각인해야 하는 것은, 영원한 죽음 이전에 우리는 아직 살고 있기에, 함께 공존하기 위한 공감과 연대를 위해 우리는 어떤 윤리적 실존의 노력을 더듬어가야 할 것인가의 방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보부아르의 문장에 죽음에 대한 그 모든 사색이 스며 있다. 죽음에 당도하는 그 순간에, 하염없이 스러져가는 엄마의 고통스러운 육체를 통해, 엄마의 성기를 목격함으로써, 엄마의 입 모양을 본 충격을 통해, 엄마에 대한 사랑을 절감하고, 엄마와 동일시하며, 고통스러운 연민으로 고뇌를 가누지 못한다.
엄마의 죽음에 서린 고통을 함께 하는 것으로, 온전히 고독하지만은 않은 그 죽음은 ‘편안한 죽음’이 된다.
결국 인간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것만이 보부아르의 실존주의 ‘애매성’을 벗어나는, 인간 실존의 결정적이고도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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