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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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구아포, 미 소플레테, 하비비, 나의 카나딤, 나의 하야티.



‘미 구아포’는 ‘나의 멋쟁이’, ‘미 소플레테’는 ‘나의 횃불’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하비비’는 ‘내 사랑’이라는 뜻의 아랍어래요. ‘카나딤’은 아마도 ‘날개’, ‘하야티’는 ‘생명력’을 뜻하는 터키어에서 따온 애칭일 거라네요. 이 모든 사랑스러운 단어 앞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에요.



편지를 쓴다는 행위가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한동안 기록되는 걸 두려워했거든요. 영원의 약속이 깨지는 것까진 괜찮아요. 그러나 나 자신이 여러 번 번복되다 보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지죠. 선물할 때 나는 내 이름으로 서명하지 않고 ‘2020년 2월 1일에 당신을 사랑하는 친구로부터’와 같이 적곤 했어요.



어쩌면 영원의 약속을 두려한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실은 이름 없는 이 문장만으로 나를 떠올려주길, 나의 생김새와 나의 표정과 나의 분위기가 당신을 휘감길, 그렇게 영원이 존재하길 바라는 욕심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죠. 나는 언제나 욕심이 많았으니까요.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존 버거의 『A가 X에게』라는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에요. 누군가는 연인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으로 소개하기도 했죠. 옛 교도소 73호 감방의 수납 칸에서 발견된 세 개의 편지 뭉치를 엮은 책이에요. 테러리스트 단체를 결성한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비에르가 수감되어 있던 곳이죠. 사비에르는 그의 연인 아이다가 보낸 파란색 편지들을 그만의 방식으로 정리해두었고, 편지 뒷장에는 메모를 하기도 했어요. 작가는 아이다가 보내지 않은 편지까지도 비밀의 경로로 구해서 적당한 위치에 끼워두었다고 해요. 그런 편지 말미엔 괄호 안에 ‘보내지 않은 편지’라고 적혀 있어요.



편지 뭉치를 묶은 천 조각에 적힌 글들이 재미있어요. 첫 번째 편지뭉치엔 ‘우주는 기계가 아니라 뇌와 비슷하다. 삶은 지금 말해지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다. 최초의 현실은 이야기다. 이것이 내가 기술자로 지내며 알게 된 것이다.’ 두 번째 편지뭉치엔 ‘우리는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다ㅡ우리는 그것을 지켜 준다.’ 마지막 세 번째 편지 뭉치엔 ‘집 땅'이라는 두 단어가 적혀 있었대요.



처음엔 이 소설을 구상하는 작가를 상상했어요. 편지를 쓰고, 편지뭉치를 흩트리고, 요리조리 배열하는 작가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떠올랐어요. 그런데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덧 영국의 중년 남성 작가는 사라지고 아이다란 가명을 지닌 단호한 눈빛의 여인이 앉아 있어요. 오감의 감각을 그림 그리듯 표현하는 여성이죠. 어느새 나는 감옥에 갇힌 사람이 되고, 편지를 쓴 여인을 사랑하게 돼요. 멋진 경험이었어요. 나는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줄 알았거든요.

코기토, 에르고 숨.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라틴어에요. 데카르트가 한 말이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사비에르의 메모 중 이스라엘의 항공보안전문회사 SDS에서 제조한 ‘코기토 1002’가 언급돼요. 몇 가지 질문에 따라 손의 생체반응이 기록되고, 이 사람이 주의인물인지 아닌지 밝히는 기계죠. 이름이 ‘코기토’라는 게 아이러니컬할 뿐, 사비에르는 교도관이 좋아할 기구라고 냉소적으로 말해요. 나는 이와중에 내가 코기토라는 단어를 알고 있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랑스러웠어요. 넌지시 건넨 비밀스러운 눈짓을 알아챈 기분이랄까요. 당신이 알려준 단어잖아요.



나는 성당이나 절이나 교회나 성스러운 장소에 갈 때면 두 손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시늉을 내며 눈을 감곤 했죠. 그러면 나도 모르게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와요.



부디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건 누구일까요? 나는 알고 있어요.

함께 바다에 가고 싶어요.



당신의 Y.



(보내지 않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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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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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의 늦은 밤, 혜화역을 향해 걷는 길이었다. S와 함께였다. 너라면 틀림없이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좋아할 거라고 몇 번이나 추천했던 사람이었다. 책을 훑어보다가 마지막 장에 있는 옮긴이의 말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인간을 성장시키고 회복시키는 것은 평가나 판단이 아니라 연민이라고. 연민이 우리 인간을 구원한다고. 연민은 인류에 대한 희망이자 사랑이라고.(p. 359)' 나에 대해 잘 아는 S는 역시 이 문장 때문에 이 책을 추천한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재미없었다. 나는 아직 2/3밖에 읽지 못했지만 밤길을 걸으며 섣불리 주제에 올렸다.



“오늘 하루 종일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읽었어.”


“어땠어?”


“별로였어. 너는 이게 왜 좋았는데?”


“음, 오늘도 다른 친구에게 그 책을 추천했거든. 뭐가 좋았냐고 묻는데 대답하기가 어렵더라.”


“그럼 만약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한다면 너는 어떤 질문을 할 것 같아?”


“이게 앰개시란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조명되는 연작소설이잖아. 근데 한 명 한 명이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앰개시란 마을이 일리노이주에 진짜 있을 것 같았어.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할 것 같아. ‘인물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나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느낀 것 같나요?’”


“아무래도 인물들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다각도로 드러나서 그런 게 아닐까. 모든 인물이 어둠을 가지고 있잖아.”


“너에게도 어둠이 있어?”


“있지.”


“뭔데?”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워. 그냥 나는,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것 같아. 책에도 그런 말이 나오잖아. ‘사람들은 늘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느낄 방법을 찾는다’였나. 너는 어때?”


“나는 타인과 나를 비교한다기보다는, 스스로 확신이 있었거든. 나는 잘 될 게 틀림없다는. 그런데 공포가 생긴 것 같아.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채로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어휴, 도대체 인생의 의미가 뭘까.”


“유시민 아저씨가 그랬잖아.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고. 의미는 붙이는 거라고.”



S는 내가 이 책을 별로라고 생각할지 몰랐다고 했다. '너는 알다가도 모르겠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우리의 화제는 금세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저 멀리 혜화문이 변함없이 빛나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이 책을 기어코 다 읽었고, 마지막 단편이 특히 좋았고, 결국엔 이 책이 마음에 들어버렸다. 그날 밤 내가 '나는 사소한 것에 집착하느라 큰 그림을 못 보는 것 같아.'라고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S가 단호하게 답했던 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사소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결국 『무엇이든 가능하다』도 그런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앰개시에 살고 있는 인물 중 완벽하게 사랑스러운 사람은 없다. 모두가 비뚤어진 면을 지니고 있고, 누구나ㅡ심지어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ㅡ한 명의 오롯한 사람을 알 수 없고, 충만함이란 찰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분명 사랑스럽지 않은 너의 면모까지 사랑하며, 그러기에 괜찮다고, 모두 괜찮다고. 그 '괜찮다' 한 마디론 부족해서 350여쪽에 선물 상자처럼 담아낸 책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서 체크해둔 문장을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다. 목요일 밤과 잘 어울리는 문장이었다. 이 책 덕분에 오래 간직하고 싶은 대화가 또 생겼다.




두 사람 모두 눈물이 고일 때까지 웃었고, 그래도 웃음이 멎지 않았다. 하지만 메리는 생각했다. 영원히 지속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앤젤리나가 이 순간만큼은 평생 간직할 수 있기를.


-「미시시피 메리」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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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
김하나.황선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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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2년 전, 28살의 나는 결혼 위기에 닥쳤다. 결혼 '위기'라고 표현한 이유는 온전히 사랑과 사람을 바라보고 결심한 결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야심 차게 시작한 사회적 기업은 허우적대다 망해버렸고, 한국으로 돌아와 잠수타고 치른 임용시험엔 불합격했다. 할 줄 아는 건 없(다고 생각했)고, 아버지는 곧 퇴직이고, 소위 아홉수가 코앞이었다. 그래도 내가 제일 예쁘다는 번듯한 남자친구가 옆에 있으니 아무래도 결혼이 답인 것 같았다. 그러나 진지하게 이 사람과 오랫동안 부대끼고 싶은지, 서로의 한계를 감내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아끼는지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저 안락하게 사회 속에 편입되고 싶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는 각자 꿈꾸는 삶이 극단적으로 달랐다. 나는 내가 꿈꾸는 생활에 남편 얼굴만 갖다 붙이고 싶었고, 그는 그가 꿈꾸는 미래에 아내 얼굴만 갖다 붙이고 싶어 했다. 한 명이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선 다른 한 명이 '차선의 삶'을 택해야만 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최선을 단 한 발짝도 포기하지(또는 양보하지) 못했다. 우리는 여차여차한 경위로 이별에 합의했고, 현재 각자가 원하던 최선인 삶을 살고 있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으며 스물여덟의 내가 자주 떠올랐다. 나의 상상력은 얄팍했고, 서른을 신경 안 쓰는 척 신경 쓰고 있었으며, 특히나 우정이란 관계를 얕보고 있었다. 자취를 8년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독립'을 위해선 결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의 적령기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 '진정한 독립'의 시기란 내가 정한 때라는 것, 무엇보다 '내가 선택한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선택한 우정' 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어느덧 서른인 나는 이 책 덕분에 결혼 말고 많은 것들이 하고 싶어졌다. 나의 이익을 대변해서 일하는 여성 정치인에게 연 10만 원 후원하기(연말 정산 때 반영된다!), 7단 변속기어를 가진 티티카카 자전거 타기, 꾸준히 운동해서 체력 키우기, 바깥일로 바쁠 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가사도우미 부르기, 격년에 한 번 1월 1일마다 수건, 칫솔, 비누, 샤워볼, 샤워커튼, 수세미, 실내화 같은 비싸지 않은 집기를 한꺼번에 싹 새것으로 바꾸기, 아는 건 많지만 잘난 척하지는 않는 성격 가지기,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기, 친구들과 도움 주고받기, 친구들과 작당 도모하기, 무엇보다 '더 큰 가족' 꿈꾸기가 하고 싶어졌다.

김하나 작가는 '같이 살면 좋겠다 싶었던 이유 중에는 늘 몸을 움직이고 있는 황선우의 건강한 에너지 장 안에서 영향을 받고 싶었던 것도 있다.'라고 말하고, 황선우 작가는 '이 사람과 함께 살아도 좋겠구나, 하는 결심에는 바로 이런 넓은 울타리 안에서 좋은 영향력의 파장 안에 늘 있고 싶다는 바람도 작용했다.'라고 말한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주위에 두는 생, 단지 월세를 나눠내는 정도가 아니라 같이 대출을 받아 살고 싶은 아파트를 구하는 생이란 이토록 멋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결혼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40대의 찐한 우정을 유쾌하게 기록하는 두 작가가 고맙다. 덕분에 내가 꾸려갈 30대와 40대가, 더 정확히는 우리가 꾸려갈 우정들이 더욱 기대된다. "친구들은 사회적 정서적 안전망이다"라는 김하나 작가의 말을 당당하게 인용하며 주위의 같이 살고 싶은 모든 친구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ps. 이 책에 나오는 '결혼 전에 물어야 할 13가지 질문' 기사를 찾았다. 누군가와 동거 전에 꼭 활용해볼 것이다.

https://www.nytimes.com/interactive/2016/05/03/universal/ko/marriage-questions-korean.html

 

 

 

 

 

 

김하나는 자신의 지향점이자 캐치볼 위클리의 정신을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집 평수나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라 자신의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 얼마나 힘이 있는지가 아니라
친구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지
누구는 또 얼마나 잘 얻어먹는지
얼마나 잠을 잘 자고 얼마나 노래를 잘하며 얼마나 약지 못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고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추억을 가졌는지
인생에서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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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보낸 시설 밖 400일의 일상
장혜영 지음 / 우드스톡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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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병신이라는 단어를 문득 떠올린 것은 페미니즘 서적을 읽고 있을 때였다. 며칠 전, 아이들끼리 큰 소리로 '병신아!'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고 나는 단호하게 물었다.


"'병신'은 어떤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이지?"


열네 살 아이들은 쭈뼛쭈뼛 대답했다.


"장애인이요."
"맞아. 그러면 장애인은 장애를 원해서 가진 걸까, 원하지 않는데 가지게 된 걸까?"
"원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원하지 않은 장애를 가져서 슬플까, 기쁠까?"
"슬퍼요."
"그러면 누군가의 슬픔을 장난이나 웃음거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빠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해. 앞으로 '병신'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


나는 아이들과 병신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마음 한 켠 뿌듯한 마음으로 뒤돌아섰다. 여러 단계를 걸쳐,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올바르게 교육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페미니즘 책을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장애를 가진 것은 슬프다'라고 말한 명제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는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동정하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장애인에 관한 책이나 영화를 찾아보아야겠다고 반성했고, 그렇게 읽게 된 책이 『어른이 되면』이다.


『어른이 되면』은 '생각많은 둘째언니' 이름으로 활동하는 유튜버 장혜영 작가가 쓴 책이다. 장혜영 작가의 한 살 터울 동생 장혜정 님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때 장애인수용시설로 보내져 18년을 지낸다. 이에 부당함을 느낀 작가는 동생이 서른 살이 되었을 무렵 탈시설을 돕는다. 일상의 패턴을 만들어가고, '언니 동생'이 아닌 '혜정이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관계망을 형성해간다.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노는 생활을 꾸려간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장애인',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비장애인'이며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모두 '정상인'이라는 것. 장애인이란 단어를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조차 '친절한 차별'이라는 것.


책의 끄트머리에는 부록처럼 다큐팀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저는 요즘 그런 생각도 들어요. 혜영 언니가 이 다큐 하면서 너무 힘들 것 같다는 지인으로서의 안타까운 감정이 있지만, 그게 어느 정도를 넘어서 애틋하게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건 무례한 일인 것 같아요. 사람은 자기가 가치 판단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잖아요. 혜영 언니가 더 이상 매일 밤 혜정 언니의 안위를 걱정하며 잠들지 않아서 행복하다고 하면 그게 맞는 거겠죠.(p. 252)"


내가 페미니즘 책을 읽다가 문득 병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이유는 상대를 '남성' 또는 '여성'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내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으며 인식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해왔던 장애인을 대하는 무례한 태도만이 아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무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장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 나는 다시 병신이라는 욕을 쓰는 아이를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병신'은 어떤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이지?"라고 물은 후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삶을 장난이나 웃음거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자립‘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과 보살핌 속에서 세상에 다시 없는 존재로서 ‘자기 다움‘을 위한 여행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도전과 실패의 과정에서 세상 속의 자기 자리를 찾아 나가는 것이야 말로 ‘자립‘의 참된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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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0
리브카 갈첸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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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의 40번째 책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는 '현재 생생하게 존재하는 젊은 고전들'이라는 꽤 멋진 기획물입니다. 내가 공감을 하며 읽고 있는 책을 쓴 작가와 지금 이 순간 공존한다는 것은 더할나위없는 위로를 주잖아요. 제가 참 좋아하는 친구가 선물해줘서 알게 된 책입니다. 그 친구가 이 책 전에 선물해줬던 책이 안드레이 쿠르코프라는 러시아 작가의 <펭귄의 우울>이었으니 이 친구의 취향은 참... 저와 안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_ =) 그러나 <펭귄의 우울>도 그렇고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도 그렇고 막연히 "어려워!"라는 생각보다는 중학생 때 <죄와 벌>이나 <데미안>을 읽었을 때 느낀, 그런 느낌입니다. 참 좋은 책인 것 같은데 아직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내년이 되어 제가 그 친구 나이가 되면 이 책들을 다시 읽었을 때 다른 느낌을 받게 될까요?

 

 

 

지난 12월에 내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내 아파트로 들어왔다. 

 

라는 첫문장이 아주아주 흥미롭습니다. 줄거리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50대 정신분석가 레오는 젊고 예쁜 아내 레마에게 어느 순간 이질감을 느낍니다. '가짜 레마'의 아름다운 허리에 손대고 싶은 욕구도 꾹 참고 '진짜 레마'를 찾아 나서는 레오.(이 순간에도 레오는 '내가 이 예쁜 여자의 유혹을 참아낸걸 보면 레마가 얼마나 대견스러워할까! 뿌듯해합니다. 귀엽죠?ㅋㅋ) 레오는 자신의 환자 하비가 영국 왕립 기상학회의 비밀요원이라 믿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치료하기 위해 레마의 아이디어로 '츠비 갈첸'이라는 왕립 기상학회 요원의 비밀 부하인 것처럼 행세했었는데 하비가 실종된 것이 레마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여기서 또 웃긴 게 '츠비 갈첸'이란 이름은 저자 리브카 갈첸의 아버지와 동명이며 진짜 기상학자였다고 합니다!)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그대(나)의 마음

 

변덕스러운 것은 사실 그대의 마음이 아니라 바로 나의 마음이다. 내 마음이 그대를 사랑한다면 그대의 여드름도 사랑스러울 것이고 내 마음이 그대를 싫어한다면 그대가 고이 접은 100개의 종이학이 꼴보기도 싫을 것이다. 레오는 이런저런 기상현상들을 들어 사라진 레마의 행방을 찾지만 실은 변한 것은 레오의 마음이다(아 슬퍼라). 만나는 사람 한 명 한 명마다, 현상 하나 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행동은 전형적인 사랑을 찾아 헤메는 사람의 행동이랄까. 결국에 '가짜 레마'와 사랑에 빠지는 결말은 해피엔딩 맞..죠?

 

 

 

가볍거나 혹은 어렵거나

 

'무거운 책'이란 무엇이고 '가벼운 책'이란 무엇일까요? 혹은 '어려운 책'이란 무엇이고 '쉬운 책'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좋은 책'인걸까요? 개인적으로 전자는 주제의식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거운 책이란 우리가 다 같이 생각해보아야할 문제'에 관한 것이고 '가벼운 책'이란 심심풀이로 읽기 좋은 책이랄까요? (예외적으로 '사랑'이란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너무나 많이 논의되었기 때문에 가벼운 주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후자에 관해선 가독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책'이란 속도가 빨리 안 나는 책, '쉬운 책'이란 빨리 읽히는 책.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이 책은 가볍고 어렵습니다. 주제는 아주 흥미로운데 잘 안 읽혀요. 그래서 참 답답합니다. 리브카 갈첸은 정신과 의사인데 지극히 문과인 저로서는 이런저런 과학적 현상들이 어렵기만 합니다. 과학과 사랑을 접목시키는 것도 알아야 접목이 되는거죠. 한편으론 실제 기상학자나 정신과의사, 혹은 이과계열 친구가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긴 하군요.

 

 

 

결국 우리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실 뿐이다.

 

그래도 이 한 문장 건진걸로 이 책은 읽길 잘 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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