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 재활용 시스템의 모순과 불평등, 그리고 친환경이라는 거짓말
미카엘라 르 뫼르 지음, 구영옥 옮김 / 풀빛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목차에서 보이는 한 문장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로잡았다기보다는 뜨끔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아메리카 뷰티>라는 영화의 등장인물이 인도위에서 뒹구는 흰 비닐봉투를 비디오에 찍으며 사물 이면의 생명을 강조하는 장면을 언급하는데 나에겐 그저 옛날부터 눈살이 찌푸려지는 쓰레기로만 인식될 뿐이었다.

수년 전만 해도 길거리에 비닐봉투가 바람에 혹은, 발치에 치여 날아다니는 건 예사였다.

지금은 어쩌다 간혹 보일만큼 줄었다. 천으로 만든 가방을 챙겨들고 시장을 본지도 꽤 오래되었다. 집에서의 분리수거나 음식물 처리는 또 어떤가. 패트병에 붙은 비닐조차 귀찮지만 열심히 제거한다. 쓰레기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재활용도 몸소 실천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지구가 깨끗해지리라 아주 조금은 기대하기도 했는데, 너무 성급했나보다. 책을 읽으니 그럴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마저 느껴진다.

인류학 박사인 저자가 플라스틱 시티라고 명명되는 베트남 하노이의 민 카이 마을에서 목격한 것은 재활용의 이중성 혹은 착각이다. ‘선순환이 아니라 악순환의 경제원리가 재활용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해체하고 분류, 재가공해서 베트남이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한 것은 사실이다. 자본이 들어가지 않는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구조는 누구나 혹하는 사업이다. 중국 역시 그러했으므로 사회주의 베트남이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쓰레기 재활용 사업에서조차 차등은 존재한다. 온갖 오염의 환경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친환경 사업을 한다는 허울 좋은 가치아래 기업은 승승장구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지역민의 원성이 높은 것도 자연스러운 이치다.

담장을 세워서 시야를 가리며 정신적 분리를 한들 오감이 자극하는 육체적 피해를 막을 도리는 없는데 그들은 끝끝내 외면한다. 강가에서 생선을 담았던 비린내 진동하는 비닐봉투를 씻는 사람과 자신은 태생부터 다르다고 선을 긋는 모양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파업으로 인해 산처럼 쌓인 쓰레기가 눈에 보여야만 재활용의 소용을 깊게 생각해볼 순간을 맞이한다. 나의 수고로움이 환경을 살리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위안의 결과로 플라스틱을 재생산하는 것인데 그것이 과연 지구를 살리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중국도 쓰레기를 받지 않는다. 당장 공기의 오염과 수질이 나빠지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형태만 바뀔 뿐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 는 저자의 말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