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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인 케미스트리 1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룹 결성 46년 동안 2억장 이상의 앨범 판매, 그래미상 22회 수상,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기에 걸쳐 모두 빌보드 200 차트 1위를 기록한 전세계 유일한 밴드,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이는 전설적인 밴드 U2가 써내려온 기록들이다. 2019년 U2의 역사적인 첫 내한공연이 있었다. 공연의 모든 순간들이 감동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울트라바이올렛 (Ultraviolet)‘이 흘러나오던 순간이었다. ‘울트라바이올렛‘은 ‘전 세계의 여성들이 (남성의) 역사를 (여성의) 이야기로 다시 써내려 가는 그 날이 인권의 가치가 인간의 악함을 몰아내는 진정 아름다운 날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긴 노래다.
U2의 리더 보노가 “세계 여성들이 단결하여 역사를 새로 써 ‘허스토리 (Herstory)’로 만드는 날이 바로 뷰티풀 데이”라고 외치자 스크린의 ‘히스토리 (History)‘가 ‘허스토리(Herstory)’로 바뀌며 한국을 비롯해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여성들이 화면에 등장했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한국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 박경원, 대한민국 1호 여성 변호사 이태영 박사, 국내 최연소 축구 국제심판 홍은아 교수 등이었다. 또한, 노래를 마치며 아직도 완전히 평등하다고 볼 수 없는 여성들을 위해서 U2가 한글 자막으로 전한 메시지는 너무나 큰 감동이었다.
“우리 모두가 평등할 때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읽고 ‘엘리자베스 조트’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3년전 U2 공연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오늘날 우리는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레슨 인 케미스트리>가 다루고 있는 젠더, 인종, 동성애 문제는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1950-60년대뿐만 아니라 2022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사회적 이슈로 남아 있다. 이 책이 2022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고, 뉴욕 타임스와 아마존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고, 애플TV에서 드라마화까지 결정될 정도로 주목 받은 것은 어쩌면 이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물론 상큼 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엘리자베스 조트라는 캐릭터가 화학이라는 소재로 풀어낸 이야기 전개 자체가 너무나 재미있고 매력적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주제였다면 이 소설이 이 만큼의 파급효과를 불러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설을 읽다 보니 엘리자베스 조트라는 캐릭터에 용기를 가지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 했던 수많은 영웅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다. U2 공연에서 히스토리 (History)‘가 ‘허스토리(Herstory)’로 바뀌며, 여성 인권을 위해 기여한 영웅들을 조명한 것처럼, 비단 젠더 이슈 뿐만 아니라 인종과 동성애 등 인류의 진보를 위해 힘겨운 걸음을 내디뎠던 영웅들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이제까지의 역사는 남성이 중심이 된 승자의 역사였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사람들, 소외되거나 외면 받은 수많은 개인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과연 역사의 페이지에 그들의 몫도 있을까?
하지만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역사의 주역은 그동안 세계와 인류를 위한 진심을 보이고 사라져간 수많은 우리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평범한 개인들이 존재했기 때문 아닐까? 그들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의 우리를 만드는 진정한 영웅들 아닐까? 어쩌면 보니 가머스 작가가 <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쓴 건 그러한 영웅들에게 바치는 찬사의 의미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시작하기 전 작가가 남긴 '나의 어머니 메리 스왈로우 가머스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세운 업적으로 평가받고 싶어."
"널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
"그게 문제야, 날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엘리자베스는 평생 이런 감정을 느끼며 살아왔다. 자신이 이룬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에 따라 규정되는 삶을 이어온 것이다. <1권, 98 페이지>
그렇다면 왜 엘리자베스 조트는 화학을 소재로 선택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게도 엘리자베스 조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화학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사회적 차별과 억압 속에서도 화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조트가 우연한 기회에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6시 저녁식사>라는 요리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었을 때 나도 처음에는 다소 개연성이 없는 전개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했해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화학강의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에 수긍하고 응원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화학은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고 말한다. 화학을 통해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기본적인 개념과 규칙을 이해하면 삶을 대하는 자세와 방식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이다. 인종, 성별, 사회적 신분 등에서 기인하여 사회적 부조리를 만들어 내고 이를 고착화시키는 인위적인 문화와 종교 등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깨어 있는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요리야말로 ‘새 에너지를 창조하고 새 세대를 번성시키는 진지한 화학 실험’이란 엘리자베스 조트의 말에서 화학자인 그녀가 요리를 만들며 새 세대를 번성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주부들에게 화학강의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합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진보를 이루는 길은 외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과 삶이 다르므로 각자의 삶에 말을 걸고 변화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개개인의 구체적인 관심사와 전략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엘리자베스 조트가 보여준 것처럼 근본적인 개념부터 재정의하고, 고의식을 전환하는게 호중요하다고 본다. 훌륭한 화학 강의를 들려 준 엘리자베스 조트에 대한 화답의 의미로 <레슨 인 케미스트리>의 서평에 대한 마무리를 화학으로 비유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화학에서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결합으로 구성된다고 알려져 있다. 중성자는 유의미한 역할이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양성자들을 잘 잡아주어서 원자핵이 안정적인 구조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도 중성자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 아닐까? 표면적으로는 큰 기여가 없는 듯 보이지만, 주변 이웃과 사회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기반으로 세상을 진보시키는데 구심점의 역할을 하는 사람. 우리 시대에도 '엘리자베스 조트'가 필요하다.
그녀는 종이를 얹은 이젤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마커를 쥐고 "화학은 변화다"라는 문장을 쓰고서 방청객을 돌아보았다.
"자신에 대한 의심이 들때마다, 두려움을 느낄때마다 이것만 기억하십시오. 용기는 변화의 뿌리라는 말을요. 화학적으로 우리는 변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내일 아침 일어나면 다짐하십시오. 무엇도 나 자신을 막을 수 없다고. 내가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더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규정하지 말자고. 누구도 더는 성별이나 인종, 경제적 수준이나 종교 같은 쓸모 없는 범주로 나를 분류하게 두지 말자고. 여러분의 재능을 잠재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미래를 직접 그려 보십시오." <2권, 25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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