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만남 - 하나 그리고 열하나




 숙희에 대한 입소문은 나를 더없이 강한 의심으로 몰아넣었다. 매일 아침 사무실에서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전 같지 않은 속마음을 들킬까 몹시 신경이 쓰였다. 엉망으로 뒤엉킨 마음도 모르고 오히려 내추럴 캔디 사건으로 한층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이런 가시방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내추럴 캔디 색상이 좀 더 강렬해졌고, 얼굴은 복숭아처럼 뽀얗게 생기가 돌았으며, 그녀의 향기는 언저리를 그윽하게 맴돌았다. 차라리 허 화백이 대신 제출한 이력서의 결과가 몹시 기다려졌다. 직장을 옮길 날이 기다려질 만큼 초조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꼭 숙희와의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만두어야 할 사무실이므로 이미 마음이 떠난 탓도 있었다. 그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는 불안은 쉽게 진정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입맛이 없어져 끼니를 거르는 일이 종종 생겼다. 가끔 무턱대고 버스에 올라 종점까지 가서 동시상영 영화를 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회색 도시의 거리를 쏘다니곤 했다. 그렇게 애꿎은 시간만을 죽이며 맥없이 흘려보낸 날이 보름 남짓 되었을까? 허 화백에게서 연락이 왔다. 며칠 후인 다음 달 월초부터 출근하라는 명령 같은 통보였다. 나는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단정 지었다. 일단 숙희와 멀리 떨어져 지낸 다음 차근차근 생각해 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직장을 옮긴다는 것을 알게 된 숙희는 이별주를 나눠야 한다며 점심때부터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적당한 핑계라도 둘러대어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거의 끌다시피 하여 분위기 좋은 양식 레스토랑으로 나를 안내했다

 “서운해서 어쩌죠? 소식 없이 그냥 가면 안 돼요!”

  그녀는 내가 떠나는 것을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전화하는 것 말고는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그녀가 아쉬워하는 것도 이해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들로 여전히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연락을 끊지 말 것을 당부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꼭 연락하겠노라는 거짓 섞인 입찬말을 할 수 없었다.

 “그 회사 사정이 어떨지 아직 몰라서……. 좀 지켜봐야죠.”

  나는 말끝을 흐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연락 안 하면 허 화백한테 위치 물어서 쳐들어갈 거예요!”

 숙희는 나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모든 일에 저돌적이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이 부담이 되었지만 싫지도 않았다.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그녀의 이야기를 거의 듣기만 하면서 돈가스와 맥주를 말없이 먹고 마셨다.

 “그동안 매일 봤는데, 그래도 앞으로는 좀 뜸해지겠죠?”

 그녀는 애교마저 부리며 입술을 쫑긋거리고 말했다. 그리고 처음 있는 둘만의 시간에 상기되어 또 재잘거렸다.

 “그래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좋은 회사니까 노수 씨는 좋겠다. 그 대신 난 이런저런 걱정이 많아지겠지만……. 자주 못 만날 것 같아서 불안하고, 연락이 뜸해지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참, 여사원도 꽤 많을 텐데 은근히 걱정되는 거 있죠? 차라리 내가 그 근처에 있는 회사를 알아볼까요? 옆에서 감시나 하게. 후훗!”

  그녀의 재잘거림 속에는 은근한 압박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마주하는 내내 몹쓸 진 사장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나를 취하게 하는 재주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술만 마시다보니 어느새 몹시 취하게 되었다. 내가 많이 취했다고 생각했는지 마주앉아 있던 그녀가 갑자기 옆으로 자리를 옮겨 이동했다. 그리고 예쁘다던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자주 연락주세요!”

 그녀는 내 손을 잡고는 만지작거리며 좀처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숙희의 얼굴을 보았다. 입술을 연신 오물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행동은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은 순박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너무도 매력 있게 눈앞에서 오물거렸다. 입술에서는 온통 내추럴  캔디의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에 비친 캔디 입술은 엷은 초콜릿 빛깔이었다.

  꼭 술기운 때문만을 아니었다. 나 자신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돌발적인 행동이 발생하였다. 나는 그만 그녀의 내추럴 캔디를 덥석 훔치고 말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달콤한 느낌과 향기가 온몸에 젖어들며 전율로 다가왔다. 숙희는 내 기습적인 키스에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희고 동그란 얼굴은 어느 틈에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숙희는 내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포개었다. 빼앗긴 그녀의 입술이 빼앗았던 내 입술 위에 밀착되었다. 그녀는 도둑질 한 내 입술을 그렇게 도로 훔쳐가 버렸다.

  그녀의 입맞춤에 당황하기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녀의 입술을 훔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내 입술을 훔쳐 갔는지도 모르는 사건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없는 심장의 요동을 잠재우기 위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첫 키스가 몰고 온 전율은 가히 치명적이었다. 

  숙희의 입술은 마치 마술과도 같았다. 그녀의 입술은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묘약이었다.  나의 나약한 의심은 그녀의 입술 한 번에 이미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나는 그녀의 내추럴 캔디에 완전히 포박되어 황홀한 울타리에 감금되었다. 그녀의 입술은 나를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묶어버린 동아줄이었고 비로소 평온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머리를 내 어깨에 살며시 기대어왔다. 키스의 흥분이 몰고 온 숨소리가 아직도 새근거렸다. 내가 그녀의 숨소리를 느끼고 있듯 그녀 또한 내 숨소리를 느끼고 있을 터였다.  우리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필요한 말이 없었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교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둘만의 데이트는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내내 상기되어 있었고 나는 그녀의 향기에 내내 취해 있었다. 향기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내츄럴 캔디의 입술에 취한 이별의 밤이었다.

 

 

 며칠 후 허 화백과 맞바꾼 사무실로 첫 출근을 했다. 첫날은 200명이 넘는 각 부서의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소규모의 기획사무실이 아니라서 업무를 금방 전달받지 못했고, 동료들과 사귀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하는 숙희라는 청량제가 없었다면 너무도 지루하고 형편없는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희의 입술 한 번이 나를 변화시켜도 너무나 변화시켜 놓았던 모양이다. 소심했던 성격이 서서히 바뀌어 갔다. 말은 못하고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말도 거침없이 내뱉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숙희와의 데이트 이후에 생긴 변화였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엉뚱함에 내 스스로도 놀라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미스 노, 내가 미스 노에게 관심이 있는데 어떻게 하죠?”

 개발부 경리 미스 노에게 내뱉는 농담은 예전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미스 노가 대학을 졸업한 지성인이라는 것도, 나이가 나보다 두 살은 더 많음에도 툭툭 농담을 던지고는 혹시 그녀가 털끝만큼이라도 관심을 보이는지 살피는 못난 행동까지 했다.

 숙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소스라쳤던 첫 키스의 추억과 함께 진 사장과 숙희의 관계에 대한 염려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희를 생각하면 늘 진 사장이 떠올랐다. 숙희의 진실을 알면서도 무엇인가를 자꾸 확인하려 시도하는 나의 마음, 치졸한 자학이었다.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어 보이는 숙희에 비해 나는 교활하게도 이중적인 인간이었다. 아마도 마음속 그리움을 채우기에는 숙희에 대한 애틋함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모른다. 받기 전에는 주는 것을 모르는 나 자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짓이었다.

  그것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갈증의 표출이었다. 숙희의 마음을 온몸에 받으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차곡차곡 쌓인 수렁에서 허우적대며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하기 이전에 배운 그리움의 몸짓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미스 노가 친척 결혼식 사진을 사무실에 꺼내놓고 자랑을 하고 있었다. 개발부 직원들은 별 생각 없이 사진을 돌려보며 신부가 예쁘다는 둥, 예쁘지 않은 신부도 있냐는 둥, 한마디씩 했다. 나는 사진을 보다가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미스 노에게 무작정 들이댔다.

 “미스 노, 이 아가씨 좀 소개시켜 주세요.”

 내가 가리킨 사진 속의 아가씨는 갸름한 얼굴에 귀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들보다 돋보이는 미모는 보는 사람의 눈길을 멈추게 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었다.

 “우리 사촌 동생이야. 간호사. 예쁘지?”

 미스 노는 내가 농담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농담으로 되받았다. 그리고 서로 편하고 가벼운 웃음이 오고갔다.

  나는 점심을 먹고 목적도 없이 근처 다방을 찾았다. 그저 커피나 한 잔 하려던 것이 다방에서 미스 노를 만나면서 사진 속의 사촌은 다시 내 표적이 되었다. 그래야만 하는 절대적 이유는 없었지만 오기가 발동하여 사진 속 그녀를 소개시켜줄 것을 재촉했다. 미스 노는 깔깔대고 웃으며 말했다.

 “미스터 강, 정말 웃기는 사람이네! 기다려 봐. 사촌 동생에게 한 번 말해 볼 테니…….”

  미스 노는 한바탕 웃고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먼저 다방을 나갔다.

  그리고 사흘 후 장난으로 시작된 사촌과의 데이트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숙희와의 강렬한 추억을 간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사이 엉뚱한 곳에서 무엇인가 찾으려는 갈증이 꿈틀대며 시도되고 있었다.




【만남 하나】

 나는 다방의 한쪽 모퉁이에 앉아 그녀와  커피를 마주하고 사진 속에서 보았던 아름다움을 열심히 훔쳤다. 약간의 기초화장과 목을 에워싼 하얀색 스카프, 포근한 옷차림에 차분해  보이는 분위기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내 소개를 했다. 별 말 없이 물음에만 답하는 그녀의 엷은 미소가 정갈한 귀여움을 더해 주었다. 비록 사촌 언니의 권유에 못 이겨 나온 것일 텐데도, 그녀는 그런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글쎄요. 제가 얼마나 친해질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다소곳이 말했다.

  첫 만남에서, 나는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나와 사람들 사이에 쌓아놓았던 성벽을 허물고 잠시 성을 떠나보리라, 조심스럽게 마음먹었다.




【만남 둘】

 일요일이었다. 밤부터 내린 함박눈으로 온통 하얀 세상이 되었다. 덩달아 마음도 가볍게  흥분되는 분위기였다.

 옛날 왕들이 살았던 고궁을 찾았다. 그녀와 나는 말없이 걸었다. 그녀와 나 사이는 좁혀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했다. 닿을 듯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했지만, 멀어지면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면 또 멀어졌다. 그렇게 그녀와 나의 발걸음은 규칙적이었다.

 헤어질 때‘이티오피아’라는 레스토랑에서 경양식을 함께 했다. 그녀는 칵테일을 한 잔 했고 나는 가볍게 맥주 한 병을 마셨다. 헤어질 무렵인 저녁에는 또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만남 셋】 

 그녀가 퇴근하고 내 사무실 근처로 와 주었다. 저녁을 먹기에도 조금 이르고 해서 사무실과 가까운 명동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의 홍수 속에 유독 그녀만이 내 눈에 들어왔다. 빨간  반코트를 걸쳐 입은 옷맵시에 튀는 미모는 앙증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명동 거리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평소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무뚝뚝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봐요?”

  그녀가 엷은 미소를 띠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 겨울냉면을 먹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냉면에 만족해하지 않는 내 표정을 보고 그녀는 오히려 미안해했다.

 “친구들하고 왔을 적엔 맛이 좋았는데 오늘은 좀 다르네요! 이 집 냉면은 겨울이 별미인

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를 세심히 배려하며 애쓰는 그녀에게 오히려 민망해졌다.




【만남 넷】 

 오늘은 내가 먼저 전화를 해 그녀에게 시간을 허락받았다. 그녀가 보고 싶다던 영화표도 미리 예매해 두었다. 극장 인근에서 간단한 분식으로 저녁을 하고 팝콘을 샀다. 나는 팝콘을 집으며 간헐적으로 스치는 그녀의 손을 잡을까 망설이다가 하지 못했다. 그녀도 순간순간 스치는 감촉을 의식했는지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슬픈 영화를 봤다. 그녀는 클라이맥스에서 눈물을 훔쳤다. 내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다. 나는 그녀가 민망해할까 봐 그저 모르는 척했다.

  극장을 나오니 눈이 왔다. 눈송이는 그녀의 머리며 내 어깨에 사정없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갑자기 내 팔을 끼며 밀착해 왔다. 그녀의 돌발적이고 당돌한 행동에 짜릿한 흥분이 몸에 감겼다. 그녀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버스가 떠난 차창 뒤에 그녀의  얼굴이 한참을 아른거렸다.




【만남 다섯】

 지하철을 타고 수원에 내렸다. 수원성을 찾아가는 내내 많은 시간을 걸었다. 조금은 힘겨워 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손바닥 좀 펴 봐.”

  그녀가 작고 아담한 손을 펴 보였다. 나는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가볍게 눈을 흘기고는 상기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수원성을 가는 동안 작은 손을 아예 내게 맡겨 버렸다. 나는 서울로 돌아와 그녀와 헤어질 때까지도 투명 매니큐어의 매끄러운 감촉을 내내 놓아주지 않았다.




【만남 여섯】 

 그녀는 매우 토라져 있었다. 무려 세 시간 동안 나를 기다리다가 돌아갔다고 했다.“별일 없으면 만나자.”라고 가볍게 통화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녀는 늘 만나던 약속 장소에  전화도 없이 나와 있었는데, 나는 그녀에게서 전화가 없기에 오늘은 그녀가 일이 있어 오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서로의 생각 차이는 약속이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녀는 바람맞은 것보다 더 비참했고, 세 시간 동안 별 생각을 다 했다고 말했다. 어쨌든 세 시간씩 기다렸다는 그녀에게 정말 미안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쉴 새 없이 어필시키며 사과했다. 그녀는 입술 끝을 미묘하게 찡그리며 잠시 노여움을  푸는 듯하면서도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만남 일곱】 

 일주일간 통화를 하지 못했다. 그녀의 노여움이 풀려 전화가 오길 기대하면서 나는 아예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그녀의 마음이 풀리면 연락이 오겠지 생각하며 고집스럽게 버텼다. 마침내 그녀가 먼저 전화를  했고 일요일에 만날 것을 요청해왔다. 무슨 남자가 그 정도 일을 가지고 삐쳤느냐며 오히려 힐책하는 것으로 보아 노여움이 제법 풀어진 느낌이었다.

  온종일 이어진 데이트는 옛 모습을 다소나마 되찾아 주었다. 오전 내내 서먹서먹했던 것도 오후에 남한산성으로 장소를 옮기며 완전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산성의 아름다운 설경은 그녀의 마음을 녹이는 데 단단히 한몫했다. 산성을 오르는 끝없는 계단을 영화에서처럼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올랐다. 지나는 등산객들이 우리를 보고 덩달아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올라갔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딴은 자랑스럽기도 한 내 마음을 헤아리는 듯한 야릇한 기분 변화를 그녀에게서 감지했다.

  계단을 다 오르자 때마침 사진사가 보였다. 사진을 찍자고 강력히 제의했다. 그녀는 극구 사양했으나 결국 다정한 연인처럼 사진을 찍었고 서로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만남 여덟】 

 겨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모처럼만에 경양식 레스토랑을 찾았다. 스테이크와 곁들인 그녀의 칵테일과 나의 맥주는 긴장을 한껏 풀어 주었다. 술이란 의외의 행동을 하고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할 만큼 참으로 이상한 음식이었다. 평소보다 적은 양의 술이었지만 꽤 취기가 올랐다. 그러나 술기운에 그녀의 입술에서, 눈동자에서, 얼굴에서, 정숙희가 비치는 것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녀가 방심한 틈을 타 기습적으로 입술을 빼앗았다. 달착지근한 이름 모를 향이 혀끝에 묻어났다. 그녀가 나를 가볍게 밀쳐냈다. 그리고는 새침해진 표정으로 자꾸만 의식하며 내 눈을 외면했다.

  나는 깊은 밤까지 잠 못 이루며 뒤척였다. 그녀는 나의 돌발적인 행동을 겪고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며 잠 못 이루고 있을까, 그것을 차마 헤아릴 수가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만남 아홉】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돌발 행동을 거론하지 않는 그녀를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며 친근감 있게 전보다 많이 재잘거리는 그녀의 속마음은 더구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데이트 내내 전처럼 작은 손을 내게 맡겨버렸고 평소보다 많은 말을 했다.

  그날의 도발이 오히려 그녀와 가까워진 촉매가 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데이트 내내 알 듯 모를 듯 명랑해진 그녀의 행동을 보며 비로소 우려했던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만남 열】 

 그녀는 대단히 토라져 있었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약속 시간에 착오가 생겨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은 애당초 어느 쪽도 잘못이 없었다. 한 시간 정도 늦겠다던 그녀의 전화를 받은 사촌 언니 미스 노가 내게 내용을 전하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녀에게 몇 번이나 진정한 사과를 했지만, 그녀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이미 멀리 도망치고 있음을 나는 직감했다.

  그녀는 한 시간을 기다리고는 몇 분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뜬 것이 더 서운한 일이라고 했다. 무려 세 시간을 기다렸던 그녀보다 참을성이 없다는 핀잔은 아무래도 좋았다. 물론 그녀의 세 시간에 나의 한 시간은 비교도 안 되는 거였지만, 그래도 진정으로사과를 받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녀의 똑같은 대답에 나는 오기마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만남 열하나】

 그녀에게 벌써 세 번째 전화를 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아무리 설득해 보아도 그녀는 좀처럼 약속 시간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내 전화를 받을 때마다 똑같은 대답만을 되풀이했다.

 “만나는 것이 자꾸 부담스러워요. 우린 처음부터 그랬어요. 날 예전처럼 그냥 두세요. 사실 지난번 약속이 어긋났을 때 이미 그랬어야 했어요.”

 그녀의 태도는 너무도 완강했다.

 그녀와 만나는 내내 숙희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다. 숙희에 대한 미안함이 커질수록 그녀에게 충실하여 미안함을 잊으려 애썼다. 숙희가 만나자고 했을 때 더러는 사무실 일이 바빠 시간이 없노라고 거짓을 말하고 그녀를 만났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숙희에게 뭐라 둘러댈 말이 없을 땐 숙희에게 아픈 이별을 말하리라, 그렇게 비열한 준비를 해 왔었다.

 또 얼마나 많이 나 자신을 자학하며 때려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우적대고 헤매야 하는 것일까? 다시 시작된 내면의 자조가 한동안 날 괴롭힐 것이었다. 혼돈스럽고 어지러웠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어쩌라고 그래요. 지난 일은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요.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잖아요. 전화를 받고 왜 자꾸 우울해야 하나요? 이제 머릿속에서 지워 주세요. 도대체 제게서 무엇을 알고 싶으세요?”

 다섯 번째 전화도 그렇게 끊어졌다. 이제는 어떤 형태로든 기필코 매듭을 지어야만 했다.

 나는 택시를 탔다. 가고자 하는 장소를 말하자 운전기사는 가속페달을 힘 있게 밟으며 비좁은 길을 거침없이 달렸다. 그러나 곧 혼잡에 묻혀 기어가기 시작했고, 한참 후에야 십여  개의 육교 밑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는 그녀가 직접 받았다.

 “왜, 또 전화하셨어요?”

 “지금 좀 나와요.”

 “왜요?” 

 “할 얘기가 있소.”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왜 자꾸 그래요?”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잖소. 잠깐이면 돼요”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지난번 만나던 병원 근처 다방에 있을게요. 나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나오세요.”

  나는 다방에 먼저 자리 잡고 앉았지만 순간순간 불안이 엄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초조함을 이겨내기 위해 탁자에 있는 성냥을 꺼내어 마디마디 꺾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고개를 출입구로 돌려 확인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성냥 몇 개를 꺾고 또 꺾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동안 그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쉽게 나를 발견하고는 다소곳이 다가와 마주앉았다. 분위기를 짐작했는지 우두커니 앉아 내가 먼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며 양손을 서로 맞잡았다. 되도록 태연하게 보이려 애쓰는 기색 또한 역력했다.

  나는 겨드랑이에 팔짱을 끼고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에게 하려던 말을 못하는 것은 비단 찢어지는 음악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명 때문에 붉게 물든 그녀의 당황한 눈동자와 가녀린 어깨에서 피어오르는 노을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어디인지도 모를 아득한 그곳으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묘한 분위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박여 촉촉해지려는 습기를 그녀에게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의 어깨 위에 유정숙이, 은애가, 그리고 숙희가 있었다.

  나는 말없이 포켓에서 사진을 꺼내어 탁자 위에 놓고 슬며시 그녀 앞으로 밀었다. 남한산성 사진사에게 부탁하여 사진을 찍고는 서로 하나씩 간직해 오던 하얀 설경이 배경인 그녀와 나의 유일한 사진이었다.

 “왜 달라고 하진 않으세요?”

  조심스럽게 사진을 챙겨 핸드백에 넣으며 그녀가 물었다. 나는 퉁명하게 말했다.

 “그냥 태워 버리시오!”

  내 대답이 끝난 후에도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간 다시 침묵이 흘렀다.

 “뭐 하실 말씀 없으세요?”

  그녀가 불안한 듯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지나온 것은 분명했다. 또 침묵은 한없이 흘렀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만나는 것을 피해 왔다는 사실이 다소 서운했지만 진심으로 편하게 보내줄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녀와는 필연적이 아닌 인위적인 만남으로 출발했지만 한 번 최선을 다해 보자는 강한 의지가 내 안에 있었다. 어떤 계기로 만나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연애를 해보겠다는 욕심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던 그녀였다. 나는 어차피 헤어질 바에는 차라리 남자답게 보내야 한다는 궤변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먼저 가세요. 앞으로는 거짓이든 참이든 주위를 맴돌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되도록 남자답게 힘주어 말하려 애썼다. 사실 아직은 거짓이든 참이든 그녀의 주위를 맴돌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와 깊이 정들기 전에 헤어지게 된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실패한 내가 초라하고 미워 그녀로부터 좀 더 매몰찬 상처를 당해야만 잊어질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목 인사를 하고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맥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녀가 나간 뒤 비로소 촉촉했던 두 눈을 주책 맡게 깜박였다. 나는 거짓이든 참이든 그녀의 주위를 맴돌지 말아야 한다고 독하게 다짐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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