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소녀
세라 페카넨.그리어 헨드릭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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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소녀』는, 누구보다 돈이 필요했던 메이크업 아티스트 제시카가 한 대학 심리학 교수의 설문조사에 참여하면서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소설은 제시카와 실즈 박사의 시점을 서로 번갈아 교차시킨다. 실즈 박사의 진술은 제시카에게 구두 형식으로 전하는 편지에 가깝고, 제시카의 시점은 일인칭 주관적 서술에 해당한다. 제시카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의 가장 깊은 고민을 실즈 박사에게 털어놓은 대가로 고액의 돈을 지불받는다. 하지만 실즈 박사는 제시카의 비밀을 미끼로 그녀를 점차 위협하고 막다른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 시험에 통과하면 그녀는 살아 남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제시카는 물론 그녀의 가족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 실즈 박사의 치밀하고도 지능적인 두뇌는 제시카보다 항상 한 발 앞서있다. 어떻게 해야 제시카는 박사의 약점을 잡고 실권을 쥘 수 있을까? 11월 16일부터 성탄절인 12월 25일까지 40일간 벌어지는 이 심리 게임에, 독자들도 흠뻑 빠져들 것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심리 스릴러 중 최고봉이자, 가장 매력적인 소설이다!


[이 연구에 더 깊이 참여해보시겠습니까? 보상이 훨씬 더 커질 겁니다. 하지만 그만큼 당신에게 요구하는 바도 훨씬 더 많아질 겁니다.] -p79

그 별 볼 일 없는 여자는 바로 나처럼 실즈 박사의 연구에 참여했다.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여자는 죽었다. -p362


스물 여덟 살의 '제시카'는 고향에서의 좋지 않은 기억으로 수년 전 집을 떠나 뉴욕에서 프리랜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가족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여동생 베키에게 특히나 헌신적이다. 학교 댄스파티를 준비하는 뉴욕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십대와 화려한 자선행사에 나가는 그들의 엄마가 주요 고객층이다. 여느 때처럼 메이크업을 하던 중 뉴욕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실즈 박사'가 주관하는 '윤리 및 도덕성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라는 두 번의 설문조사에 참여하면 500달러가 지급된다는 소식을 접한다. 항상 돈에 쪼들려 왔던 제시카는 경제적 도움을 받을거란 희망에 고객의 이름을 자신 것인냥 둘러대고 52번 피험자로 설문조사에 응한다.


설문조사와 관련해서는, 다른 사람과 해당 연구 내용을 발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비밀 유지 원칙을 둔다. 본능적으로 제일 처음 떠오른 답을 솔직하게 쓰고, 완벽하게 작성하기 전까지는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 없다. 해당 문제에 답을 입력하면 실즈 박사가 그녀의 답을 확인하고 반응한다. 이를테면, 외상성 뇌손상으로 성장이 멈춰버린 스물두 살 여동생 '베키'의 치료비를 내고 있는 상황에 "힘들겠군요."라는 메시지를 입력한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에 대해 이토록 많은 것을 궁금하게 여긴 사람이 없었으며,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비밀을 얘기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위안을 얻고 진정이 된다. 실즈 박사는 52번 피험자가 제시카가 아닌 것을 알게 된 직후에도 제시카의 매력적인 외모와 다른 피험자와는 다른 신선하고 여과되지 않은 답변에 흥미를 느끼면서 깊은 실험을 진행해 나간다. 이전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 질문자에게 직접적으로 말은 건 사람은 5번 피험자 외에 제시카가 유일하다. 그리고 드러난 5번 피험자의 자살, 진정 그녀의 죽음은 자살이 맞을까?


실즈 박사는, 윤리 및 도덕성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실생활 연구로 발전시킬 계획이라며 제시카에게 이상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특별한 선물과 대접을 받고, 아픈 마음까지 어루만져주고, 거액의 돈까지 받게 되니 제시카는 실즈 박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처음 바에서 만난 유부남을 유혹하고, 도덕성 연구에 참여했던 여성들에게 무료 메이크업을 지시받고, 미술관에서 특정 남성에게 접근한다. 그 과정에서 수치와 모욕을 경험하고,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그러나 박사의 지시사항들이 앞뒤 맥락없이 수상하다. 제시카에게 일어난 일련의 모든 일들을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지만, 박사와의 비밀 유지 원칙을 깨고 싶지 않다. 또다시 실즈 박사로부터 특정 미션을 지령받고, 이제 더이상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도덕성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실생활 연구로 발전시키겠다는 이 야심찬 실험이 제시카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젊은 여성만을 먹잇감으로 삼는 실즈 박사의 민낯, 박사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보인 실즈 박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던걸까? 무엇을 위해 이토록 감정적 소모와 막대한 돈을 소비했던 걸까?




실즈 박사는 처음부터 제시카와 자신의 닮은 점을 발견했다. 살아온 배경은 달라도 두사람 모두 그들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비극적 결말을 맺은 여동생을 두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둘의 의도나 마음가짐은 달랐다. 실즈 박사는 여동생의 죽음에 만족했으며, 제시카는 여동생의 뇌손상에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렸다.실즈 박사는 과거 20년 전 동생의 죽음, 5번 피험자의 죽음을 모두 자신의 물리적 참여가 아닌 윤리적 타락의 결과로 돌렸다. 실즈 박사와는 관계를 끝내고 싶어도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끝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멀리하는 낌새가 느껴지자마자 제시카는 직장에서 해고되고, 남자친구로부터 이별까지 통보받는다. 이 심리전은 처음부터 실즈 박사에게 유리한 게임으로 출발했다. 정직을 약속한 사람은 제시카이지 설문조사를 지시한 실즈 박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비밀을 캐내고 그 비밀을 칼처럼 휘둘러 절망감에 빠뜨리는 것이 실즈 박사의 목적이었다. 일축하자면, 이 모든 일이 병적인 집착과 미친 사랑 때문이다.

익명의 소녀, 그리어 헨드릭스, 세라 페카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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