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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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버스터미널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가 꾸는 한 편의 악몽이다 p7

꽃은 태어나고 공부하고 짝짓고 병들고 죽는, 인간사의 모든 중대한 일과 함께한다 p11

내가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일종의 불안장애를 겪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훗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내 고통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다. 나 말고도 그런 병을 앓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니까.

P20

지나간 기억은 외려 생생해지기만 하는데, 새로운 경험은 그에 터무니없이 미달한다는 것을 거듭하여 깨닫게 될 때, 인생은 시시해진다. P22

신은 원래 그런 존재야. 신은 비대칭의 사디스트야. 성욕은 무한히 주고 해결은 어렵도록 만들었지. 죽음을 주고 그걸 피해갈 방법은 주지 않았지. 왜 태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게 만들었고."
P120

제이는 바다의 기이함을 단숨에 파악했다. 바다, 그것은 거대한 없음이었다 p147

권력은 폭력이 본래 구현하려던 것을 폭력 없이 구현하는 힘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제이는 도전자에게는 가혹하게, 추종자에게는 부드럽게 대했다. 눈짓만으로도 뜻이 이루어졌다 p149

모두가 웃을 때 따라 웃지 못한다면 그가 바로 외톨이다 p152

존재는 ‘여기’ 있으면서도 정신은 ‘저기’ 속해 있다는 식의 느낌은 승태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P182

그의 정신이 좀비이기보다는 흡혈귀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매력으로 타인을 움직이고 싶었다. 미소를 흘리며 조용히 다가가 목에 치명적인 이빨 자국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경찰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그는 좀비로 전락해버렸다. 그래서 그런 순간이면 그는 마치 보복이라도 하듯 자신에게 부여된 힘을 행사했다. 그러고 나면 기분은 언제나 더러웠다.
P185

불면에 시달리는 인간의 새벽은 영원처럼 길다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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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별’이라는 건 그의 생각이 아니라 세상이 그에게 주입한 생각이었다.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별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누가 자네에게 가르쳐주었는지 모르지만, 별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별일 뿐이네. 사랑하는 자에게 별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배고픈 자에게 별은 쌀로 보일 수도 있지 않겠나." P22

나는 어두컴컴하고 너는 시리게 푸르다 p70

천박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수록 천박한 짓과 천박하지 않은 짓을 악착같이 나누려고 한다는 것은 내가 혁명을 꿈꾸던 젊은 날 배운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천박한 자신의 욕망을 갖은 말로 치장해 감추면서, 세상에 대고 밤낮없이 두 개의 나팔을 불었다. 이를테면 천박한 자라고 판결을 내리는 자에겐 트럼펫을 불고, 천박하지 않은 자라고 판결을 내린 자에겐 우아하게 색소폰을 불어대는 식이다. 그런 자 중에서 자기 판결의 확고한 명분을 갖고 있는 자는 사실 드물다. 명분이야 난무하지만, 대개는 눈치로 때려잡는다. 좀더 깊이 알거나 좀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 어떤 지점을 향해 색소폰을 불었다 하면 그제야 너도 나도 줄지어 집중포화로 포즈도 우아하지, 색소폰을 일제히 불어젖힌다. 천박하다고 판결해, 트럼펫을 불어야 할 때는, 그 짓조차 오물을 뒤집어쓸지 몰라 조심조심하다가 최종적으로, 침묵은 밑져도 본전이라는, 지식인 사회의 은밀한 불문율을 따라가고 마는 것도 그들이다. P52

어떤 낱말에서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의 간격은 때로 저승과 이승만큼 멀거든. 가령 네게 연필은 연필이지만 마음 놓고 공부할 환경을 살지 못했던 내게 연필은 눈물이다. P73

인식된 사물이 때로는 그 사물 자체와 얼마나 다른지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어떤 낱말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천차만별이듯이. P74

걷고 있으면 저절로 시인의 이름으로 걸어온 수많은 오류의 길들이 떠올랐다 p82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니다.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본원적으로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열일곱과 너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그 무참한 기억의 편차 같은 것. P84

그러나 원고지와 질 좋은 펜을 준비한다고 해서 누구나 ‘예민한 악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재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는 도구를 잘 갖추고 끊임없이 연마함으로써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내면의 정수精髓를 이끌어내어 마침내 ‘예민한 악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어떤 이는 영원히 거기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이가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일을 그만두는 것뿐이다. P112

문학에서까지, 층위를 제멋대로 나누어놓고, 모든 작가 작품을 마치 공산품에 품질 표시를 하듯 표시해서 칸칸마다 나누어 몰아넣으려는 듯한 지식인 독자들의 일반적 습관에 나는 경멸감을 갖고 있었다. 어디 문학뿐이겠는가. 문학을 떠나면 폭력적인 그 편견은 더욱 두드러진다. 모든 장르에 걸쳐 메이저, 마이너리그가 있고, 양아치로 취급받는 아웃사이더 그룹도 있다. 스포츠처럼 정당한 시합에 따른 철저한 기록 분석으로 나뉘는 게 아니다. 더러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주 작은 ‘현상’을 단서로 ‘내용’ 전체를 분류해버리고, 대중의 호응을 유도하여 그 분류의 정당성을 가짜로 확보, 굳히기 과정을 거친다. 그러고 나면 어떤 층위에 분류되어 넣어진 자는 아무리 변화를 꿈꾼다 해도 거의 평생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쉽다. 이를테면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 그런 식이다. 그들의 분류 기준이란,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대개는 전근대적 ‘양반의식’이 이월상품처럼 전이돼온 것이다.
P 113

연애를 하면서 동시에 지혜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잠언은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P164

늙는 것, 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

P168

오로지 늙었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끔찍한 모든 굴욕 ... P168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칭찬받는 봄 p171

술은 내게 분별없는 위로를 주었다 p179

질투심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며, 맹목적 잔인성을 갖는다는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다. 질투심이 꼭 정열의 증거는 아니라고 했다 p180

내게는 그애보다 죽음이 훨씬 가까웠다.
P186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 P188

동서고금 수많은 성인들이 동굴 속의 어둠에서 세상의 중심을 밝게 꿰뚫어보고 천리天理를 알았다. P199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P202

여름이 울울창창했다.

P204

. J. 루소는 『에밀』에서 이렇게 썼다. 10세는 과자, 20세는 연인, 30세는 쾌락, 40세는 야심에 미친다고. 나의 마흔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미쳐야 할 어떤 영지領地도 갖고 있지 않은 불모의 대지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진실로 청춘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내 정체성에 따른 뜻을 세운 적도 없었다. 그냥 허랑하게 시간을 따라 흘러왔을 뿐이다. 내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

나의 현재에게, 미래에게 ‘불’을 켜대고 싶지만 내겐 성냥 한 개비도 가진 게 없었다. 쓸쓸했다

P210

늙으면 속눈이 더 밝아지니, 젊은 애들 마음을 읽어내는 건 여반장과 다름없다 p219

암묵적으로 흐르고 있는 강력한 배타성을 나는 느꼈다. 내가 마치 ‘사람들의 나라’에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늙은 당나귀’ 같았다. P222

카페 안의 젊은 그들과 나 사이엔 전쟁에서의 전선보다 더 삼엄한 경계선이 쳐져 있었다. 잔인한 금줄이었다 p222

생명이 갖고 있는 가장 비극적인 운명은 노화와 죽음으로부터, 그 지옥으로부터 마지막까지 잔인하게 유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p227

내 집은 이미 나의 무덤이었다 p314

당나라의 시성詩聖이라고 불렸던 시인 두보杜甫는 "관 뚜껑을 덮고서야 일이 정해진다"고 썼다. 죽어서야 그 인물의 업적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사람들은 죽은 자에겐 터무니없이 후하다. P322

죽은 나의 ‘불멸’을 도울 것이다. P322

나의 싱싱한 행복이었다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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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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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같은 고정관념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백인은 어쩌다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룬 흑인을 만나면
‘흑인이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대사를 칭찬이랍시고 치게 된다. 작가가 미리 생각해둔 프로그램이 인물의 대사가 되어 배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 관객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 Noah Lukeman, The Plot Thickens: 8 Ways to Bring Fiction to Life, New York: St. Martin‘s Griffins, 2002, p. 29.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보통은 한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이 인물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죠. 그냥 여행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생생한 안정감입니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위해서다."
*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김명남 옮김, 책세상, 2014, 87쪽.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호텔

어떤 사건은 명확하게 기억이 나는 반면 어떤 사건은 금시초문처럼 느껴진다. 모든 기억은 과거를 편집한다.

발상은 무게가 없다. 지혜도 그렇다. 기술도 마찬가지. 그래서 이런 무형의 자산을 가진 사람은 어딘가에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먹고살기에도 유리했다. 마찬가지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도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찾아 천하를 유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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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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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 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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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윈이 세상을 뜰 즈음에 영국 국교회는 진화론을 대체로 받아들여 신이 정한 자연법칙 목록에 포함시켰다. 다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젊을 때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았지만 죽을 때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였다. 두 가지 의문이 다윈의 신앙을 무너뜨렸다(두 의문은 오늘날에도종교의 골칫거리다). 신은 왜 악을 허용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실질적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다윈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다정다감했으며, 가족에게 헌신하고, 노예제를 격렬히 반대했으며, 남을 배려했다. 사랑하는 딸 애니가 열 살 때 결핵으로 죽자 다윈은 신이 만일 존재한다면 어 떻게 무고한 아이의 고통을 용인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다윈의 아내 에마는 애니가 죽은 뒤에 종교에서 위안을 찾았지만, 다윈이 종교에서 찾은 것은 의심뿐이었다. 오늘날의 과학 적 수수께끼는 진화가 왜 노화와 죽음을 허용하는가다. 오, 주여, 왜 불로불사의 아이다호 감자 가 아니라 저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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