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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밭으로 오세요
공선옥 지음 / 여성신문사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수수밭으로 오세요 」 공선옥/ 창비
몇 해 전 문화방송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일일연속극이 한창이었다. 극중에서 ‘금순’은 23살 어린 엄마이자, 남편과 사별하고 시댁에서 눈치를 보며 살면서도 늘 씩씩하고 자기 일에 열심인 사랑스럽고 억척스러운 여성이다. 게다가 얼굴도 예쁘니 잘 생긴 총각의사의 마음까지 흔드는 재주도 갖고 있다.
공선옥의 소설 <수수밭으로 오세요>의 주인공 ‘강필순’ 역시 ‘금순’과 비슷한 처지로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다. 하지만 ‘금순’과 ‘필순’의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이 전개되면 될 수록 필순의 슬하에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서는 결국 남에 아이까지 거두어 들여 첫 남편의 아들 한수, 친구 은자의 딸들 소란, 소정, 여동생 필례의 아들인 줄 알고 받아들였으나 생판 남인 봄이, 그리고 두 번째 남편인 의사 심이섭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기 산이, 이렇게 다섯 아이의 엄마이며, ‘금순’처럼 예쁘지도 젊지도 않은 서른 중반의 그저 평범한 아줌마라는 점이다.
이 평범한 아줌마의 이야기는 첫 남편 조영식과 헤어져 구로동에서 아들 한수와 미싱일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필순’으로부터 시작된다. ‘필순’의 서럽고 고달픈 생활은 늘 곁에 있는 친구 오은자와 함께 하기에 견딜만한 것 이었다. 그러다가 구로동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하는 심이섭을 만나 지리산 성삼재 밑으로 재혼살림을 차리게 되고 ‘필순’의 오지랖 넓은 모성은 치마폭같이 구례 땅을 감싸고 있는 지리산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지리산 자락으로 내려와 병원을 차린 심이섭(남편)은 ‘필순’과 아주 다른 사람이다. 절대적 가난이 아니라 가난을 선택해서 세상에 죄를 덜 짓고 살고자 하는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의 회원이고, 생태주의자이며 사회봉사까지 몸소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태어날 태부터 가난을 안고 살아온 ‘필순’과는 전혀 딴 세상의 사람이다. 심이섭이 ‘필순’을 선택한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구로동 공장지대를 돌며 의료봉사를 하듯 ‘필순’과 한수에게 남편이 되어주고 아비가 되어주는 봉사를 자청한 것이다. ‘필순’이 심이섭과 결혼할 무렵 심이섭이 선물처럼 자신에게 왔다고 생각했듯이 결국 ‘필순’에게 자신과 어울리지 않은 선물인 남 편 심이섭은 아들 산이를 부탁하며 결국 오영란이라는 여성과 함께 티벳트로 떠나고 만다.
그 와중에 친구인 은자가 간경화로 쓰러져 갈 곳이 없게 되자 은자와 딸 둘을 지리산으로 불러들이고, 필례의 아들인 줄 알고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의 까만 눈동자를 보고 차마 돌려보낼 수가 없는 대책 없는 모성 탓에 봄이도 받아드리고, 지리산 대모신처럼 아이들을 품에 안고 씩씩하게 살아가게 된다.
어미란 대저 못난 자식도 기꺼이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인가 보다. “못나고 힘없고 못 배우고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밀어내기보다는 사회·경제·정치적으로 제도적 보호를 해주는 것이 바로 어미 마음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무릇 어미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치유되지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책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이 책을 재독하면서 처음 읽었을 때처럼 또 많이 울었다. ‘필순’의 질긴 모성에 눈물이 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부려놓은 감정의 반전이 자꾸만 가슴을 더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뒤뜰 댓잎 서걱이는 소리에 때론 석류알 터지는 소리에도 잠들지 못해 아이를 업고 한적한 시골길을 달빛 밟으며 한없이 걸었던 날들의 내 경험과, 성삼재를 바라보며 다섯 아이를 위해 “사람이 마음껏 울 수 있는 때가 그래도 마음은 어느 정도 촉촉한 때”라고 마른 침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는 ‘필순’의 그림자가 오버랩 되기 때문일까? 아니다. 나 역시 어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미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