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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 (반양장) ㅣ 펭귄클래식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의 성과 사랑에 대한 네 편의 작품을 모아놓은 <크로이체르 소나타>이다. 책제목은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작품 중 하나로 가장 처음에 나오는 작품인 '가정의 행복(1859)'를 제외하고 이후에 이어지는 세 편의 후기 소설-'크로이체르 소나타(1889)', '악마(1899)', '신부 세르게이(1898, 미완으로 끝맺음)' 중 유일하게 톨스토이 생전에 발표되기도 했지만 워낙 충격적인 내용을 흥미로운 스토리 진행으로 한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기 때문에 제목 선정으로 참 적절한 것 같다. 내용과는 별개로 음악적 감성을 자극하는 것도 꽤 마음에 든다.
사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톨스토이를 러시아의 대문호라고 칭했지만 정작 내 관심은 따로 있었다. 오래전 유럽형 대안교육을 눈여겨보던 시절 여러 나라의 대안학교 프로그램에 관한 비디오를 보게 됐는데 거기서 '톨스토이 학교'가 있다는 걸 (비록 화면상이지만) 보고 듣고는, 순간적으로 '어? 웬 톨스토이...그 분이 뭘 해서 학교까지?'. 호기심은 거기서 그치고 겉으로는 무덤덤한 척 한참 세월이 흘렀고 또 주워들은 게 이분이 엄청 방탕한 생활을 하셨다기에...
이 책의 성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와 뭔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아무튼 뭔가와 연결고리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대뜸 책을 집어들었다.
공교육의 부작용으로 문학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것을 염려했는지 첫 작품에 들어가기 전, 토론토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계시 도나 터싱 오윈의 서문-작품 해설이 무척 친절하다. 굳이 서문은 다 읽지 않아도 되는데 꾸역꾸역 봤더니 후기 세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풍성한 정보도 알게 된다. 또한, <가정의 행복>이 그나마 가장 밝은 분위기의 이야기라고 한다.
'가정의 행복'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여주인공 '나'의 감정 상태를 따라간다. 어머니를 잃고 고독 속에 잠긴 17살 소녀 앞에 나타난 남자 세르게이 미하일리치는 아버지의 가까운 이웃이자 아버지보다 한참 나이 어린 절친한 친구이다. 여자가 고독할 때 나타나서 묘하게 흔들어 놓고 왔다가 갔다가 적절히 뜸 들일 줄도 아는 이 아저씨가 참 수상해 보였는데 어찌 됐든 소녀의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어놓기엔 충분했다. 요즘으로 치면, 70% 원조교제와 가까운 이 둘의 만남이 부부가 되기까지 그리고 부부가 되어서 벌어지는 미묘한 심리 상태를 매우 간질간질하게 그려냈다. 이후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미세한 감정 흐름을 책으로 읽는다는 것은 자칫 독자의 신경쇠약을 유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차라리 눈이 어떻고 발가락이 짝발이라느니 하는 외면 묘사였다면 사람마다 특정 부위에서 눈이 번쩍 뜨일 만도 하련만, 이 책의 네 작품은 순전히 내면의 윤리적·도덕적인 상승 욕구을 지향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본다.
두 번째 작품은 이야기의 시작이 상당히 흥미롭다. 기차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쪽 구석에서 일부러 다른 승객들과 거리를 두려는 듯한 신사가 말문을 연다. 단호하게 사랑 없다고. 서로 평생 사랑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고. 결혼은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헤어지고 싶지만 그럭저럭 살아가는...심지어 서로 죽이거나 못 죽여서 끔찍한 지옥이 생겨난다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취할 행동은 하나다. 곧이어 다른 승객들이 신사를 피해 자리를 옮기자 남은 '나'에게 신사는 말한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셨으니 불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제가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186쪽) -나도 위의 상황에서 이렇게 말할 사람이라 신사를 비스듬히 앉혀놓고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계속해서 신사가 들려주는 결혼과 사랑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뜨아!'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소설을 읽고 난 후 성과 사랑·결혼에 대해 논쟁의 여지를 마련해 주지만 아무리 직설화법에 익숙한 현대인이라도 차마 논쟁하자고 말하지 못하는 내용이다.
이어지는 내용도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나머지는 전문가의 상세한 해설에 맡기고 내식대로 불러보는 톨스토이 할아버지의 삶을 작품과 관련지어 천천히 상상해 보고 싶다. 읽은지 며칠 됐다고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한 이 책의 내용을 조금은 더 복원해 보고 싶다. 이렇듯 오래도록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문학 작품은 사고의 폭과 깊이를 무한대로 확장시켜준다. 요즘 나오는 말랑말랑 소설 같은 경우라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적어놨다간 소설을 통째로 베껴놓았느냐는 핀잔을 들을 만도 한데 위에 내가 적은 내용은 정말 극히 일부분이다. 쿨함을 좇는 우리가 읽기엔 비록 약간의 신경쇠약증이 염려되긴 하지만 이 책 읽고 자신의 욕망을 점검해 보자. 악마를 잘 구슬려보자. 세상이 아름다워지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