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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걸어라
유인촌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중후한 아저씨의 튼튼한 발과 다리가 나를 유혹할 줄이야.
<거침없이 걸어라>를 만나게 된 계기는 나름 독특하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여러 권 사면 간혹 중간에 작은 광고 팜플렛이 딸려 오는데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그날은 심심했는지 뒤적여보게 되었다. 그때 눈에 띄게 나의 걷기 충동을 자극하는 표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책이고 그와 동시에 저자가 설마 배우 유인촌? 그러한 궁금증이 더해져서 나는 비교적 거침없이 읽기충동을 실행에 옮겼다.
놀랍게도 걷기를 주제로 책 한 권을 펴낼 정도의 내공을 가진 저자는 배우 유인촌이 맞았다. 텔레비전을 그다지 즐겨 보지 않는 내가 알고 있는 배우 유인촌은 고작해야 중년 배우로서 분위기가 좀 있으시고, 얼마 전에는 역사 다큐멘터리 진행을 하셨던 것 정도이다. 그리고 배우라는 직업은 스케줄이 무척 빡빡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스케줄이 아니더라도 따로이 할 일이 많다고 알고 있다. 그러신 분이 느림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인 걷기의 전도사라는 애칭으로 달고 프롤로그에서부터 열정적인 걷기 사랑을 말씀하시니 놀랄 수밖에.
유인촌의 걷기 사랑은 멀리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배우가 되기로 마음 먹은 때부터인 것 같다. 물론 책을 쓰게 된 동기나 내용은 2006년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직을 마치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학과 교수로 재직할 당시 일본대학교 예술학부 객원연구원으로 도쿄에 살게 되면서 걷기를 생활화하다 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재미를 넘어 아름답고 즐거운 중독에 빠져서 걷기를 예찬하는 책을 내게 된 것이다. 우리가 걷기에 옮아주길 바라는 배우의 목소리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발을 근질거리게 만드는, 심장을 확인하게 만드는, 길을 무대로 유혹하는 연기를 펼치는 그의 아름다운 중독이야기이다. 우리와 다른 일본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면면을 드문드문 엿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어린 시절 형 유길촌을 따라다니며 연극을 보고 나서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 항상 가난하게 사는 것을 연습해왔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연극은 가난하고 배고프다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길을 택했고, 그 순간 기꺼이 가난과 손잡고 살아가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131쪽)
겉보기에 별 것 아닌 것 같고 단시일에 결과가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렇듯이 걷기도 묵묵히 지켜볼 하나하나의 단계가 있었다.
워크홀릭 하나, 처음엔 "한번, 걸어볼까?" 결심을 하는 거다. 기회만 있으면 걷는다는 생각을 하라고 한다.
워크홀릭 둘, 걷기를 4개월 이상 꾸준히 했을 때 나타나는 마법 "재미"가 끼어든다. 이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모험이다. 평소에 미처 몰랐던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게 되고, 몸과 몸의 마찰이 일으키는 팬티 구멍 사건 같은 우스운 일도 일어나며, 걷기 게임이 점점 흥미로워진다. 게임단계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놀멘놀멘'이다. 사실 내 기분이 '놀멘놀멘' 좋아지면 세상도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워크홀릭 셋, 시간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걸 넘어서서 강요하는 이 시대에 느린 걷기 예찬 몽상가는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할 것 다 하면서도 여유를 누린다. 이 말 한마디면 대충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날마다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날마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117쪽)
워크홀릭 넷, 개인적으로 나는 이 장이 가장 마음에 든다. 드디어 아름다운 중독, 워크홀릭(walkholic)에 빠진 것이다.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하게 됐을 때 맛보게 되는 카타르시스를 젊은 우리들은 진정 알긴 할까? 문학수업에서 배운 암기요소가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해 보는데 정작 나는 걷기 중독에까지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경험대로 나도 걸으면서 발견하는 작은 변화들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의 세포와 즐거이 대화를 나누고 싶다.
워크홀릭 다섯, 워크홀릭 셋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볼 수도 있는데 나와 내 주변을 느끼고 감사하고 고마워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각 자의 두 발은 얼마나 장한지 모른다. - '수고한다, 내 두 발아'
워크홀릭 여섯, 어떻게 보면 걷기처럼 지루한 행보도 없는데 내공이 쌓이면 걷기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마법을 부린다. 걸으면 걸을수록 계속 걷고 싶게 하고, 이 걷고 싶은 마음은 이곳 저곳으로 튀어 시야를 넓히므로 새로운 아이디어로 세상과 더욱 적극적으로 만나게 한다.
분명 걷고 난 후의 배우 유인촌은 걷기 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이 책을 읽기 전과 다르게 읽고 난 후에 걷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배우 유인촌은 어디에서고 만날 수 있는 중견 배우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몰랐는데 걷는 배우 유인촌으로 한없이 넓어져갈 그의 품을 상상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중독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이 그리운 시절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어른 한 분을 만나게 된 것이 참 좋고, 앞으로 그의 행보로 우리 사회의 여러 '빨(리)빨(리)이'들이 걷기 충동을 느껴서 그와 더불어 아름다운 중독, 더 나아가 세상과 더욱 적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길로까지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