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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천 가족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유정천 가족>
인간과 너구리와 텐구가 꿋꿋하고 낭만적으로 살아가는 상상 속 교토 이야기
폭발하는 유머, 거침없는 능청, 밀도 높은 감동을 선사하는 모리미 판타지 최고의 수작 - 이 책 표지에
일러두기
1 유정천有頂天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천 가운데 맨 위에 있는 하늘, 유(Bhava=존재)의 꼭대기agra에 있는 하늘이란 뜻이다. 풀어 설명하면 형체가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일본에서는 '우초텐'이라고 읽어 위와 같은 불교적인 뜻 이외에 파생된 의미로 '유정천'에 오른 것처럼 무엇인가에 열중하여 자기 스스로를 잊은 상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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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폭소, 주체할 수 없는 바보의 피...
'음...심심한데 한 번 읽어볼까? 얼마나 웃기다는 거야.' 하는 마음이었다.
헌데 한 장도 채 넘기지도 않아, '어...분위기가 이상해...? 계속 봐야 하는 거야.(움찔)'
3차원, 아니 4차원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너구리는 텐구를, 텐구는 인간을, 인간은 너구리를, 다시 너구리는 텐구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잡아먹고 먹히는 관계다. 그러긴 하지만 서로 잘났다고 우기는 판국이고, 내가 보기에 다들 꼬리 아홉은 달린 여우들만 같다. 그런데 여우는커녕 바보들이란다. 바보 천치! (너구리의 스승인 텐구天狗를 너구리가 감히? 꼭 알고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스승을 뭉개고 자빠뜨려놓고 불쌍해하면서 꼭 알고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일으켜 세워주고자 나름 노력?한다는 설정임.)
인간은 도시에 살고, 너구리는 땅바닥을 기고, 텐구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10쪽)
주인공은 명성이 뜨르르한 시모가모 가문의 바보 사형제 가운데 셋째인 야사부로다. 야사부로인 '나'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잘난 집안의 바보 사형제는 각기 자신들만의 바보 특기가 있다. 우리가 보통 예상하는 바이기도 한 큰형은 고지식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지는 유형, 둘째는 구박을 많이 받아서 그런가? 은둔형 히키코모리다. 그럭저럭 주인공으로 적합한 셋째는 재미만 좇아다니는 어쩔 수 없는 너구리다. 막내는 마냥 철없다고 해야 할까. 그럼 이런 바보 사형제를 둔 어머니는 속이 미어터질 것만 같은데 "전혀 아니올시다"다.
우리 어머니는 자기 자식들이 너구리들 사이에서 이름난 못난이들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한 녀석도 빠짐없이 세상을 떠난 남편의 후계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너구리라고 굳게 믿었다. 이미 부조리의 영역에 당당하게 들어선, 근거를 따지지 않는 신념이야말로 어머니를 어머니답게 나아가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었다.
아버지도 위대했지만 우리 어머니 또한 위대했다. (56쪽)
앞서 명성이 뜨르르했다고 했지만 시모가모 가문을 이끈 야사부로의 아버지는 사실 인간 송년회 모임인 금요구락부에서 너구리 요리로 바쳐져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 어떻게 그렇게 죽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이 이 책의 줄거리 가운데 하나다. 유사 이래 이처럼 편안할 수 없는 너구리들의 삶에서 단 하나 불안한 것은 인간의 먹잇감이 될지도 모른다는 건데 웃긴 건 언젠가 잡아먹힐 줄 알면서 잡아먹히고 싶기도 하다는 희열을 이 바보 야사부로가 배시시 드러낸다. 역시 감히 스승이 까무러치고 자빠지는 매력녀 인간 벤텐을 사모하는 까닭이다. 아무래도 한수 위인 인간은 너구리보다 사랑이 가득한 존재이기에 뭐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려는 식탐을 부리는 존재다. 아, 이 슬프고도 아니러니한 아작나는 사랑이여.
이 책 전면에 흐르는 "왕년의 명성을 이어서 가문을 일으켜 세울지 말지 한 시모가모 가문과 에비스가와 가문의 싸움, 인간과 너구리와 텐구의 삼파전" 이면에는 가족 간의 끈끈한 정과 형제간의 우애가 함께한다. 뭔가 대단히 너구리스러운 해석같기도 한데 아무튼 그렇다고 치자. 『유정천 가족』은 달리 말하면 바보스러움, 멍충함의 너구리 승리다. 인간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나는 좀 둔해서 야사부로와 이를 둘러싼 이들이 '지금 대체 뭐 하는 건가?'싶고 판타지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 책 별 셋이야!!' 하고는 며칠을 덮어두었다가 다시 서평을 쓰려고 휘휘- 들춰보니까, 으흐흐. 눈물 나도다. 모리미 토미히코 당신! '촘'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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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언젠가는 내 뒤를 잇게 될 거야."
예전에 기온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아버지가 큰형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구리 세계에는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너구리도 있고 너는 또 고지식한 편이니 다툴 일도 많을 거다. 하지만 한 마리의 적을 만들 때는 친구 한 마리를 만들어야 해. 다섯 마리의 적을 만들 때는 친구를 다섯 마리 만들어야 하지. 그렇게 적을 만들어 언젠가는 너구리 세계의 반을 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네 곁을 보렴. 네겐 동생이 셋이 있다. 이건 아주 마음 든든한 거야. 그게 네 비장의 카드가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거다. 내가 늘 아쉽게 생각하는 건 그 비장의 카드를 나는 갖지 못했다는 거야. 난 동생을 믿지 않고 동생도 나를 믿지 않았지. 우리 형제가 서로 다투는 사이가 된 것은 그 때문이야. 피를 나눈 형제가 적이 되었을 때, 그때는 최대의 적이 된다. 그러니 너희들은 늘 서로 믿어야 해. 형제간의 우애! 잊어서는 안 된다. 형제간의 우애! 어쨌든 너희들에겐 모두 같은 '바보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아버지는 껄껄 웃었다.
"뭐 별로 자랑할 만한 피는 아니지만." (4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