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상깊은 구절
어렸을 때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아무도 크게 마음을 쓰지 않으며,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무조건적인 애정을 얻을 수 있다. 식사를 하다 트림을 할 수도 있고, 목청껏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돈을 못 벌어도 되고, 중요한 친구가 없어도 된다. 그래도 귀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인물들의 행동은 지위에 대한 우리의 불안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친구나 연인은 우리가 파산을 하거나 수모를 당해도 우리를 모른 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가끔은 그 말을 믿어볼 수도 있겠지), 우리가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속물들의 매우 조건적인 관심이다. (27쪽)
사실 역사상의 대부분의 기간에는 그 반대되는 가정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불평등과 낮은 기대 수준이 정상적이고 지혜로운 것이었다. 극소수만이 부와 충족을 갈망했다. 다수는 자신이 착취를 당하며 체념 속에 살아갈 운명임을 잘 알고 있었다. (60쪽)
...................................................................................
Status Anxiety
<불 안>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124쪽)
'야망'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크게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다루는 불안은 뭔가 큰 것을 바라보고, 뭔가 이루어 보겠다고 나서대니까 요즘 우리가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는 것일 텐데. 그러면, 큰 꿈을 꾸지도 말고 뭔가 이루어 보겠다고 나서지도 말라는 것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왜 불안하고, 그 불안을 줄이거나 제거할 만한 해법이 있는지 궁금하다면 일단 이 책을 보기로 한 건 잘한 일이다.
이 책은 '불안'을 다룬 한 편의 논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지위' '지위로 인한 불안' '명제'에 대한 정의를 간단하게 다루고, 본격적으로 불안의 원인 5가지 - 1) 사랑결핍 2) 속물근성 3) 기대 4) 능력주의 5) 불확실성 - 와 그에 대한 해법 5가지 - 1) 철학 2) 예술 3) 정치 4) 기독교 5) 보헤미아 -를 나열한다. 목차와 내용은 이렇게 무척 단순한 듯하지만 막상 내용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녀석과 만나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전에 저자 알랭 드 보통이 지은 책은 한두 권 접해본 것이 전부이고 그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만 곁다리로 듣기로는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글로 잘 버무려내는 솜씨가 있다는 것, 박식함과 위트 정도. 이 책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봐줄 수 있지만, 조금 불안한 것은 (미리 말해두지만) 불안의 원인을 알아가는 과정은 놀랍기도 하고 호기심 많은 독자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언정 따스한 가슴을 내밀고 불안의 해법을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다소 실망을 안겨줄 수 있다. 한참 '이 사람 참 박식하군. 아, 이런 일도 있었어? 이거 재미나군.' 그러면서 중간 중간 심심하지 않게 배치된 흑백의 사진과 그림을 관람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책장을 덮는 순간이 오는데 그때 누가 "우리가 왜 불안한 거야?" 또는 "불안하지 않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한대?" 또는 "책내용이 뭐야?"라고 물으면 머릿속이 새하얘질 수도 있다. 그것은 조각들의 모음인 논문 냄새가 나는 글들의 단점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박식함으로 여행이나 사랑, 건축을 건드려줬을 때는 그가 바라보고 해석하는 상징이, 이미지가 신기하고 재미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일 수 있는 '불안'은 또 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저자의 글 대로 우리는 하필이면 불확실성의 시대에 누군가에게 사랑(관심)받기를 원하고, 조건을 따져대고, 비교하고, 부러워하고, 오르지 못할 나무든 아니든 올라가려고 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우리네 부모 세대는 중매결혼으로 사랑을 받든 못 받든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면서 살아왔다. 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위에 대한 불만이 뭐야, 자족하면서 자기 식구만의 울타리 안에서 무탈하게 잘 살던 시절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간단하게 말해서, 뭐 하나 단순한 것이 없고 뭐 하나 그대로 따를 수가 없다. 또,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멋대로 '나'를 '누구'라고 규정짓는다.
경제 한파가 누그러질 때를 기다리다가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 불안에 떨다가 시들어 죽을지도 모른다. 멋대로 '나'를 '누구'라고 규정짓는 무리들 때문에 지쳐 지쳐 초라한 늙은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 전에 알랭 드 보통이 알려주는 해법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건드려 보고 그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하는데 불행인지 내가 속해 있거나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해법 5가지를 관통하는 몇 가지[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의 1929년 작 제목이기도 함.) 만들기, 다르게 보기, 자기만족]는 내가 이미 갖추고 있는 훌륭한 자질이다. ㅎㅎ 이 책 덕분에 후세에 이름을 남긴 분들을 참 많이 만났다. 더 읽고 싶은 책이 많아졌고 호기심 지수가 상승했다. 단지, 절대로 불안을 잠재워줄 수 있는 책은 아니라는 점. 마음이 평온해지고 싶거든 노자, 장자, 달라이 라마와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