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사실인지 아닌지 희미한 기억이 있다. 첫 번째 만남이었을 것이다. 나의 아빠 또래의 남성이었고 내 또래의 딸이 있다고 했다. 나에게 좋은 제의를 하셨고, 감사하지만 거절하는 의사를 표했으며, 서로에게 호감을 지니고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말 그대로 '호감好感'일 뿐 상식에 기반할 때 성적인 감정이 아니고 여지도 없었건만 나는 의식적으로 가족 이야기를 많이 하고 많이 여쭸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남자친구 이야기도 중간중간 언급했다. 밥을 거하게 먹었으므로 근처 공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삼풍백화점 참사 추모탑에서 잠시 머물렀고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대해 대화했다. 하루를 마무리할 시점이 다가오자 그분은 악수를 청하셨다. 끝까지 존댓말을 쓰시는 분이었다. 나는 저녁 내내 느끼던 긴장을 그제야 놓으며 기꺼이 악수에 응했다.

그리고 그대로 걸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분명 악수를 했는데, 손을 놓지 않았고, 그대로 걷게 된 것이다. 그렇게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이 나올 때까지 걸었다. 이거 뭐지? 성추행인가? 근데 이 사람이 나를 껴안거나 만진 것도 아닌데 성추행인가? 나는 왜 이대로 걷고 있지? 왜 나는 거절하거나 소리 지르지 않지?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흘렀지만 그분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셨고 현실의 나는 맞장구까지 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손을 뺄 수 있지? 왜 나는 웃고 있지? 이 상황은 뭐지? 심장이 쿵쾅거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손이 놓아져있었다. 내가 자의적으로 놓은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놓아진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친구들에게 전화하여 "내가 이상한 거야?" 묻지 않았다면 그 밤은 꿈인지 현실인지 혼미하게 남았을 것이다. ‘설마 그랬겠어’라는 생각에 기어코 착각으로 매듭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나는 버스에 타자마자 친구들에게 전화했고, 그럼에도 그 남성을 욕하기보다는, 이게 진짜 이상한 일이 맞는지, 내가 잘못한 건 아닌지, 나는 나름대로 선을 그었지만 혹시 내가 여지를 준 건 아닌지 묻는 데 급급했다.

더 웃긴 건 그다음에 한 번 더 만났다는 것이다. 연락이 왔고, 드문드문 답장을 했고, 만나자고 했고, 거절을 했고, 또다시 만나자고 했고, 거절을 했고, 또다시 만나자는 말에, 거절을 세 번씩이나 하는 게 부담스러워져서, 만날 약속을 잡고 말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어느 순간 약자가 되어 있었고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했다.

애나 번스의 『밀크맨』에선 열여덟 살 소녀에게 갑자기 ‘밀크맨’이라 불리는 남자가 접근한다. 그는 "차를 태워줄까?"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는 달리는 소녀의 곁에서 같이 뛰었을 뿐이다. 그는 소녀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소녀는 대처할 방법을 모르고, 이상한 소문이 나고, 점점 사회에서 고립된다.


'이때에도 밀크맨이 무례하게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가 무례하게 밀치고 달려나갈 수는 없었다.(p. 21)'


'그게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튀김 가게는 사실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확신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나도 그게 사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p. 341)',


'나는 또다시 주의를 듣고 다른 사람이 오해한 것을 내가 반박하고 해명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p. 402)'


나는 소녀의 혼란한 감정을 따라 읽으며 비로소 부끄러워하던 기억을 직시하게 되었다. 긴 호흡의 두꺼운 소설은 읽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당시의 감정에 대해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느낀 나의 감정이건만 나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이야기했다. 두 번째 만남 내내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는 않았다. 내가 대꾸하기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대꾸할 말도 없었지만. 나는 계속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에 골몰하고 있었다. 또 왜 마치 자기가 나를 아는 듯,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인 듯이 행동하는 거지? 모르는 사이인데? 나는 저 사람이 옆에 있는 게 싫은데 왜 저 사람은 내가 자기가 옆에 있는 것을 싫어한다고 생각 안 하지? 왜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저리 가라고 말하지 않는 거지? 등의 의문도 있었다. 다만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를 제외한 나머지 의문들은 나중에야 생각났다. 한 시간 뒤에 생각난 것도 아니고 스무해 뒤에 생각났다. 그때, 열여덟 살 때, 나는 일촉즉발인 사회에서 자랐고 이곳에서는 신체 폭력이 없는 한, 명백한 언어적 모욕이 가해지지 않는 한, 눈앞에서 조롱당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게 기본 원칙이었으니, 그러니 일어나지 않은 일에 피해를 당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 애나 번스, 『밀크맨』 中

며칠 뒤 어떤 모임이 끝나고 또래의 남자가 커피 한 잔 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 선량한 문자를 받고 나는 공포를 느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나에게 원하는 게 뭐지? 이 사람도 내 손을 잡아버리는 게 아닐까? 근데 내가 뭐라고 이런 오만한 걱정을 하지? 이성은 ‘모든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지 마라’라고 외쳤다. 그러나 나의 감정은 이성보다 더 즉각적이었다. 앞에선 웃고 있지만 실은 웃어도 될까 걱정하는 중이었다.

『나쁜 페미니스트』 책으로 다른 독서모임과 열몇 명이 콜라보 모임을 했을 때였다. 한 여성분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말 하면 놀라실 수도 있지만, 저는 사실 성추행 경험이 있어요.” 그러자 그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여성들이 증언하듯,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저도 있어요.” “저도요.” “저도예요.” “저도요.” 『밀크맨』은 그 모든 여성들에게 권하는 책이다. 부디 스스로의 감정과 기억에 의심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한다. 나도 그럴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소년이 온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1.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 말도 듣지 않고 읽기를 권하는 책이다.



2.

첫 장을 펼치면 독자는 너로 호명된다.

너는 1980년 8월 광주에 있다. 용감하지도 비겁하지도 않은 너는 단지 그곳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랐기에 그곳에 있다.

너는 친구를 생각한다. 친구는 친구를 생각한다. 친구는 누나를 생각한다. 친구는 언니를 생각한다. 그렇게 뻗어나가고 뻗어나가 우리는 모두 연결된다. 독자는 누군가에게 네가 되었다가 누군가에게 친구가 되었다가 누군가에게 누나가 되었다가 누군가에게 언니가 된다.



3.

지면이 충분한 장편 소설인데 한 번도 군인에게 마이크를 쥐여주지 않는다.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악의 평범성을 이해한다. 어쩔 수 없는 복합적 입장과 개인의 딜레마를 고려해야 한다. 인간은 애초에 불완전하기에 아무에게도 감히 돌을 던질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이 소설에서 군인들은 악하다. 시민을 도왔던 소수의 군인들은 언급도 되지 않는다. 본질을 흐리기 때문이다. 1980년 최고사령관뿐만 아니라 최전선에서 명령을 수행하고 사람을 고문하고 군홧발을 휘두르는 말단 군인들도 오직 악하다.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사정과 그들의 고뇌는 전혀 조명되지 않는다.

그 어느 평범한 악인에게도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면죄부를 주지 않겠다는, 너희는 죄책감을 느껴야만 한다는 작가의 단호한 시선이 바탕을 이룬다.

필요한 시선이다.



4.

리어카에 실려 행렬을 앞서가던, 역전에서 총을 맞았다던 두 아저씨의 몸은 어떻게 됐을까. 그 모습을 본 순간 너는 소스라쳤는데. 세차게 눈꺼풀이 깜박이고 속눈썹이 떨렸는데. 그때 난 네 손을 붙잡았는데. 우리 군대가 총을 쐈어, 넋 나간 듯 중얼거리는 너를 행렬의 앞으로, 더 앞으로 잡아끌었는데. 우리 군대가 총을 쐈어,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너를 힘껏 끌고 나아가며 난 노래했는데. 목이 터져라고 애국가를 따라 불렀는데. 그들이 내 옆구리에 뜨거운 불덩이 같은 탄환을 박아넣기 전에. 저 얼굴들을 하얀 페인트로 지워버리기 전에.

- 『소년이 온다』 p. 59


소설의 분량치고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지나치는 사람도 이름이 나온다. 한 명 한 명이 이름을 지닌 인간으로 존재한다. 지워버리지 않겠다는 오기가 느껴진다.



5.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

- 『소년이 온다』 p. 117


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



6.

그런데 이름이 나오지 않는 '나'가 있다.

그때 나는 스물세 살 교대 복학생이다. 모나미 볼펜에 트라우마를 가진 나, 담뱃불로 지져질까봐 조는 게 공포였던 나, 죽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나, 어쩌면 도청을 지키고 평생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한 낙관을 지녔던 나, 헌혈하려고 끝없이 줄 선 병원 입구와 트럭 위로 주먹밥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을 기억하는 나, 목청껏 함께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른 나, 총을 나눠 가졌지만 아무도 쏘지 않고 아무도 죽이지 않은 나, 복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지만 총기를 소지했으므로 등에 매직으로 극렬분자라고 쓰인 나,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날을 기억하고 분노하는 김진수에게 소주상만 차려주곤 이불을 덮어쓰고 돌아누운 나,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나,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혼자서 싸우는 나.

누구나 '나'가 될 수 있다.



7.

책에서 중학교 3학년 학생의 목소리를 읽으며 우리 아이들이 떠올랐다. 중학생과 같이 읽고 싶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분이 계셨다. 역사를 전공하셨다는 분은 학창시절에 5.18 다큐멘터리를 보고 점심도 못 먹었다고 하셨다. 잔인한 장면이 아른거려 성인이 되어서도 자꾸 외면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아이들에게 사실을 무작정 직시하라고 하는 것도 강요가 될 수 있다고, 눈높이에 맞춘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10년 전부터ㅡ열다섯 살부터ㅡ채식을 하셨다는 분은 말씀하셨다.

"저는 채식을 결심했던 날이 생생히 기억나요. 네이버 도전만화에서 동물권에 대한 웹툰을 보았고, 호기심에 영상을 찾아보았어요. 동물 보호 단체인 PETA에서 도축 현장을 고발하는 영상을 올리는데, 5시간 동안 눈도 떼지 못하고 봤던 것 같아요.

그날 저녁, 아버지가 감자탕을 사 오셨어요. 그 감자탕을 보고 토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보기엔 너무 끔찍한 영상들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영상들을 또 볼 거예요.

잔혹한 현실을 강제로 보게 할 수는 없지만 알려줄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내가 겪지 않은 이 다양한 경험들을 듣는 시간이 소중했다.



8.

제목 『소년이 온다』는 무엇을 의미할까?

- 진실이 온다.

- 잃어버린 소년이, 소년의 기억이 온다.

- 죽은 어린 영혼이 가해자의 잘못을 기억하기 위해 다시 온다.

-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로 쏟아져 나간, 인간이기 때문에 나간 순수한 사람들이 온다.

- 정미는 동생이 올 거라고, 동호는 정대가 올 거라고, 엄마는 동호가 올 거라고, 그렇게 올 거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다리던 사람이 온다.

- 이념이나 사상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나 도덕이나 민주주의 같은 건 몰라도, 인간이면 이러면 안 되기 때문에 움직였던 순수한 영혼들이 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낸 자
서귤 지음 / 디자인이음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박 3일로 전국국어교사모임 겨울연수에 다녀왔다. 방학에, 자발적으로, 약 20만 원의 자비를 들여, 스스로 부족한 점을 털어놓고 자원하여 발표를 하고 수업을 고민하는 선생님들이 이렇게나 많으시다는 것에 놀랐다. 마지막 날에는 연수를 마치며 『좋아하는 것은 나누고 싶은』을 쓰신 선생님, 『우리들의 문학시간』을 쓰신 선생님의 북토크가 열렸다. 교직 경력이 1년도 안 됐을 무렵부터 애정하는 마음으로 블로그를 구독 중인 분들이셨다. 독립출판물을 만드셨다는 글을 읽고 광화문 소소시장까지 시간 맞춰 찾아가서 팬심을 전하며 싸인본을 구매한 적도 있었다. 드디어 두 선생님께서 강단에 오르셨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연필을 쥐었다.



시작은 "왜 책을 만드세요?"였다. 친구이자 동료인 두 선생님은 독립서점 여행기부터 풀어가셨다. 특히 기억에 남는 독립출판물로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 『책 낸 자』, 『경찰관속으로』, 『그 여자의 자서전』를 꼽으셨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주는 울림을 헤아리며 '나의 이야기도 다른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셨다고 했다.



연수가 끝난 후 나는 두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듯 추천해주신 독립서점을 방문하고 추천해주신 『책 낸 자』를 읽었다. 서른 살에 독립출판물 『고양이의 크기』를 만들며 들었던 생각들을 풀어낸, 책을 만드는 이야기에 관한 책이었다. 얇은 만화책이라 부담 없이 읽었는데 여운은 짙었다. 좋아하기 때문에 만드는 나의 책, '책을 낸 후에 달라질 삶'을 꿈꾸며 엮어가는 나의 책, 좌절하다가 들뜨다가 그 모든 감정을 안긴 나의 책, 조심스레 가격표를 붙인 나의 책, 나의 책이기 때문에 소중한 나의 책, 그 '나의 책'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함께 겪듯 찬찬히 읽었다. 그리고 나까지 나의 삶, 나의 글감을 소중히 껴안게 되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그날 북토크를 들으며 나란히 앉은 룸메이트 선생님과 해방촌에 가자고 약속했었다. 누군가가 꺼내놓은 이야기가 연결되고 연결되어 파장을 일으킨다. 『책 낸 자』가 일으키는 크고 작은 파도를 타는 모두가 잠시쯤 같은 상상을 해볼 것이다. 책을 낸 후에 달라질 삶, 예전과 같을 순 없는 그 삶을 상상해본 후 고개를 내젓든 주먹을 불끈 쥐든 잠시나마 뭉클해질 것이다. 내가 나에게만 줄 수 있는 뭉클함이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하는 게 좋아요. 저한테 독립출판 알려주신 분이 그랬어요. 매일 하면 그게 직업이라고. 매일 책을 만들면 작가인 거예요."

- 「매일」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
이랑 지음 / 달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랑의 노래를 매우 좋아한다. 수원 행궁동에 위치한 작은 책방 브로콜리 숲에 방문한 날, H가 이랑의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를 고를 때 내심 기뻤다. H가 이 책을 산다면 나도 냉큼 빌려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랑의 책을 읽으며 이랑이라는 사람이 좋아졌다. 나와 다른 점은 다르고 같은 점은 같은 그 사람이 멋있달까, 자랑스럽달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보니 그 멋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나까지 멋있어지는 기분이었다.


멋있는 사람을 따라 하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건 나의 취향 목록에 넣어두기를 좋아하는 나는 금세 따라 할 거리들을 찾아냈다. 예를 들어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에서 '기억과 메모를 바탕으로 많은 글을 썼고, 그 글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지나치면서 흘린 말들을 주워 담고, 더 줍기 위해 뒤를 쫓아다닌다. 오늘 수집한 것은 정형외과 물리치료사들의 대화이다.(p. 18)'라는 문장을 읽자마자 당장 메모장을 켜곤 수집할 말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2020.3.15.일요일 오후 11:01

"와, 이 유튜브 1년 됐나봐!"

"대단하다. 뭐든지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대단해."


좋아, 계속 책을 읽으며 또 따라 할 수 있는 걸 탐색한다.


다음 앨범을 준비하면서 가사와 함께 써둔 글 몇 개를 사장님에게 보여줬더니 '너 얘기가 너무 많다. 세상의 중심은 너냐?'고 물어왔다. 전에 한 번 같은 내용을 썼던 것 같기도 하다. 하도 내 얘기만 해대서 나도 내 얘기를 하는 데 질린다. 그래서 오늘은 다른 얘기를 해볼까 하고 컴퓨터를 켰는데 도무지 내 얘기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다.

-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 中


이랑은 자꾸만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게 제일 재미있고 자기 자신에게 제일 관심 간다고 했다. 나도 '내 얘기하기'를 따라 해볼까? 그렇다면 나는 나에 대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내 얘기를 해야 한다면 오른쪽 눈의 쌍꺼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 쌍꺼풀은 내가 교직에 들어선 2018년 하반기에 생겼다. 예쁘지도 않고 겹겹이 쌓여 있어 누가 봐도 '피곤해 보인다'라는 인상을 전달하는 쌍꺼풀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방학만 되면 쌍꺼풀이 잽싸게 사라진다. 개학 일주일 전부턴 달력이라도 본 것처럼 슬금슬금 다시 생긴다.


2019년에는 신기한 일이 있었다. 아침을 안 먹고, 점심은 많이 먹고, 퇴근하자마자 저녁도 많이 먹고 자버리는 게 패턴이 되어버린 나날이었다. 밤 10시쯤 깨서 수업 준비를 하다가 늦게 자고 다음날 아슬아슬하게 일어나 출근하는 생활이 반복되며 몸이 무거워졌다. 5교시 수업을 하는데 내가 잠들 지경이었다. 결정적인 건 변비였다. 나는 변비가 그냥 '화장실 좀 안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인 줄 몰랐다. 배가 아파서 화장실까지 걸어가기 힘들 정도였다. 갑작스럽게 급식을 안 먹기로 결심했다. 뭐라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장을 볼 때마다 신선 야채를 듬뿍 샀고 샐러드와 고구마를 점심으로 챙겼다. 아침에는 시금치와 바나나를 넣어 그린스무디를 만들어 먹고 저녁엔 요리를 했다. 삼시 세끼 식재료를 소진하므로 냉장고가 깔끔해졌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변비가 사라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쌍꺼풀도 사라졌다.


몇 달 후 애인과 싸우고 엉엉 울다 잠든 다음날 다시 생겼다. 방학식을 하고 며칠 지나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2020년 3월 개학을 일주일 앞두고 다시 생겼고, 개학이 미뤄지며 다시 사라졌다가, 교육부의 '일주일 후 온라인 개학!'이라는 보도자료를 읽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생겼다.


그렇게 깊게 팬 쌍꺼풀은 '하루 만 보 걷기'를 실천한지 3일 만에 사라졌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쌍꺼풀이 없다.


나이 들수록 절실히 느끼는 건 '몸은 정직하다'이다. 내가 운동한 만큼, 내가 먹는 만큼 나의 몸이 된다. 요즘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거울로 달려가서 쌍꺼풀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다. 쌍꺼풀이 사라지면 몸에게 칭찬받은 기분이다. '잘 살고 있어!'라고 우쭈쭈하는 것 같다. 한편 쌍꺼풀이 있으면 말 못 하고 응애 울어버리는 아기처럼 몸이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왜 쌍꺼풀이 생겼는지, 요즘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무엇인지 곰곰이 되짚어보게 된다. 물을 듬뿍 마시거나 동네 한 바퀴 걸으며 몸이 날 다시 칭찬해 주길 기대한다.


나로서는 이런 나의 이야기가 교훈이나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고 멈춰버리면 쑥스럽다. 그래도 오늘은 이랑 따라 하기의 날로 내 얘기만 멋대로 할 거니까 여기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년을 시작하며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두 권의 책이 있다. 바로 『걷는 사람, 하정우』와 『마녀 체력』이다. 2019년을 닫는 12월과 2020년을 여는 1월에 차례로 만난 두 책은 나에게 '내 몸을 쓰고 싶다'라는 열망을 강하게 불러일으켰고, 2월에 생일 선물로 뭘 줄까 묻는 이들에게 예산에 맞춰 운동 용품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난 수영강습용 5부 수영복, 자유수영할 때 입을 예쁜 수영복, 갤럭시 워치, 요가복 세트(이건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를 구비했다. 2월엔 실제로 새벽 수영반에 등록했고 월수금 빠지지도 않고 5시 40분이면 벌떡 일어나 수영장으로 직행하여 씩씩하게 준비 체조를 하고 물에 풍덩 빠졌다. 그렇게 삶을 구축하던 일상이 코로나19로 스포츠센터가 휴관하며 무너졌지만, 다시 개관만 하면 잽싸게 입금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요즘 하정우 배우에 대한 안 좋은 기사가 올라오고 있음에도 내가 『걷는 사람, 하정우』 를 각별히 좋아했다는 걸 숨기기가 어렵다. 일단 '걷는 거 좀 좋아하나보지' 다리 꼬고 평가자의 자세로 읽기 시작하다가 어느새 정자세를 갖추게 되는 책이다. 대학 후배라는 김준규 배우는 하루 16만 보 기록의 보유자다. 신사동에서 저녁 7시에 막걸리 한 잔 하기로 하면 경기도 광명에서 아침 10시에 출발하여 걸어온다. 전라도 광주에서 촬영이 있으면 3일 전에 대전까지 차를 타고 이동한 후 3박 4일 동안 걸어서 촬영장으로 이동한다. 하정우 배우도 만만치 않다. 한창 영화 <터널> 촬영으로 살을 뺄 때에는 심지어 강남부터 인천 공항까지 8시간에 걸쳐 걸어간다. 이런 영웅담을 듣고 있자니 내가 목표로 하는 하루 만 보쯤은 귀여워 보인다. 고작 우리 아파트 크게 두 바퀴 도는 건데 뭐!라는 마음으로 선뜻 엘리베이터를 타고 운동화 끈을 묶게 된다.



특히 운동이 루틴이 되는 삶의 양식이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아, 모르겠다, 일단 걷고 돌아와서 마저 고민하자'라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간다. 걸으면서 여전히 고민을 고민하지만 슬슬 배가 고파온다. 집에 돌아가면 뭘 먹을지, 마트에 들러서 장을 볼지 말지, 맥주를 마실지 말지로 고민이 바뀌어버린다. 집에 돌아와서 상을 차리면 이미 침이 고인다. '나 방금 전까지 고뇌했던 사람이 맞나? 왜 이렇게 밥맛이 좋지?' 깜짝 놀라게 된다. 밥을 먹은 뒤엔 샤워를 한다. 이제 계속해서 고민을 이어가려고 하지만 고민하기엔 너무 상쾌하다. 잠도 온다. 이 일련의 과정을 상상하자니 나까지 다 상쾌해져버린다.



그렇다면 꾸준히 걸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뭐든 꾸준히 하려면 그것이 '특별활동'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한다며 하루에 3만 보를 걷는 하정우가 전수하는 팁은 다음과 같다.



- 생보: 생활 속 걷기(친구와 걸으며 이야기하기, 계단 이용하기)

- 제뛰: 제자리 뛰기("도대체 누가 텔레비전을 앉아서 봐?")

- 돌려깎기: 목표점을 향해 직행하지 않고 더 먼 거리로 돌아가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걷기 친구'다. 하정우는 친구들과 걷기 모임을 꾸리고 핏빗으로 연결하고 국토대장정 다큐멘터리 <577프로젝트>를 함께 촬영하였으며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고 대화하는 수요 독서클럽으로까지 확장한다. 한동안 나는 이러한 '걷기 친구'를 만들고 싶어 눈을 반짝였다. 일단 H, S와 걷기 친구를 맺었지만 둘 다 집순이 집돌이라 걸음수가 형편없었고 금방 시무룩해졌다(물론 나와 걸음수가 막상막하긴 했다). 최근엔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된 신규 중국어 선생님과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왼손 팔목의 갤럭시 워치를 발견하곤 "저랑 걷기 친구하실래요?"라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여전히 말할 타이밍을 물색하고 있다). 주변에 공원이나 걷기 좋은 장소는 '몇 보짜리인지' 공유할 친구는 아직도 모집 중이다.

책의 뒤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 『걷는 사람, 하정우』 中



앞으로 지낼 2020년이 더 기대되게 만드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