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장의 용도
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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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야기 속 환상적 요소는 현실을 외면하게 하는 도피나, 그렇게 현실에서 한 발 벗어남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마주보게 하는 기능을 한다.

자개장의 용도는 얼핏 후자의 기능처럼 보이지만 약간 다르다. 현실에서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현실을 보게 하기보다는 환상이 오히려 현실에 더 깊이 들어가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이때 환상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힘을 얻기보다는 화자와 등장인물의 욕망을 표현하는 장치가 된다.

「자개장의 용도」에서 자개장을 열고 가고 싶은 곳을 떠올릴 때 돌아올 길을 생각하지 않을 때 더 멀리 갈수 있다는 믿음이나, 공연이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8시간을 걸어간 주술적인 희망(「구유로」)이 그렇다. 그래서 환상적 요소가 없음에도 화자의 욕망이 환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반대로 환상의 요소가 비현실성보다 현실에 더 잘 침투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작중 환상은 다양한 얼굴로 나타난다. 누군가의 애정 어린 욕망이 유령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수호자」), 꿈꾸던 미래가 미련처럼 꿈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천사들(가제)」). 「규칙의 세계」에서는 미신적인 규칙을 지키는 이방인과 그 규칙에 유연성을 부여하는 내부인이 만들어내는 연결이, 「강가」와 「나쁜 물」에서는 죄책감과 후회가 화자를 움직이게 만든다.

이렇게 환상은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유령, 죄책감, 후회와 같은 감정과 같이 밀려들어온다. 하지만 거기엔 긍정적인 희망도 아주 부정적인 절망도 없다. 그저 유령과 같이 존재하는 어떤 감정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에 선악도 옳고 그름도 없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환상의 힘을 직시하는 것, 이 환상들이 나의 어떤 감정에서 파생되었는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질문하는 것뿐이다. 「나쁜 물」에서 화자가 노랫소리들에 질문을 던졌을 때, 노랫소리의 소멸을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다음을 상상해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마주했을 때의 환상은 결코 소름끼치는 유령도, 내 소원을 이뤄주는 천사도 아닌 그저 또다른 나로 만나게 된다.

※도서제공
#자개장의용도 #함윤이첫소설집 #자개장의용도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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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삼사라 서 세트 - 전2권
J. 김보영 지음 / 디플롯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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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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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랑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사랑일까. 나를 꽉 끌어안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랑은.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알려준 것은 온도였다. 이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런 온도의 존재를 만나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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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네가 있던 곳이 우주여서 나는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네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숨 쉬는 모든 곳이 네 아래에 있었다. 나는 너를 보낼 때 끝까지 웃지 못하고 기어코 눈물을 터뜨린 순간을 후회했고, 우리의 시간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네 말을 생각하며 시계를 볼 때마다 너의 시간을 추측하는 습관이 생겼다. 우리가 정의 내리지 않고 묻어둔 관계에 대해 홀로 공식을 세워 풀어 내려가기를 반복했고 가끔은 네가 가까이 다가가는 그 블랙홀 속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우주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너는 그곳에서 내 생각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 혹시 너도 그곳에서 아직 풀지 못한 관계를 풀어보려고 하는지, 그 답이 나와 같은지 따위만을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과 물리적 거리가 결국 우리를 추억으로 남겨둘 거라는 네 말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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