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리부트 - 혐오의 시대를 뚫고 나온 목소리들
손희정 지음 / 나무연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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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은 본 제목이 요약하듯 어디선가 본 핵심어와 개념들, 분석의 조각들을 심지어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는 이질적 계열들까지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엉성하게 엮어 만든 ’대중문화 인상비평’만을 연장한 수준으로 한국사회 분석을 시도한 글들을 묶어놓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근거가 매우 박약하고 증명과정이 전혀 없으며 전반적으로 특히 중요 지점 곳곳에서 설명이 난삽할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는 현상의 파편, 사회의 표피만을 논함으로써 그 외, 사회의 정작 중요한 부분들을 완전히 삭제해 버린 채 거의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정상회담> 비평문에서도 동시간대 여타 채널들의 예능분야 토크쑈 프로그램들과의 비교라든가, <비정상회담> 제작진들과의 접촉을 통한 배경, 의도 확인 등등 정말 최소 중 최소한의 기본적 조사 방법과 절차들조차 완전히 무시한 채 순전한 추측만으로 무책임한 인상비평만을 해대고 있는데, 예를 들면 유사 프로그램들로 타자로서의 이주민을 다루는 <모란봉 클럽>, <이제 만나러 갑니다>, <남남북녀>, <미녀들의 수다> 등이 여성 출연자들로 도배되었던 현상이나 결혼 이주 여성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KBS, EBS 등의 지상파 TV 프로그램들 정도만과의 비교추리도 전혀 없이 각 전파 및 채널 별, 시간대 별 시청자 계층과 특성 분석조차도 완벽히 생략한 채 독단적인 비약을 일방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을 뿐이다. 가장 손쉽게 성립가능한 대안가설은 <비정상회담>의 채널, 시간대 주 시청자층으로 여성이 압도적이거나, 더욱이 외국인 여성 출연자들을 많이 배치할 경우 전국민적으로 강렬한 기억을 남긴 <미녀들의 수다> 아류작이 되어버려 식상감을 줌으로써 시청률이 급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용시민’의 탄생을 다룬 글에서도 나르시시스틱한 피해자 서사란 전형적으로! 여성주체의 특성인데, 이러한 특성이 이번엔 왜 정반대로 아재, 그것도 무려 386 아재들의 어용성을 설명해내는 이유로 동원되어 갖다 붙여졌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이 논리대로라면 여성주체들, 특히 시집 못간 노처녀들이야말로 일찌기부터 전통적으로 반지성주의 어용시민의 핵심 중 핵심을 구성해왔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나도 너만큼 똑똑해’, “나는 소수이지만 정의롭고 옳다”라는 나르시시즘과 피해자 서사의 결합은 전형적이고 전형적인, 인류학적으로 전형적이고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어왔던 바로 그 여성/페미니즘 담론이 아닌가?!

이 논리적 비약과 반전의 모순을 메워주는 것은 오로지 교묘하게 은폐된 남성혐오, 특히 아재혐오증일 뿐으로 이렇게 해서 전형적인 ’내로남불’ 논리학이 요란스럽게 시전되는 과정이 코믹하게 펼쳐지면서 궁극적으로는 원래 의도와 정반대로!! 현재 한국 반지성주의의 가장 문제적 주축이 웜련, 메갈련 같은 저질 페미니즘 대중이라는 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대우증명해내는 데에만 성공하고 있다. (정확히는 3단 귀류반증에서 제2단 소전제 대우반증 및 조건부정(형 귀류)명제 확증)
뿐만 아니라 실제 정치적으로도 386아재들의 liberal 어용성보다는 ㄹ혜를 ’햇님[←혜님]’, ’킹혜/킹해’라 찬양하며 위기국면 곳곳에서 기꺼이 구출해내기를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반동보수를 추종하고 내장 깊숙이 좌파를 혐오하는 이 저질 페미들의 진박 어용성이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훨씬 더 위험하고 문제적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도 여기에는 철저히 입을 다문다.



이러한 노골적 논리 모순은 다음과 같은 인용구 등 곳곳에서 수시로 드러난다.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와 파퓰러 페미니즘이 투쟁해온 것은 남성으로 젠더화된 대중의 개념에 여성을 기입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시에 ‘여성화된 것’이라는 ‘낙인’과 함께 가치 절하되었던 대중성/통속성 안에서 정치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대중(성)은 남성으로 젠더화되어 있으며 동시에 ’여성화된 것’(이라는 ’낙인’과 함께 가치 절하되어있는 어떤 것)이다. 이 젠더의식 과잉의 편집증적 젠더놀음에서 ’대중’개념을 왜 소외Veräusserlichung된 채 거세되고 자궁적출/유방절제되어 고유의 역동적 생명력을 잃고 사물화Verdinglichung/대상화Vergegenständlichung된 ’중성’으로 보았으면 안되었는지는 역시 설명이 없다.
세상 만물을 젠더의 색안경으로만 볼 경우 많은 문제와 모순을 양산하지만 여기서 지적하지 않으면 안될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이 젠더 편집증자가, 본인 스스로 젠더 이분법과 젠더 고정관념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면서 가부장제의 충실한 개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이 경우처럼 무력하거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개념에 여성을 대비하면 가부장제가 원한다고 주장되는, 여성에 대한 젠더 고정관념을 스스로 계속 온전하고도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세상만물에 확대재생산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이 경우는 ’대중’의 복합다면적 역동성, 가변성도 전혀 볼 수 없게 단순화시키는 고정관념의 생산 행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외 난삽성이 집약되는 지점은 신자유주의와 혐오에 관해 논하는 글로서 이건 물론 유의미한 신자유주의론은 아니고 단지 신자유주의 정서론 쯤이 될텐데, 정동이론을 성공적으로 발전시킨다면 감정(의) 사회학 정도가 생성될 수 있을 것이나 본서에서도 드러난 바와 같이 소위 ’감정의 인클로저’가 갑자기 왜 출현했는지는 고찰이 부족한데 이런 종류의 오류가 정동이론-감정사회학 계열의 치명적 고질병이 될 공산이 농후하다. 그냥 ’혐오’, 좀더 심화된 분석을 했을 때 겨우 ’감정의 인클로저’가, 주어진 문제의 시작이자 전부로서 사고회로가 닫혀버리게 되고 만다. 따라서 모든 (사회) 문제와 대책이 감정싸움으로 변질되어, 가능한 대안적 사고와 전략이 ’미러링’ 수준에 주저앉아 머물러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미심쩍은 ’감정의 인클로저’란 사실 21세기 현대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실재계의 인클로저 작동에 대한 정신적 반영이자 연쇄 감응 현상일 뿐이어서 이 실재의 인클로저 해소 없이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좀더 합리적인 설명틀의 대략은 차라리 다음과 같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내부식민화와 노골적 차별 및 배제를 통해 얻어지는 내부식민지 초과이윤을 포함한 각종 초과이윤 부스러기들을 통해 이윤율하락과 축적의 위기를 타개하면서 독점을 극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에서 중산층조차 붕괴시키고 사회를 극단적으로 양극화하기 때문에 전사회적 경쟁과 계층갈등이 격화되고 이데올로기 지형도 양극화하게 되며 개인주체들 및 계층별 혐오와 분노도 극단화된다. 이 혐오와 분노는 전계층을 관통하나 그 강도 및 집중적 발원주체와 투사대상 등은 개별 사회들의 구체적 구조와 계층구성, 역학관계 및 정세, 계기와 사건들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것이며, 일반적으로는 이데올로기 양극화에 따른 전세계적 공통현상으로서 부상하는 극우단체들이 이러한 혐오의 집중 분출원이 되고, 우리나라에서도 일베 등등 그 맹아는 이미 출현한 지 오래되었다. 또한 대개 혐오는 하위계층을 향하기 때문에 (특히 위협적 경쟁자로 생각되는)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계층 및 피부양계층에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소위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의 부상도 흔히 생각하듯 한국만의 특유현상이 전혀 아닌 전세계적 경향이며 이러한 계층갈등들의 한 기축인 것이다.



이런 류의 설명 모델과 본서 모델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문제적 여성혐오의 발생원리와 분출주체가 [해결되지 않는 3, 4차 구조 위기와 세계 대공황 및 장기침체, 누적된 노동유연화와 고용절벽으로 인한 데이트 비용 등등 남성-가부장 (생계부양자 모델/가족임금) 제도의 붕괴에 따른 고통호소 차원에서, 제도/체제 전환의 대안도 그렇다고 고통분담의 의지도 전혀 없이 가부장제와 체제에 딱 달라빌붙어 하층계급 남성만 ’찌질이’, ’루저’ 등으로 경멸, 증오하며 차별, 배제하려는 일부 (과시적 과소비 갈망의) 반동적 여성들을 비난하고 싶은 남성대중심리를 영악하게 전유 활용함으로써] 여성 등등 약자 ’일반’에 대한 공격과 전반적 차별, 배제 사회를 핵심목표로 추구하는 극우성향 중심의 남성 부분들인가 아니면,
"혐오란 나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부분에 대한 거부반응이"기에 자신의 정체성/동일성을 위협하는 타자로서의 여성 일반을 배제하고자 하는 모든 남성 일반인가라는 사회정치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바로 ’그’ 문제이다!
남성들의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들을 소득, 지위 등 가부장제의 단선적 가치체계에 따라서만 일렬로 줄세워 서열화해 평가-선택하고, 목숨을 건 ’내 새끼’ 교육열 전쟁(시장)에 광집함으로써 애시당초에 모든 자유와 다양성의 싹들을 잘라버려 모든 남성들을 체제로부터 단 한발짝도 옴쭉달싹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체제의 가장 세밀한 재생산 관리자라는 측면은 완전히 삭제해버린 채 모든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이런 식의 편파 일면적 접근으로는 왜 페미니즘이 싫어 머나먼 중동의 IS를 찾아 떠날 정도까지의 남성정서들이 터져 나오는 지 전혀 설명되지 못한 채 언제까지나 오히려 극단적 (남녀)갈등만 격화시킬 뿐이다.





이후 책의 결론부로 종말 위기에 처한 (페미니즘) 문화비평의 출구에 관해 논의하는 글에서도 저자가 동원하는 ’습관’이란, 아마 ’아비튀스’ 개념이 지시하는 그 대상을 묘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부르디외 사단의 선행 분석과 대안에 대해서조차 기본적 검토와 반영도 전혀 안되어 있는 공허하고 막연한 당위론만을 되뇌이며 끝맺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현실세계에 대한 게으른 TV, 영화적 은유를 통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 이 글은 체제의 핵심과 이해관계는 절대 건드리지 않고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대체로 타협적이고 약간 진보적이면서, 적당히 예능적이고 적당히 문화적이며, 적당히 대중적이고 적당히 계몽적인데다 무엇보다 대중과 매체들의 과분한 기대를 배반하는 안일하고 무책임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개인과 그 주변 일부 페미진영에 절실한 분발과 책무의식을 촉구하는 의도로 작성되었을 뿐 본질적으로 적대정책에 입각한 것은 전혀 아니므로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 우리에겐 (퀴어)페미니스트 선생님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실험적 혁신교육으로는 더욱더 필요하고, 그러나 운동장 사용을 둘러싼 젠더권력투쟁보다 남녀학생등이 모두 같이 어울려 놀 수 있는 놀이/운동 교육 개발이 더 중요하며 사태의 빌미가 된 남혐과 한남트윗 등에 대하여는 반성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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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8-1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젠더 편집증자˝라는 표현이 어떤 뉘앙스인지 감은 오지만, 이분야 아는 바가 너무 없다보니 님의 좋은 글부터 공부를 시작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