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주 -  내츄럴 캔디




 직속상관인 도안사는 깡마르고 깐깐해 보였다. 그는 친절한 시선과 함께 위압적인 말투로 악수를 청해왔다.

 “아마도 나하고 가장 많이 싸워야 할 겁니다.”

 나는 웃으며 두 손으로 악수에 응했다. 첫인사에서 으레 고의적인 텃세를 부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다소 소심한 척했다. 사실 그의 위압적인 태도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서는 야릇한 호기심이 꿈틀거렸다.

 “우리 차나 한잔 합시다.”

  도안사가 앞장을 섰다. 사무실에서 해도 될 말을 굳이 다방에서 하려는 의중이 의심스러워,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가 다방에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아가씨와 레지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아가씨들과 매우 친한 듯 인사를 받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나는 도안사가 열심히 설명하는 거래처 내역을 들으며, 필요 이상의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작 다섯 명 남짓 되는 직원들 중에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가를 구분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러웠다. 도안사는 바짝 긴장하게 만들려 애썼지만, 나는 그저 그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침내 맥이 빠진 도안사는 나를 흘겨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시작된 새 직장에서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일주일을 보냈다. 인쇄일이 여름엔 워낙 한산한 탓이었다. 지나치게 일이 없다는 게 흠이었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그럭저럭 근무하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낮에는 도안사가 지시하는 일에 열중했고, 밤에는 사진식자 기술을  습득하는 야간 견습오퍼레이터에게 쓸데없는 참견까지 하며 세월을 보냈다.

 열흘째가 되어서 태평양기획에서 보름을 일한 대가로 한 달 월급을 받았다. 조금은 사무적이고 개인적인 회사였지만 외국 스타일의 월급 지급 방식은 한 푼이 아쉬운 나에겐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때마침 나는 직원들 사이에서 신고식을 종용받고 있던 터라 부담 없이 저녁 술자리를 마련했다. 술자리라야 일이 끝난 저녁, 사무실로 중국요리를 주문해 나눠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쪼잔하다는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첫 출근 시 대강 넘어갔던 통성명이 제대로 시작되었다. 내가 나이를  밝히자 그들은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나에게 속았다며 즐거워했다. 분위기는 술잔이 돌수록 무르익어갔다.

  중국집에서 배달된 독한 고량주에 얼마 되지 않아 술기운이 거나하게 돌았다. 이윽고 도안사의 거드름이 주정으로 바뀌어 이어졌다. 경리는 떠들썩해진 틈을 타 데이트니 뭐니 핑계를 대며 퇴근을 했다. 견습오퍼레이터는 과자 한 줌을 챙겨 들고 식자실로 슬쩍 숨어버렸다. 그녀들의 행동으로 보아 그동안 도안사의 술버릇으로 여러 번 고생했던 듯했다.

  도안사는 이내 2차를 내라며 나를 압박했다. 분위기상 어쩔 수 없이 2차를 내야할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도안사의 요구는 물론 도안사와 다름없이 끼어들며 나서는 제판실 직원을 뿌리치지 못하고 2차에 나섰다.

  그들은 골목 허름한 술집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우두커니 앉아있던 아가씨들이 반색을 하며 달려들었다. 도안사는 마치 유명인사라도 되는 듯 손을 흔들고 너스레를 떨며 그녀들의 인사를 받았다. 도안사의 거만하고 요란한 인사에 아가씨들은 이미 길들어져 있는 듯 보였다.

 “어, 잘들 있었어? 오랜만이야!”

 한 아가씨가 도안사의 팔짱을 끼며 온갖 애교를 부렸다. 그녀는 도안사에게 몸을 밀착시키고는 나를 힐끗 훔쳐보았다. 낯선 얼굴의 등장에 먹잇감을  찾았다는 듯 음흉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건너편에 앉은 사람도 식별하기 힘든 어두운 조명에 퀴퀴한 습기 냄새까지 느껴지는 지하실은 나를 더욱 숨 막히게 만들었다. 낯선 분위기에 소름이 돋고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경직된 몸은 경계심을 잔뜩 일으켜 세웠다.

  마담은 시키지도 않은 안주와 술을 자동으로 가져왔고 아가씨 세 명에게 술시중을 들게 했다. 짝을 맞추어 등장한 아가씨들은 각자의 성 앞에 '미스’를 붙여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미니스커트에 가슴의 계곡이 훤히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도안사가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이며 아가씨들이 앉을 자리를 정해 주었다. 내 옆에는 미스 손이라고 소개했던 아가씨가 앉았다. 낯선 여자와 이렇게 가까이 앉기는 처음이라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움츠린 몸에 소름까지 돋아났다.

  짙게 화장했지만 미스 손은 앳된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미스 손이 나에게 착 달라붙었지만 나는 어쩔 줄 몰라서 허둥대었다. 그런 나의 당황하는 행동을 본 미스 손은 도안사를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민망해 하는 그녀의 표정을 알아챈 도안사는 귀한 손님이니 잘 모시라며 오히려 미스 손을 독려했다. 그가 나를 두고 '귀한 손님’이라 하는 것은 오늘 술값을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귀한 손님이라는 말이 영 못마땅하게 들렸다.

  미스 손이 도안사의 채근에 더욱더 내 곁으로 바짝 달려들었다. 순간 나는 당황하여 엉덩이를 밀며 옆으로 도망쳤다. 초짜인 나를 금방 알아차린 미스 손은 결국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아서 새침한 얼굴로 술을 따라주었다.

  전주가 있었던 탓일까? 술 몇 잔에 모두 쉽게 취해버렸다. 도안사와 아가씨들은 별 의미 없는 농지거리를 해대며 마냥 즐거워했다. 청계천 여왕봉에 있는 6번 여자가 어떠니, 경리처럼 엉덩이가 처진 여자는 어떠니, 하며 일상 대화를 하듯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음담패설은 평소에 나누는 이야기보다 자연스러웠고 열정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힐끗힐끗 내 표정을 훔쳐보며 재미있다는 눈짓을 보였다.

 도안사는 간간히 자기 옆에 앉은 파트너의 젖가슴은 물론 엉덩이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의 파트너는 흘깃 내 눈치를 살피고는 간지럽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게다가 순간순간 입술을 마주대고 수도 없이 키스를 했다. 도안사는 자기처럼 한번 해보라는 시늉으로 아래턱을 간헐적으로 내게 치밀며 채근했다. 그동안 자연스러웠던 일들을 나 때문에 제대로 하지 못하겠다는 불만의 표시였다. 그것은 그들과 함께 공범이 되어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다.

  정말 엉뚱한 봉변이었다. 나라고 여자에게 호기심이 없을까! 휘문인쇄소 다락에서 비키니 차림의 여자들 사진을 보며 낯선 여자와의 하룻밤을 상상한 적이 없었을까?

  그러나 언제부턴가 남자든 여자든 몸가짐에 주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할 여자에게 떳떳한 남자로 인정받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만약 유정숙이나 은애와 결혼한다면……. 그녀들에게 떳떳하고 싶었다. 이는 어머니의 행방불명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내 술이 떡이 된 도안사와 직원은 한 번 해야 한다며 아가씨들에게 끌려 나갔다. 내 옆에 앉았던 미스 손은 나의 결정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마음속 욕망을 피나도록 문지르며 털끝만큼의 흥분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몹시 갈등했지만 마침내 이성이 감성을 물리쳤다.

  나는 홀로 밤거리에 우뚝 섰다. 탈선의 유혹을 이겨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보 같은 행동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다독거려야 했다. 처참할 정도의 불쾌감이 울컥 치솟았다. 얼마 안 되는 월급을 통째로 털린 것도 더러웠지만, 모자라는 술값에 외상까지 달아주던 마담에겐 매스꺼움까지 느껴졌다. 매스꺼움의 대가치고는 너무나 컸다.

  빌어먹을, 갈증이 복받쳤다. 숨을 훅훅 내뿜어 보았으나 역한 술 냄새가 곤두박질치며  허공으로 사라지는 듯하더니 이내 코털을 잡고 늘어졌다. 나는 갑자기 소피가 마려웠다. 근처 화장실을 찾았다. 손가락 사이로 아랫도리를 잡고 생리적인 팽창을 배설하면서 거울에 비친 얼굴과 싸웠다. 푸석푸석한 얼굴에 조소 어린 눈동자가 나를 비웃고 있었다. 나를 비웃는 거울 속의 나는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바보 같으니! 그게 무슨 대수라고!’

  거울에 비친 내가 또 다른 나를 희롱했다. 나의 내면을 때리는 치열한 싸움은 소변이 끝날 때까지도 좀처럼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설을 끝내고 뒤로 돌아서자 이번에는 뒤가 팽창된 느낌이 치밀었다. 소변을 보는 동안 마치 요충이 기어 나오는 듯 느껴지는 간지러움 때문에 꽁무니에 힘을 주어 소가 실 오줌 싸듯이 오줌 줄을 끊어서 소변을 보았던 것이다.

  나는 다시 칸막이 변소로 들어가 엉덩이를 내리고 웅크리고 앉았다. 때 묻은 석회질이 벅벅 벗겨진 제법 그럴듯한 음화(淫畵)를 보니 어느새 아랫도리에 힘이 쏠렸다.

 “선생니임…….” 

 “으음, 앞이야 뒤야?”

  선생님이 꽁무니를 움켜쥐고 엉거주춤 일어서 있는 나에게 묻자 아이들은 와아, 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홍당무가 되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를 본 선생님이 말했다.

 “빨리 갔다가 와.”

  나는 부리나케 변소로 달려가 오줌을 눴다. 그때도 소변을 본 다음 대변을 보았고, 대변을 보면서 눈앞에 그려진 낙서를 한참 동안 정독했었다.

  사방에 어지럽게 그려진 온갖 낙서들이 낄낄대고 있었다.

 - 나는 어느 날 친구 여동생과 무엇을 했다.

- 앞을 봐라. 옆을 봐라. 뒤를 봐라. 인마 보긴 뭘 봐.

- 신사는 장미를 꺾지 마라. 꺾어진 장미는 뒤를 돌아다보지 마라.

- 세월은 구보로 청춘은 동작 그만!

  키득거리며 낙서들을 보다가 문득 도안사를 떠올렸다. 도안사의 다음 행동을 떠올리자니 아랫도리는 움찔움찔 힘이 실렸다. 마침내 충열된 독립군은 단단한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하늘을 향했다. 나는 녀석을 부여잡고 상상의 애정행각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직접적인 탈선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지도 모른다. 상상의 애정행각은 도안사처럼 낯선 작부에게 아무렇게나 손쉽게 던지는 행동보다는 차라리 명분 있는 행동일 터였다. 나는 한참 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화장실을 나왔다.

 

 

 아침이 되자 어젯밤 함께 어울렸던 직원들이 출근했다. 그들이 나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자신들의 외도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술로 인한 실수 때문이었다는 듯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책상을 닦으며 아침청소를 하던 경리가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머, 두 분이 출근하다가 만난 모양이죠?”

  둘은 경리의 물음에 아무런 말도 없이 내 눈치만 살폈다. 그들의 눈빛은 입조심 하라는 무언의 암시를 보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도안사의 어떤 말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엿듣게 된 뒤로 그런 마음은 더욱 굳어졌다.

 “야, 어째 이상하다. 파이프가 새는 모양이야.”

  나는 그들이 내뱉은 파이프란 말뜻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파이프는 그들만의 은어로 남성의 심벌을 가리키는 것이고, 파이프가 샌다는 것은 성병에 걸렸다는 말이었다. 그 말뜻을 이해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그래도 남의 일은 쉽게 잊고 무의미해지는 것이었다. 또한 사람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워지게 마련인 것 같았다. 도안사를 비롯한 직원들의 그날 밤 일은 시간이 흐르자, 별 의미 없는 일로 잊혀졌다. 아무 일 없는 일상이 계속되었고, 애꿎은 나만 외상값을 갚느라 여섯 달의 시간을 보냈다.

 토요일이었다.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날보다 다소 늦게 출근한 도안사가 잠바도 벗지 않은 채 일을 지시했다.

 “요즘 한창 선전하는 핵산조미료‘아이미’라는 게 있지. 그 타이틀을 가지고 한번 레터링 해봐. 아이미 선전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지. 가정주부 둘 얘긴데,‘요즘 많이 선전하는 아이미란 게 뭐예요? 물으니까 ‘그거 미원 있죠. 그 회사에서 나온 조미료인가 봐요!’하더라는 거야. 사실 아이미는 경쟁회사인 미풍 회사에서 만든 신제품이거든. 이게 바로 광고의 전달이 잘못된 예지.”

  나는 별 싱거운 일도 다 시키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뾰족하게 중요한 업무도 없고 하여 타이틀에 어울릴 만한 글씨체를 착안하여 한나절 만에 레터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도안사에게 보이자 그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나는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노수 씨, 사장님이 요 앞 다방으로 좀 나오시래요.”

 사장의 전화를 받은 경리가 나에게 전했다. 무슨 일이냐고 경리에게 되물었지만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사장이 나를 따로 보자고 한 건, 그것도 사무실이 아닌 곳으로 불러내는 건 입사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방으로 들어서자 도안사와 사장, 그리고 평소 안면이 있는 거래처 사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어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도안사 옆에 엉거주춤 걸터앉았다. 레지가 다가오자 사장은 나에게 묻지도 않고 쌍화차를 시켜주었다.

 도안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나오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구, 여기 이 형님이 미스터 강이 맘에 든다고, 달라고 하네.”

  도안사는 거래처 사장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도안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까 글씨를 써 보라고 했던 거야. 형님이 오케이 했으니까 미스터 강이 어떻게 생각하나 듣고 싶어서 불렀어. 우리끼리는 이미 다 끝난 얘기지만 그래도 당사자가 승낙해야 하지 않겠어.”

 도안사의 억양에서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도안사는 늘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쩌면 지금 벌어진 일은 나를 몰아내려는 작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거래처 사장의 회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저 지금 사무실에서 5분 거리에 있으며 흑백 제판시설을 구비하고 있는 소규모의 개인사무실이라는 것, 사장들끼리 학교 동창이고 사진식자를 의뢰하는 거래처의 하나라는 것 정도. 이것이 내가 그 회사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어찌되었든 나에게는 조금의 언질도 없었던 일이다. 그들끼리 일방적으로 물건 거래하듯 하고는 이제 와서 나에게 결정을 내리라고 하는 그들이 이해되지 않았고, 어이도 없었다. 결코 쉽게 결정내릴 문제가 아니어서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실은 일감이 없네. 처음 미스터 강을 쓸 때는 그래도 좋았는데 이 상태가 장기화될 것 같아.”

 사장이 비로소 솔직한 문제를 털어놓았다. 나는 더 이상의 고집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힘없이 물었다.

 “그럼, 언제부터 출근하면 됩니까?”

 “그거야 빠를수록 좋지. 내일 당장이라도 괜찮아!”

  거래처 사장, 이제 곧 내가 다닐 회사의 사장은 반색하며 말을 되받았다.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는 매듭지어졌다. 그들은 굳이 나의 확실한 대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설득하려고도, 위로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미스터 강, 그럼 형님하고 좀 더 얘기하다가 사무실 구경하고 들어 와. 우린 먼저 들어갈 테니까.”

  도안사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찻값을 지불하고는 사장과 다방을 빠져나갔다.

  새로운 사장은 사무실에 대한 이것저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직원은 나를 포함하여 고작 네 명이고 월급은 지금 받는 것보다 조금 더 인상시켜 준다는 이야기, 사무실은 칸을 막아 다른 도안 사무실과 같이 쓴다는 이야기, 대개 그런 것들이었다. 사장은 조급하게 사무실의 위치도 알려주겠다며 다방을 나왔다. 

  사장을 따라 사무실에 가 보았다. 사무실은 의상실 2층에 위치한 작고 한산해 보이는 곳이었다. 햇살이 창틈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바닥이 기울어 보였다. 그 햇살을 받으며 나른하게 생긴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어린 직원 하나가 무슨 일인가 긁적이고 있었다. 사장이 안으로 들어가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자신의 일만 하는 소년의 모습처럼 정말 한산한, 어쩌면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 사무실이었다. 사장은 사무실 한 귀퉁이에 자리한 책상을 가리키며 내 자리니 앉아보라고 했다. 나는 공연히 서랍을 열어 보고 의자도 뒤로 굴려보면서 민망함을 모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내일 곧바로 출근하겠다며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무심코 닫은 문이‘쾅’소리를 내며 닫히는 바람에 민망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려는데 목조계단이‘동동동’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지나가기에 조금은 비좁은 계단이어서 올라오는 사람이 다 올라온 뒤 내려가려고 잠시 기다렸다. 곧이어 계단 모퉁이를 돌아 올라오는 낯익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 여긴 웬일이세요?”

 여자 쪽에서 놀라며 먼저 물어왔다. 정숙희였다. 사진식자 관계로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경리 여직원과 재잘거리던, 그래서 일하던 중에 가끔 쳐다보게 만들던, 웃기도 참 잘  웃던 정숙희였다.

 “예, 내일부터 여기서 근무하기로 했거든요.”

 “어머, 그래요! 나도 여기 근무해요. 바로 옆 사무실! 이제 매일 보겠네요. 하긴 그동안에도 매일 봐왔지만……. 후훗!”

  그녀는 콧등에 잔주름까지 만들어 보이며 말괄량이 소녀처럼 웃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녀는 내가 다니던 회사의 경리와 오퍼레이터를 언니라고 부르며, 마치 같은 사무실 직원처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겸연쩍게 마주 웃어주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경리는 벌써 정숙희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잘해 보세요. 숙희 괜찮은 애예요!”

 오고갔음을 짐작케 하고도 남는 음흉한 미소였다. 언제부터인가 경리와 정숙희는 일하고 있는 나를 힐끗힐끗 훔쳐보며 키득거리곤 했었다. 그 행동은 도안사와의 회식 사건 이후로 더욱 빈번해졌었다. 그녀들은 도안사의 외도나 술자리에서 있었던 내 행동을 낱낱이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들의 음흉한 미소가 그다지 싫지는 않았었다.

 경리의 말뜻을 눈치 챈 나는 결국 싱거운 쓴웃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장과 도안사가 나를 두고 거래를 했듯이 정숙희와 경리는 나를 두고 염탐을 했다. 어찌 되었든 참으로 음흉한 일들이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초겨울이었다.

 

 

  이튿날 사무실을 옮겼다. 송별회 따위는 없는 지극히 간단한 이동이었다. 누구에게나 큰집에서 작은집으로 이사하는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환경이 바뀌어 낯설기만 한 느낌은 당사자인 나 혼자 스스로 삭혀야 하는 숙제일 뿐이었다.

  첫날부터 사장은 필요 이상으로 나에게 집착했다. 내 실력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임에도 노파심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다. 그때마다 이 정도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하지만 사장도 계속 나만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일감이 많아지는 겨울이 다가옴에 따라, 사장은 자리를 비워야 할 일이 많아졌고 처음 같은 친절은 자연스럽게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장이 부재중일 때 의뢰가 들어오면 내가 직접 설명을 듣고, 그 일을 스스로 처리하기도 했다.

 

 점점 사무실에서의 위치는 달라졌다. 그리고 달라진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정숙희에 대한 내 생각이었다. 그녀는 틈날 때마다 우리 사무실과 그녀 사무실을 가르는 공동 칸막이를 무시하고 업무 공간을 침범해 왔다. 언제나 명랑한 그녀는 내 앞에서 만큼은 조신하게 행동하려고 애쓰는 듯했다. 그녀는 어느 틈엔지 콧마루를 자극시키는 봄 향기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초겨울 햇살이 나른하게 창가를 비추던 오후였다.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그녀가 등 뒤로 와서 오래도록 나를 지켜본 것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면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마침내 하던 일을 멈추고 창피한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곱상하게 웃는 얼굴로 내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좀, 구경하면 안 돼요?”

 그녀의 양 볼이 발그레해진 것은 꼭 햇빛이 반사되어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귓바퀴까지 빨개진 그녀의 모습을 분명 보았다.

 “다음부터 사진식자 보낼 것 있으면 날 주세요. 바쁜데 바보처럼 직접 가지 말구요. 우리 것 갈 때 같이 가면 되니까요.”

  숙희는 나를‘바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바보’라는 말은 이상하게도 진짜 바보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하긴 그녀의 사무실이나 우리 사무실이나 전에 다니던 회사에 사진식자를 의뢰하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동안 사진식자를 가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5분 거리를 다니면서 골목과 계단에서 마주쳤었다. 그렇게 마주칠 때마다 서로 먼저 지나가라며 길을 비켜주곤 했었다. 

 “일하는 손이 참 예쁘세요?”

  작고 여성스럽기는 하지만 내 손을 보고 예쁘다니, 그녀의 말이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며 내 손을 달라고 했다.

 “손 좀 만져 보면 안 돼요?”

  나는 엉거주춤 망설이다가 손을 엉덩이에 쓰윽 문질러 닦은 다음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나의 손과  맞닿았을 때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쇠붙이 문고리를 잡았다가 튀어 올랐던 정전기처럼 손끝이 짜릿해졌다.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떨었다. 번개였다. 섬광이었다. 컴컴한 하늘이 일순간 환해졌다가 사라지는 번개처럼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곧 천둥소리처럼 울림이 찾아왔다. 그녀와 내 얼굴이 똑같이 홍당무가  되었다. 창가에 비친 나른한 저녁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어린아이처럼 도망치듯 사무실로 숨어버렸다.

 그날 이후 나는 부쩍 스스로도 멋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사진식자를 매번 찾아다 주고 약간의 잔심부름도 대신해 줬지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고마워서 차라도 한잔 마주하고 싶었지만, 정작 그녀가 나타나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창밖에는 어느새 겨울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평소보다 일을 일찍 끝내고 제도기를 손질하여 서랍에 정리했다. 그리고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저녁 햇살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에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 햇살은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음률을 토해낼 것만 같이 구름에 다리를 걸고 매달려 있었다. 모필(毛筆)이 닿으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현악기처럼 구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양각색의 모양과 소리를 담아내고 있었다.

 어느덧 라디오에서 캐럴이 흘러나오고 크리스마스도 다가왔다. 하여 숙희에게 선물이라도 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달리 큰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준 데 대한 답례 차원이었다.

 “미스터 강, 경치 끝내주네!”

 뒤통수에 꽂힌 남자의 목소리가 선물  생각에 빠진 나를 깨웠다. 그는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 다른 회사로 간 전직 도안사였다. 그가 좋은 회사로 가게 되어 내가 급하게 그의 자리에 오게 되었음을 후일 사장에게 들었다. 비록 도안사이기는 했어도 그림 실력이 탁월하여‘허 화백’이라고 불렸다. 꽁지머리를 한 그는 여느 기획실 도안사와는 다른 실력자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요즘 자주 뵈네요!”

 나는 얼마 전에도 그를 보았던 기억을 상기하며 가볍게 물었다.

 “어, 그럴 일이 좀 있어. 미스터 강, 오늘 나하고 술 한 잔 하지 않을래? 마침 일도 일찍 끝낸 모양인데…….”

 “술이요? 저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술 잘한다고 하던데 뭘. 미스터 강하고 의논할 것도 있으니 우리 지금 나가면 어떨까?”

  결국 그의 재촉과 ‘의논할 것’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이, 옆 골목 불고기집에 있을 테니 사장님 오시면 그리 오시라고 해!”

  허 화백이 오후의 햇살에 나른해하는 소년에게 부탁하고는 먼저 나섰다. 라이트테이블에서 필름수정을 하던 나른한 소년은 나른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소년은 대답 대신 늘 고개만 끄덕이는 버릇 때문에 무슨 병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받을 정도였다.

 허 화백은 술과 고기를 주문하고는 음식이 차려지기도 전에‘의논할 것’이 무엇인지 대뜸 말문을 열었다.

 “내가 야간대학 응용미술학과에 합격했는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시간상 학교 다니기가 어려울 것 같아. 내가 있던 회사에 미스터 강이 들어가고 내가 다시 이리로 오면 어떨까? 여기 사장님하고는 어느 정도 얘기가 됐어.”

  허 화백은 사장하고는 이미 상의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도록 자신의 입장과 옮길 회사의 좋은 점을 열심히 설명했다.

 “내가 다니는 데가 흔히 있는 소규모 디자인사무실이 아닌 것은 잘 알지. 국내 굴지의 문구 개발사야. 그곳에서도 디자인 개발부에 근무하게 될 거야. 정식 보너스는 300%야. 월급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의논해 볼 참이고. 어떠냐? 괜찮지?”

 그가 근무하는 회사라면 업계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부러움을 살 만한 회사였다. 물론 허 화백이 말한 대로만 된다면 더 바랄 것 없는 좋은 조건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나만 제외하고 그들끼리 내 문제를 왈가왈부했다는 것은 언짢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우연이라고 할만치 내 거취 문제가 늘 남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참으로 못마땅했다.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출타했던 사장이 나른한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다방으로 내려왔다.

 “이거 미안하게 됐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미스터 강 실력이 문제가 아니고 허 화백 입장이 안타까워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론이네.”

  사장이 해명을 덧붙였다. 나는 더는 버틸 수가 없었고 버터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 언제쯤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내일 전화하면 이력서 가지고 면접 와. 나이도 지금보다 세 살 정도 높이자구. 경력도  조금 더 붙여서…….”

  나이를 속이고 경력을 거짓으로 부풀리자는 허 화백의 말에 나는 반대했다.

 “이럴 땐 그쪽 회사 기준에 맞게 조금 속이는 게 정상이야. 미스터 강은 나이를 올려도 괜찮은 애늙은이처럼 보여서 오히려 다행인데 뭘!”

  허 화백은 이미 일이 다 해결된 것처럼 너스레까지 떨었다. 그리고 그곳의 장단점과 조직구조에 대해 조언을 덧붙이면서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사장과 허 화백은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처럼 내가 떠난 후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내가 모르는 큰 전시회 건이 있었다. 마침 경력 있는 실력자가 필요했던 터라 허 화백의 제안에 따라 쉽게 결정된 듯했다.

 “참, 미스 정 요즘도 술, 여전한가요?”

 이야기 끝에 허 화백이 불쑥 내뱉었다. 나는 정숙희를 두고 하는 얘기임을 직감하고 그들의 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으음, 여전히 그래. 진 사장이 술을 어지간히 많이 해야지. 툭하면 미스 정한테 술집 어디어디로 돈 가져오라고 시키는가 봐. 수고했다고 한두 잔 받아먹다 보면 술이 늘게 마련이지.”

 진 사장이라면 정숙희 회사의 사장이었다. 나는 둔탁한 쇠망치로 얻어맞아 바닥에 팽개쳐진 벌레처럼 온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늘 웃기를 잘해서 지조 없이 푼수처럼 보이기는 했어도 명랑함으로 인정받고 심성도 고운 숙희였다. 비록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어도 배우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착한 여자였다. 그런 숙희가 그녀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선입견을 남겼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괴로운 만큼 그녀에 대한 노여움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에 더는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갑작스런 취기가 몰려와 몇 차례 뒷걸음질을 쳤다. 머리에 가스가 찬 것처럼 멍해지기 시작하더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술을 받아 목에 털어 넣을 때는 상관없던  취기였다. 취기는 정숙희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켰다.

 나는 숙희에 대한 분노를 얼싸안고 비틀대며 밖으로 나왔다. 지나치는 행인과 부딪혔다.  부딪힌 행인은 발끈 성을 내다가 비틀거리는 나를 보고 비아냥거리며 이내 피해버렸다. 남은 것 하나 없이 모두 빼앗긴 지독히 허탈한 기분이었다. 그 허망함은 진 사장에 대한 노여움보다도 자신을 그렇게 방치하며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닌 정숙희에 대한 분노였다. 그래서 허 화백 같은 사람에게 가볍게 보이고 그녀의 이름을 쉽게 입에 오르내리게 만든 것이 못마땅했다.

 나는 게슴츠레 흐려진 눈으로 사무실을 올려다보았다. 사무실 불빛은 창틈을 비집고 비스듬히 계단 아래까지 스미어 나와 있었다.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인데도 불이 켜져 있는 것이 의아했다. 나는 아직 숙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난간을 잡고 잠시 비틀거렸다. 겨우겨우 우악스럽게 계단을 짓누르고 2층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형광등 불빛 하나만이 추위에 쪼그라들어 희미하게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칸막이를 밀치고 숙희의 사무실 쪽을 훑어보았지만 그곳에도 사람은 없었다.

 사람의 인기척도 없는데 그대로 비워진 채 불이 켜져 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성이고 있는데 화장실 닫히는 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려왔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억지로 몸을 돌리려 하자 비틀대는 동작이 저절로 커졌다. 나는 내 행동을 통제할 힘이 없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머!”

 허리춤을 추스르며 화장실을 나오던 숙희가 나를 보고는 기겁하여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화장실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을 터였다.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띠며 민망한 표정으로 서둘러 옷매무새를 마무리했다.

 “어머, 놀랬잖아요! 인기척도 없이……. 그런데 이렇게 늦게 어쩐 일이에요?”

  그러나 나는 평소와 다르게 퉁명스럽게 씹어뱉었다.

 “…왜, 아직 퇴근 안 했나요?”

 “사장님이 퇴근하라고 해야지 가죠!”

  그녀는 나의 기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오히려 명랑하게 대꾸했다. 불쑥 진 사장이 술집으로 그녀를 또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숙희도 진 사장이 자기를 부르길 은근히 기다릴지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자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 술 냄새!”

 그녀가 마치 파리를 쫓아버리듯이 콧구멍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게슴츠레 쏘아보았다. 커피색의 도톰한 입술, 봉곳하게 솟은 앞가슴, 복숭아처럼 잘 익은 뽀얀 종아리를 감싼 검은색 스타킹……. 울컥 그녀를 훔치고 싶었다.

 “숙희 씨, 루주 이름이 뭐요?”

 나는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평소와 다른 내 말투를 듣고 그녀는 비로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보니 그녀를 훔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비로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듯 보였다. 그녀의 큰 눈이 더 커졌고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연신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마침내 핸드백을 옆구리에 꿰찼다. 그리고는 문 앞에서 몸의 균형을 잡고 혀를 날름거렸다.

 “저 말이죠. 우리 사장님한테 전화 오면 먼저 퇴근했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루주 이름이 뭐냐 하면요. 내추럴 캔디!”

 그녀는 약을 올리듯 혀를 삐죽이 내밀고는 토끼처럼 재빨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라졌다고 하기보다 그것은 도망이었다. 그녀는 나를 피해 멀리 도망치는 한 마리 양이었다.

 내추럴 캔디는 내 마음을 온통 헤집고 다니며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내추럴 캔디의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른거리는 내추럴 캔디는 고향의 아지랑이보다 더욱 아롱거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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