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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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좋을지 망설이는 사이, 언니가 먼저 우산을 펼쳐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비였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시간의 궤적 중에서)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약간 그렇지 않다. 일상을 그린 것 같지만 또 아니다. <시간의 궤적>에서도 배경이 프랑스다. 프랑스란 나라, 이국적인 상상을 한다. 그런데 소설은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만난 언니와 나의 우정을 다룬다. 이해할 수 없지만 또 이해하게 되는 사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기억에 대해서. 참 묘한 거구나. 과거의 좋았던 일들이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고. 백수린의 단편은 이런 설정이 많은 것 같다. 여름의 빌라>는 휴가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추억만 있으면 좋겠지만 소설에서 그건 아니었다. 주어진 현실, 슬픔, 역사 같은 게 어우려졌다. 좀 어려웠다. 안타깝기도 했다.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여름의 빌라 중에서 )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는 십대 소녀의 반항처럼 느꼈다. 물론 그런 내용은 아니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경험하는 묘한 감정이라고 할까. 매일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길에서 보게 된 붉은 벽돌집이 허무는 과정을 본다. 그 일을 하는 남자들을 보게 되는데. 알 수 없는 욕망을 경험한다. <흑설탕 캔디>는 할머니를 추억하는 소설이다. 자신을 돌봐준 할머니를 기억하는 이야기. 나는 할머니와 추억이 크게  없다. 그래서 좀 색다르게 읽었다. 외국에서 아들과 손자손녀를 돌보는 할머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말도 통하지 않고.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는 표지랑 제목이 넘 예쁘다. 여름에 읽고 싶었는데 가을이 되었다. ㅎ 백수린의 단편집은 처음 읽는 것 같다.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시리즈>와 문학동네 젊은작가수상작에서 만난 게 전부다. 대신에 장편과 번역한 작품을 읽은 기억도 있긴 하다. 이번 작품집을 통해서 백수린의 소설을 더 많이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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