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학교 - 마광수 소설집
마광수 지음 / 북리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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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414 무한한 관능적 상상력의 만화경 [2011-04-20] 회원평점 | 추천 0




마광수 소설집 <사랑의 학교>(북리뷰 刊) 독후감

허성찬


<사랑의 학교>는 성적 판타지를 마광수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언어로 풀어 쓴 에로티시즘 소설집이다. 그는 이 책 첫머리부터 문학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문학이 예술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길은 탐미적이고 일탈적인 강렬함을 구사하는데 있다. 문학이 도덕 교과서나 교양서적, 또는 역사, 사회, 인문학 등의 해설서가 되지 않으려면 윤리와 종교 특히 정치적 주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바로 이 첫머리에서 우리는 마광수가 수많은 비난과 사법적인 문제를 감수하면서도 오랫동안 꿋꿋하게 써온 그의 글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예술만이 진정한 예술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온갖 비유와 숨어있는 교훈, 어렵고 현학적인 언어로 쓰여진 소설만이 예술인 것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소설을 읽고 나서 뭔가를 얻었다는 느낌이 들어야만 그 소설이 문학인 것이 아니다” 즉, 우리는 전혀 지적인 허영으로 가득 찬 현학주의, 교양주의 억지소설에서 교훈 따위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작가는 마음껏 상상하고 독자는 작가의 상상적 현실을 마음껏 부풀려 공상함으로써 억눌리고 응어리진 욕망들을 대리 배설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말이다.

마광수는 예술가란 증오와 분노로 쌓인 사회에서 대리자로 배설 욕망을 풀어 주어 사회를 정화시키는 자이며, 물론 이런 배설작용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권위적 잣대와 사회 통념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문학시간부터 소설 밑에다가 줄치고 작가의 숨은 의도와 교훈을 찾는 데 익숙해진 나에게는 문학관의 변화와 함께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또한 <작가의 말>에서 문학작품을 가지고 현실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책 후반부에서 그의 수필인지 소설인지 당최 구분이 가지 않는 중편소설 <사랑의 학교>에서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사랑의 학교>에는 마치 수필인 듯 그의 홍익대학교 재직, 즐거운 사라사건 등의 과거들이 그대로 배경으로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홍익대학교의 학시절 이야기, 즉 사제지간에 거침없는 섹스를 즐기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여 읽는 나로 하여금 혼동을 주었다. 하지만 얼마 후 이것은 작가가 마치 실제로 겪은 일인 듯 보다 더 리얼하게, 마음껏 상상하기 위함과 동시에 독자들에게 더 리얼리티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하기 위한 그만의 장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소설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은 허구다’이다. 마치 그저 매일매일이 똑같은 권태로운 일상을 담담하게 읊조린 리얼리즘 문학만이 문학이라고 말하는 문화적 후진국 대한민국에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 상상이 현실인 것처럼 허용되는 소설 속에서나마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할 텐데, 소설마저도 그저 내가 사는 현실을 신문기사처럼 가져다 박은 글이라면 나에게는 그다지 읽을 가치가 없다고 본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각종 전란을 겪은 우리 조상들이 <박씨전>, <임진록> 등 허구와 상상의 문학으로나마 외적들을 통쾌하게 물리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듯이, 우리도 소설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그리고 통용될 수 없는 발칙한 상상들을 마음껏 풀어놓는 도구로써 이용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 학교>에는 문학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이 여지없이 담겨 있다. <사랑의 학교>에 담겨진 단편소설 중 하나인 <상상은 무죄>에서는 작가의 개인적 손톱 페티쉬즘을 만족시키는 왠 야한 여자가 연구실로 들어와서 당신이 바로 그 야하기로 소문난 마광수냐며 난데없이 진한 섹스를 하자고 청한다. 정말 개연성 없고 어이없는 스토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제까지 그토록 이야기하던 작가의 상상을 그대로 풀어놓은 작품인 것이다. 이상형의 여자가 갑자기 들어와서 섹스를 하자고 하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만한 상상을 그는 소설로 풀어놓아 현실화시킴으로써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여왕의 식사와 섹스>와 <왕'>에서는 좀 더 발칙한 상상이 나온다. 여왕과 왕은 노예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태워서 인육을 먹기까지 하면서 노예집단을 이용하여 심하게 사디스틱한 섹스를 즐긴다. 또한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쾌락의 소리로 대입하여, 노예와 여왕 또는 왕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뒤섞어 표현한다. 특히 <여왕의 식사와 섹스>에서는 여왕의 성적 쾌락을 위해 동원됐던 미소년 노예들은 여왕의 몸을 범한 죄로 모두 잔인하게 참수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치를 떨면서도, 여왕의 고혹적이고도 요요한 매력에 현혹되어 저절로 발기돼 있는 자신들의 페니스를 꼿꼿이 곧추세우고 있다. 이 또한 마광수가 이야기하는 공포와 성욕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생물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자신의 씨를 남기고서 죽고자 하는 욕망, 즉 성욕이 죽음의 공포와 함께하는 것을 극도로 사디즘적인 내용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가학적인 묘사는 절대로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때때로 한 번씩 상상해 볼법한 이야기들을 문학적 장치를 통해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떻게 보면 민망함을 넘어 반사회적으로까지 보이는 내용을 읽으면서, 진짜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여왕의 식사와 섹스>, <왕>은 현실에서는 절대 통용될 수 없는 상상으로 쓰여진 이야기이며, 바로 소설이라는 허구의 예술적 장치가 아니면 접할 수 없는 상상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의 글의 특징은, 온갖 어려운 말을 복잡한 문장으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쓰는 것이 수준 있는 소설이라는 교양주의를 타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의 글은 단순하다 못해 유치해보이고, 원색적이고 1 차적인 언어로 쓰여 있으면서도, 마치 동영상을 재생하듯 리얼하게 표현할 것은 모두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언어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더 이상 소설을 해석하려고 골머리를 싸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상상과 자유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자칭 교양인들이 형성해놓은 문학세계의 금기를 해체하는 데 일조한다.

그는 권력의 섹스에 대한 통제는 바로 정신에 대한 통제며, 국민들을 수동적인 기계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사랑의 학교'> 또한 여과 없는 상상을 통해 작가가 창조하는 세계를 표방하고 있으며, 이는 권력이나 외부카르텔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지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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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소설집 <사랑의 학교>(북리뷰 刊) 독후감

허성찬


<사랑의 학교>는 성적 판타지를 마광수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언어로 풀어 쓴 에로티시즘 소설집이다. 그는 이 책 첫머리부터 문학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문학이 예술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길은 탐미적이고 일탈적인 강렬함을 구사하는데 있다. 문학이 도덕 교과서나 교양서적, 또는 역사, 사회, 인문학 등의 해설서가 되지 않으려면 윤리와 종교 특히 정치적 주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바로 이 첫머리에서 우리는 마광수가 수많은 비난과 사법적인 문제를 감수하면서도 오랫동안 꿋꿋하게 써온 그의 글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예술만이 진정한 예술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온갖 비유와 숨어있는 교훈, 어렵고 현학적인 언어로 쓰여진 소설만이 예술인 것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소설을 읽고 나서 뭔가를 얻었다는 느낌이 들어야만 그 소설이 문학인 것이 아니다” 즉, 우리는 전혀 지적인 허영으로 가득 찬 현학주의, 교양주의 억지소설에서 교훈 따위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작가는 마음껏 상상하고 독자는 작가의 상상적 현실을 마음껏 부풀려 공상함으로써 억눌리고 응어리진 욕망들을 대리 배설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말이다.

마광수는 예술가란 증오와 분노로 쌓인 사회에서 대리자로 배설 욕망을 풀어 주어 사회를 정화시키는 자이며, 물론 이런 배설작용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권위적 잣대와 사회 통념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문학시간부터 소설 밑에다가 줄치고 작가의 숨은 의도와 교훈을 찾는 데 익숙해진 나에게는 문학관의 변화와 함께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또한 <작가의 말>에서 문학작품을 가지고 현실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책 후반부에서 그의 수필인지 소설인지 당최 구분이 가지 않는 중편소설 <사랑의 학교>에서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사랑의 학교>에는 마치 수필인 듯 그의 홍익대학교 재직, 즐거운 사라사건 등의 과거들이 그대로 배경으로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홍익대학교의 학시절 이야기, 즉 사제지간에 거침없는 섹스를 즐기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여 읽는 나로 하여금 혼동을 주었다. 하지만 얼마 후 이것은 작가가 마치 실제로 겪은 일인 듯 보다 더 리얼하게, 마음껏 상상하기 위함과 동시에 독자들에게 더 리얼리티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하기 위한 그만의 장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소설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은 허구다’이다. 마치 그저 매일매일이 똑같은 권태로운 일상을 담담하게 읊조린 리얼리즘 문학만이 문학이라고 말하는 문화적 후진국 대한민국에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 상상이 현실인 것처럼 허용되는 소설 속에서나마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할 텐데, 소설마저도 그저 내가 사는 현실을 신문기사처럼 가져다 박은 글이라면 나에게는 그다지 읽을 가치가 없다고 본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각종 전란을 겪은 우리 조상들이 <박씨전>, <임진록> 등 허구와 상상의 문학으로나마 외적들을 통쾌하게 물리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듯이, 우리도 소설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그리고 통용될 수 없는 발칙한 상상들을 마음껏 풀어놓는 도구로써 이용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 학교>에는 문학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이 여지없이 담겨 있다. <사랑의 학교>에 담겨진 단편소설 중 하나인 <상상은 무죄>에서는 작가의 개인적 손톱 페티쉬즘을 만족시키는 왠 야한 여자가 연구실로 들어와서 당신이 바로 그 야하기로 소문난 마광수냐며 난데없이 진한 섹스를 하자고 청한다. 정말 개연성 없고 어이없는 스토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제까지 그토록 이야기하던 작가의 상상을 그대로 풀어놓은 작품인 것이다. 이상형의 여자가 갑자기 들어와서 섹스를 하자고 하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만한 상상을 그는 소설로 풀어놓아 현실화시킴으로써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여왕의 식사와 섹스>와 <왕'>에서는 좀 더 발칙한 상상이 나온다. 여왕과 왕은 노예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태워서 인육을 먹기까지 하면서 노예집단을 이용하여 심하게 사디스틱한 섹스를 즐긴다. 또한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쾌락의 소리로 대입하여, 노예와 여왕 또는 왕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뒤섞어 표현한다. 특히 <여왕의 식사와 섹스>에서는 여왕의 성적 쾌락을 위해 동원됐던 미소년 노예들은 여왕의 몸을 범한 죄로 모두 잔인하게 참수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치를 떨면서도, 여왕의 고혹적이고도 요요한 매력에 현혹되어 저절로 발기돼 있는 자신들의 페니스를 꼿꼿이 곧추세우고 있다. 이 또한 마광수가 이야기하는 공포와 성욕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생물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자신의 씨를 남기고서 죽고자 하는 욕망, 즉 성욕이 죽음의 공포와 함께하는 것을 극도로 사디즘적인 내용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가학적인 묘사는 절대로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때때로 한 번씩 상상해 볼법한 이야기들을 문학적 장치를 통해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떻게 보면 민망함을 넘어 반사회적으로까지 보이는 내용을 읽으면서, 진짜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여왕의 식사와 섹스>, <왕>은 현실에서는 절대 통용될 수 없는 상상으로 쓰여진 이야기이며, 바로 소설이라는 허구의 예술적 장치가 아니면 접할 수 없는 상상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의 글의 특징은, 온갖 어려운 말을 복잡한 문장으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쓰는 것이 수준 있는 소설이라는 교양주의를 타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의 글은 단순하다 못해 유치해보이고, 원색적이고 1 차적인 언어로 쓰여 있으면서도, 마치 동영상을 재생하듯 리얼하게 표현할 것은 모두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언어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더 이상 소설을 해석하려고 골머리를 싸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상상과 자유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자칭 교양인들이 형성해놓은 문학세계의 금기를 해체하는 데 일조한다.

그는 권력의 섹스에 대한 통제는 바로 정신에 대한 통제며, 국민들을 수동적인 기계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사랑의 학교'> 또한 여과 없는 상상을 통해 작가가 창조하는 세계를 표방하고 있으며, 이는 권력이나 외부카르텔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지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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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
마광수 지음 / 책마루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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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권태롭다, 라고 말하면 또 누군가 복에 겨운 소리를 한다고 하겠지요.
고통스럽게 하루하루 떼꺼리를 이어가며 사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치만 내 작은 인생에 고통과 권태의 구간반복을 생각하면 고통도 지극히 고통스럽고
권태감도 지극히 사람을 힘들게 하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살면서 언제든 꼭 만나기 마련인 '권태감'에 대해서, 특히 사랑마저, 섹
스마저 권태롭다면 우린 어디서 힘을 얻고 살아야 하는지 늘 궁금했지요.
권태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변태'라는 차원이 나옵니다. 변태는 창조를 도출시키니 권태스러
움을 제거할 수 있겠지요. 그 변태를 아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 합니다. 천재들
은 늘 꼭 같은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 무리라고 하였습니다. 창조를 하고 생을 만들어감에 있
어서 변태는 굳이 성적 변태가 아니더래도 필요하겠지요.

한 사회 구조가 늘 쉼 없이 사유하고 변덕 부리는 우리 뇌를 묶어 답답한 단혼제(monogamy)
속에 다 끼워 놓습니다. 거기서 만족이 안 되면 마치 이단아처럼 쳐다보는 이러한 답답한 규
율속에서 이 주인공들은 그래도 꿈을 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뼈대가 있는 줄거리는 없었습니다. 작가가 그 플롯 자체가 없는 이 하룻밤 이야기를 긴 긴
장편소설로 택함은 결국 성에 관해 무엇보다 묘사하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그 하고자 하는
말이 어떤 장치보다 더 선험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소재, 하나 하나 특이한 방식으로 성적인 매개물이 되어 등장합니다. 일체의 성외의 것은 나
오지 않습니다. 꽤 장중한 소설인데 통일성도 획득이 됩니다. 거기에 약간 억눌린 기존의 질
서를 파괴해야 진정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설도 간헐적으로 나옵니다. 문장은 참으로 귀
족적이고 향기롭습니다. 아마 글을 쓰거나 글 읽길 좋아하는 사람은 나도 이런 소설 한 권
쯤 쓰고 싶다, 라는 충동질과 질투가 나오게 되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마지막 '철썩 철썩 아아아악" 이 부제 편에서는 아주 통쾌한 권태 극복이 나옵니다.
"너, 맞고 싶냐..." 정말 내가 맞고 싶은지 때리고 싶은지는 모르오나 철저한 대리배설을
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문학이란 것은 참 알 수 없는 매력이 있지요.
마지막 부분에서 희수와 미니와 헤어지는 장면에서 짤막하게 인사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전 거기서 왜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이별 장면은 없던 것 같습니다. 지금쯤
희수와 미니는 어딘가를 가고 있겠지... 하고 읊조리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인 창틈 사이에 낀 하루살이, 오늘이 월요일이 아닌 일요일이라
는 사실, 죽지 않던 나방의 날개짓, 신경질나게 죽이고 싶었지만 그저 살의로만 마무리를 해
놓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인생이라는 틀 속에 적당히 얼기설기 드러나는 슬픈 스케치 같았습니다.
작가의 노력은 용솟음치고 격정적인 그 본능을 현실에서 그나마 조화롭게 그림이 되어가게
그 마지막까지 노력을 해주셨던 것 같았습니다.

'처녀작'이란 이름이 왜 그 처음의 작품에 붙나 생각해보건대, 훔쳐보는 독자 편에서
가장 즐거움이 크더군요. 이 말 역시 이 책을 덮으며 스스로 정의 내려봅니다. 또한 그
젊디젊은 남자로써 황금기의 그 시절에 한 청년이 흘렸던 눈물을 잠시 보고 나온답니다.

늘 좋은 작품 더 더더더더 기대합니다.

참고 : 관능적 상상력이 어정쩡한 분들은 이 감동의 물결 속에 못 들어 옵니다.
그러니 포기하시려면 그러시든가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어 속담은요, Regination is
the first lesson in life(체념은 인생에서 제 1의 수업이다.) 출전이 어딘지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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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사라
마광수 지음 / 아트블루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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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광수 장편소설 <돌아온 사라>를 읽고

초반엔 저자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작가의 환상이 현실의 벽에 막히는 일 없이
쭉쭉 진행되는 것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우러나와 미
소짓게 된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상쾌함이었다. 이런 명랑하고 발랄한 쾌감이란!
꼼꼼히 시멘트 발린 공간에 갇힌 듯 한 내 영혼, 내 허무주의에 빠진 영혼에 아주 싱싱
하도록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중간에 사라가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부분에서는 너무 '정액 냄새'가 풍겨서 살짝 역겨
웠다. 그러나 여성 독자들은 좀 다르게 생각할 것 같다. 여성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나중에 사라가 마교수의 '개'가 되어 무아지경에 빠지는 부분에 가서는 가슴 속이 시원
해졌다. 이런걸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에 이어 나는 여자
가 절정에 이른 모습에 흥분하는 마음을 가진 것 같다고 느꼈다. 써놓고 보니 굉장히
바람직하고 착한 성적 취향인 것 같다. (누구나 그런 건 아닐까?)

전체적으로 재미있었다. 가볍고 술술 읽히는 것이 소설책이 아니라 만화책을 보는 느낌
이었다. (실제로 책장에 만화책 옆에 꽂아두었다.) 그러나 야한 얘기가 계속 이어지다
보니 마치 사정한 후에 포르노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약간 메스꺼운 느낌이 있
었다.

후반으로 갈 수록 감각기관들이 예민하게 살아나는 체험을 했다. 소설을 읽고나자 지나
가는 여성들이 모두 제 매력을 갖춘 아름다운 이들로 보이는 것은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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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사라
마광수 지음 / 아트블루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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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장편소설 <돌아온 사라>를 읽고

초반엔 저자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작가의 환상이 현실의 벽에 막히는 일 없이
쭉쭉 진행되는 것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우러나와 미
소짓게 된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상쾌함이었다. 이런 명랑하고 발랄한 쾌감이란!
꼼꼼히 시멘트 발린 공간에 갇힌 듯 한 내 영혼, 내 허무주의에 빠진 영혼에 아주 싱싱
하도록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중간에 사라가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부분에서는 너무 '정액 냄새'가 풍겨서 살짝 역겨
웠다. 그러나 여성 독자들은 좀 다르게 생각할 것 같다. 여성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나중에 사라가 마교수의 '개'가 되어 무아지경에 빠지는 부분에 가서는 가슴 속이 시원
해졌다. 이런걸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에 이어 나는 여자
가 절정에 이른 모습에 흥분하는 마음을 가진 것 같다고 느꼈다. 써놓고 보니 굉장히
바람직하고 착한 성적 취향인 것 같다. (누구나 그런 건 아닐까?)

전체적으로 재미있었다. 가볍고 술술 읽히는 것이 소설책이 아니라 만화책을 보는 느낌
이었다. (실제로 책장에 만화책 옆에 꽂아두었다.) 그러나 야한 얘기가 계속 이어지다
보니 마치 사정한 후에 포르노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약간 메스꺼운 느낌이 있
었다.

후반으로 갈 수록 감각기관들이 예민하게 살아나는 체험을 했다. 소설을 읽고나자 지나
가는 여성들이 모두 제 매력을 갖춘 아름다운 이들로 보이는 것은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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