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에서 본 기억과 학습
윤영화 지음 / 학지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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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저자가 연구하고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당시까지 연구된 최신의 뇌과학 관련 이론과 이를 바탕으로 한 학습 및 기억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큰 줄기로 나누면 첫째, 뇌과학에 대한 기초 이론, 둘째 뇌과학에서 말하는 기억의 매커니즘과 기억장애의 유형, 셋째 기억과 창의성에 관한 뇌과학적 접근론과 그 조언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뇌과학에 대한 기초 이론에서는 당시의 최신과학에서 말하는 뇌의 구조와 뇌의 각 부분이 수행하는 인지 및 기억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집니다. 뇌는 위치에 따라서는 수뇌, 후뇌, 중뇌, 간뇌, 종뇌로 나뉘며, 그 역할에 따라서 시상, 시상하부, 대뇌피질, 뇌량, 편도체, 해마 등으로 나뉩니다. 이 중 해마와 편도체, 그리고 대뇌피질이 우리의 인지와 기억기능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마는 우리의 의식적 기억능력을 담당하며 기억대상을 전체로 인식하여 기억으로 저장하는 기능을 합니다. 반면에 편도체는 무의식적 기억능력을 담당하고 공포기억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대뇌피질은 3mm 두께의 뉴런 세포체로 된 층이며, 우리의 복잡한 정신활동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감각과 지각 등 인지능력에 대한 부분과 운동과 기술, 사고력, 상상력, 언어능력 등이 모두 대뇌피질에서 작동합니다. 대뇌피질은 최신과학에서 말하길, 그 위치와 면적에 따라 담당하는 신체기관이나 감각기관이 다릅니다. 그 면적은 실제 신체면적에 비례하지 않으며, 예민한 정도에 비례합니다. 예를 들면 입술이나 엄지손가락 같은 기관은 대뇌피질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뇌피질이 존재하는 대뇌는 좌우반구로 나뉘어져 있으며, 뇌량은 이 두 영역을 물리적으로 연결하여 정보가 교환될 수 있도록 합니다.

기억의 매커니즘과 기억장애의 유형은 두 내용을 연계하여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억의 매커니즘, 뇌지도에서 담당하는 각 부분의 역할을 설명함과 동시에 그들이 손상을 입었을 때 나타나는 기억장애를 연계하여 설명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이해시킨다는 뜻입니다. 뇌를 구성하는 주된 신경세포인 뉴런을 통해 우리는 기억이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사고를 할수록 뉴런의 수상돌기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매 순간 뉴런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나뭇가지의 풍성함과 같이 쇠퇴하기도 하고 무성해지기도 합니다. 이들이 서로 엉켜 많은 시냅스를 형성하고 정보전달이 많아질수록 기억능력이 증대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뇌는 일반인보다 용량이 크거나 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그의 뇌에는 더 많은 뉴런이 관찰되었고, 그 수상돌기가 일반인보다 빽빽이 뻗어 있었다구요. 이를 보면 뉴런이 기억저장에 큰 관여를 하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기억은 저장되는 기간에 따라 장기기억과 단기기억으로 나뉘며, 인출 시스템에 따라 의식적인 기억과 무의식적인 기억으로 나뉩니다. 이 네 가지 기억의 유형을 이해하고, 그것들과 관여된 뇌의 각 부분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기억장애의 유형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뇌의 부분 중 해마는 의식적인 기억 및 장기기억에 관여합니다. 만일 해마가 손상되었다면 그 사람은 감각기관에서 들어온 인지정보들을 단기적으로는 기억할 수 있지만, 장기기억으로 넘겨 보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해마가 손상되기 이전까지의 장기기억은 보존되지만 그 이후 형성되는 경험 및 지각정보들은 장기적으로 기억할 수 없게 됩니다. 저자는 이런 유형의 기억장애를 기억상실증, 혹은 코르사코프 증후군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해마는 의식적 기억능력에도 관여하기 때문에 코르사코프 증후군 환자들은 새로 접한 정보들을 의식적으로 기억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기억들은 무의식 속에 저장될 수 있음이 실험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매번 만날 때마다 새롭게 자기소개를 해야 했던 의사가 환자와 악수할 때 손에 압정을 넣어 악수하기 시작하자, 몇 차례 후에 환자가 악수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환자는 의사를 처음 본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그와 악수하면 안 된다는 무의식적 기억이 작동하여 의사와의 악수를 거부했습니다. 이러한 실험은 파블로프의 실험과 연관되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적 기억 중 운동기억 및 지각기억 등은 해마가 손상되어도 동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알츠하이머 병 역시 마찬가지의 내용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에는 해마의 손상뿐만이 아닌 복합적인 손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사망한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를 보면 대뇌피질의 뉴련이 25%까지 손상될 수 있으며 대뇌의 주름고랑이 점점 넓어지는 것을 관찰 할 수 있습니다. 해마 역시 마찬가지로 크게 손상된 것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기억장애를 예방하는 통제 가능한 변인은 스트레스의 조절입니다. 스트레스를 크게 겪게되면 부신피질 호르몬이 발생하고, 이 호르몬은 수용기에 붙어서 해마에 있는 뉴런이 포도당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떨어뜨립니다. 따라서 뉴런이 죽어간다고 합니다.

뇌의 부분 중 편도체는 정서기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적 기억과 비슷한 개념으로 쓰인 것 같습니다. 트라우마와 같은 정신적 문제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개에게 물렸거나 큰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라면, 그 사건을 인식적으로 기억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조건에 놓였을 때 불안과 긴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장기기억 속에서 사라진 기억의 경우에도 정서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면 같은 현상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 개에게 물린 경험 등이 이와 같습니다. 유아기 기억상실에 의해 당시의 경험이 전혀 기억나지 않더라도 정서적 기억에 남아있는 당시의 경험이 당사자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이러한 무의식적 기억에 관여하는 기관이 편도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따라서 유아기 기억상실 역시 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뇌과학자들은 편도체와 해마의 성숙속도 차이로 설명합니다. 해마는 완전히 성숙하는 데에 4년 정도가 걸리지만 편도체는 3년보다 빨리 완숙합니다. 이에 따라 아주 어릴 적의 기억들은 해마가 성숙하지 못해 장기기억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도체의 성숙에 따라 유아기의 정서적인 기억들은 무의식적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정서적 기억 외에, 어떤 경험 당시의 정서적 상황이 기억능력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났던 당시의 상황이라던지, 국가적 재해상황을 뉴스로 보던 순간의 기억같은 것들은 아주 쉽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이러한 기억능력은 당시 분비된 아드레날린 등의 호르몬이 기억능력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실험을 통해 관련 내용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외에 다양한 기억장애에 대한 설명이 충분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대뇌반구에 이상이 생긴 한 피실험자는 매우 특징적인 것들 외에 다른 사물들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책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등장한 사례입니다. 해당 피실험자는 면담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내의 머리를 모자처럼 자신의 머리 위에 얹으려 하였습니다.
단측무시현상은 어느 한쪽 대뇌반구의 두정엽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발생합니다. 일차체감각피질이 있는 두정엽이 손상될 경우, 해당 환자는 시각, 청각, 촉각능력에 전혀 이상이 없음에도 자신이 바라보는 시야의 왼쪽이나 오른쪽 한 면을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팬케익의 반쪽만 먹는다던지, 얼굴의 반쪽에만 화장을 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는 것입니다.
청각기억과 관련된 부분에 간질이 발생하면 환청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 환자는 시도때도 없이 들리는 한 라디오 방송에 괴로움을 호소하며 의사를 찾습니다. 그 환자가 노랫소리가 들린다고 말할 때에 청각피질과 청각연합피질 등이 위치한 측두엽에서 간질발작이 일으키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팔과 다리 등이 사라진 뒤에도 그곳의 통각이나 촉각, 가려움 등을 인식하는 ‘환상지 현상’은 해당 신체부위가 사라졌음에도 대뇌피질의 감각부위는 남아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이 책의 출판년도 기준 당시에서는 가설로서만 제안되었습니다.

인간의 뇌구조와 기억능력의 메커니즘을 설명한 뒤 손상 부위에 따른 기억장애 유형을 살펴본 저자는 본격적으로 학습과 기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먼저 학습 이전에 공포조건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파블로프의 무조건반사 실험을 응용한 것인데, 피실험자에게 특정 상황에서 고통이나 위협 등 나쁜 자극을 지속해서 주면 해당 상황에 다른 자극이 없음에도 피실험자가 공포를 느끼는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 공포조건화는 학습의 여러 방법에서 유연하게 응용됩니다. 공포조건화를 반대로 반복하면 트라우마의 치료가 됩니다. 무의식 속 정서기억을 통해 일정 상황에 정서적 불안상태를 보이는 환자가 있다면 공포조건화의 반대인 파블로프 조건화를 이용해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구적 조건화는 이를 응용한 상황으로, 학습과 지대한 연관이 있습니다. 쥐를 넣은 실험장에 버튼을 두고, 쥐가 그 버튼을 우연히 밟을 때마다 먹이를 준다면 쥐는 곧 먹이를 먹기 위해 버튼을 누르게 됩니다. 여기서 먹이는 강화라고 부르며, 쥐는 강화를 받기 위해 버튼을 누르는 행위를 학습하게 되었습니다. 동물 훈련의 대부분이 이러한 도구적 조건화를 이용해 이루어집니다. 적절한 보상(강화물)이 주어진다면 동물에게 일정 행동을 학습시킬 수 있습니다. 이를 발전시킨 행동조형이 또한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강아지가 점프를 하게 훈련하고 싶다면 강아지가 머리를 들었을 때 강화물을 주다가 두발을 들고 일어섰을 때 강화물을 주도록 바꿉니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강화물의 보상 시기를 높이면 결국 강아지는 강화물을 위해 점프하게 됩니다. 이를 행동조형이라고 합니다. 아이가 마트에서 울면 울수록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은 잘못된 행동조형에서 비롯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행동을 고치기 위해서는 잘못된 행동 자체를 아예 무시해야한다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실제 사례들을 통해 이를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강화물은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화물의 효과가 크려면 대상이 강력히 원하는 것 이여야 합니다. 그 기준은 ‘프리맥의 원리’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활동상황에 놓인 대상이 어떤 활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행동이 강화물이 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아이가 시금치와 아이스크림중에 자유도가 보장된 상황에서 아이스크림을 선택한다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은 강화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적인 강화물 외에도 관심과 칭찬 역시 지극히 강력한 강화물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이용하여 아이의 나쁜 버릇 고치기, 운동 능력 향상시키기, 공부습관 고치기, 자기통제를 이용하여 숙면하기 등을 설명합니다. 결국 큰 범위에서 중요한 것은 적절한 강화물과 바른 방향으로의 도구적 조건화입니다.

저자는 기억과 창의에 대해서도 짤막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기억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는 공감각적인 행위를 통한 기억법과 장소기억법 등을 말합니다. 공감각적인 기억법은 앞서 살핀 뇌과학과 연관되는 것입니다. 뇌과학에서는 시각적 정보와 청각적 정보, 촉각적 정보 등의 기억능력이 모두 구분되어 있으며 함께 작동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것을 기억하고자 할 때 그것을 말로 하고 글로 쓰고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등 다양한 감각을 동원한다면 기억효과는 증대됩니다. 장소기억법 역시 유사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는 굉장히 오래된 기억법으로,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져왔습니다. 이 오랜 역사는 역사 자체로서 그것의 효능을 증명합니다. 장소 기억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자신에게 익숙한 일정 장소를 상상합니다. 건물이나 공원, 도시 등 어느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의 면면을 머릿속으로 재현한 뒤에 그 곳곳에 자신이 기억하고자 하는 것들을 배치합니다. 나중에 그것을 떠올려야할 때에 우리는 그 장소에 걸어 들어가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창의는 역시 도구적 조건화로 간단히 설명됩니다. 다른 특별한 방법 없이, 대상들이 창의적인 행동, 즉 기존관념과는 다른 행동을 할 때에 강화물을 보상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창의력이 증대될 수 있다고 여러 실험과 증명들을 통해 저자는 설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 외에 뇌과학을 벗어난 다른 학습 방법들도 다양하게 설명합니다. 주의집중과 동기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기억하였다고 판단한 것보다 조금 더 노력하라고 말합니다. 또는 기억하고자 하는 단어들을 연결하여 이야기로 만드는 기억법과 그것들을 리듬과 가락을 붙여 외는 방법 등을 설명합니다. 구구단이나 알파벳송 등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2.

이 책은 많은 정보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교육 현장에서 바로 활용될 수 있는 정보들이 제게 귀중합니다. 교육현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정서장애, 인지행동장애 등의 유형을 보이는 학생들을 지도할 때에 그들의 문제행동을 개선시킬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이 책은 여러 사례와 증명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이야기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문제행동 발생시 단순히 그 행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폐성장애로 인해 쉬지 않고 같은 말을 타인에게 반복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문제행동을 보이는 학생에게 주어진 강화물이 주변인의 관심과 주의라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도구적 조건화가 이루어져 학생의 문제행동을 학습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행동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문제행동을 접하는 선생과 학생 모두 해당 문제행동에 관심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다양한 교육상황에서 학생들의 문제행동을 교정하고 학습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올바른 방향의 도구적 조건화와 행동조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물리적인 강화물을 쉽게 제공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가 밝혔듯 칭찬과 관심 역시 중요한 강화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학습지도에서 관심과 칭찬이라는 효과적인 강화물을 적절히 사용하여 이를 조율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은 학습효율을 원하는 학생들의 지도에 있어서 효과적인 기억법 및 학습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가 책의 후반부에서 밝힌 다양한 기억법, 즉 장소법과 리듬법, 이야기법 등을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암기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학생에게 지도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학습동기를 스스로에게 적절하게 부여하고 스스로 학습하는 방법을 소개한다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3.

이 책은 출간된 지 비교적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교육종사자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저자 스스로의 연구내용이 갖는 비중보다 근대 이후 활발히 진행된 뇌과학에 대한 연구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저자는 이것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고 구성하여 교육자에게 필요한 근현대의 뇌과학 연구성과를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저자의 설명방식에는 쉬운 어휘의 사용, 적절한 사례의 선정 등이 있습니다만, 제가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것은 저자 스스로의 경험에 대한 서술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자가 정서적 기억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 할 때에는 자신의 조카가 강아지에게 물렸던 이야기, 본인 스스로가 어릴 적 치과에서 겪었던 공포 등을 이야기합니다. 후각적 경험이 기억의 인출에 더 효과적이라는 설명에는 자신의 친구가 익숙한 향수 때문에 헤어진 옛 남자친구와 재결합한 이야기를 덧붙여 들려줍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설득의 유효성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지루할 수 있는 전문서적에 낭만적 활기를 넣어줍니다. 교육현장에 있는 등 관련직무를 수행하거나 해당 학문의 연구자, 전공자 등 외에 다른 이들이 읽어도 무리 없이 읽힐 수 있는 이유이자 이 책의 장점입니다.
다만 책의 차례가 종종 뒤얽혀있거나 내용이 다수 중복된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며 많은 부분을 재구성하였습니다. 책의 큰 줄기를 나눈 것이나, 그 순서의 배치 등이 그랬습니다. 대부분의 책은 목차를 보면 대충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이를 설명합니다. 내용 역시 다수 중복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쉬운 부분입니다.
다만 큰 줄기 내에서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교양서적의 느낌으로 좋게 읽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증보판이 나와서 읽을 수 있게 된다면 기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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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전집 1 (양장) - 주홍색 연구 셜록 홈즈 시리즈 1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시드니 파젯 그림 / 황금가지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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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나, 몇주가 지난 것 같은 흐릿한 밤에 피곤한 몸을 뉘이고 읽을 책을 뒤적였다. 다른 책에 인용되었던 2장의 도입부가 인상적이여서 사뒀던 책인 ‘주홍색 연구‘가 손에 들어왔다. 피곤하고 몸도 좋지 않아 읽기 쉬운 책을 고른다는게 그만 그런 책을 골랐던 것이다. 읽기 쉬운 책과 몰입되는 책은 전혀 다른데, 이 책은 후자에 속했다. 나는 누운 자리에서 켜놓은 스탠드의 좁은 불빛에 의존한 채 새벽을 넘겨 이 책을 모두 읽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에 대해 내가 느낀 인상은,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탐정물의 클래식 정도랄까? 그 이상의 생각은 없었던 데다가 추리물에 열광하던 10대가 지나간 이후에는 그런 장르에 대해서도 딱히 매력을 느끼지 않고 있어서 책을 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2차 창작물인 영화나 드라마 역시 한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내가 가진 그에 대한 인상은 다분히 2차적이고 편집된 무언가에 의한 것이었을 테다.

그런 내가 백년도 넘게 읽히고 있는 이 시리즈물에 관심을 갖고 그 첫번째 권을 산 것은 온전히 김연수의 탓이다. 그의 ‘소설가의 일‘이라는 책에 등장한 주홍색 연구는 인물의 동기를 설명할 때 사용된 강렬한 화면전환의 예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에 짧게 소개된 그 단락만으로 이 책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이 책에는 전설적인 그 셜록홈즈가 등장하며, 그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문장들의 섬세한 조탁과 세계에 대한 탁월한 통찰,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에 대한 (이제는 고전이 된)파격적인 구성이 있다. 무엇보다 셜록 홈즈의 요구와는 반대로 왓슨의 눈으로 쓰여진 이 책에는 추리물에서 등장할 수 있는 스토리중 아마 가장 낭만적이고 강렬한 분노가 쓰여져있다.

사건의 발단과 전개, 결말에 대한 이야기인 1장과 이야기의 프리퀄과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과 2장 모두 매력적이다. 1장에서 셜록 홈즈라는 기괴한 인물을 통해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이 숨가쁜 호흡으로 흥미롭게 전진하며, 2장은 인물의 그 무겁고 강렬한, 그러니까 선홍빛의 동기를 설명하기 위한 서사시다. 영국에서의 사건들이 어리둥절하게 마무리되고, 그것들의 모든 전말을 관통하는 이야기로 카메라가 전환될 때의 그 강렬한 이미지는 2장의 첫번째 문단에 등장한다. 그 2장까지 읽고나면 이 두 개의 이야기들은 완벽하게 하나로 묶여지며, 셜록 홈즈의 이야기에 대한 신화의 새로운 신도로서 그 다음 권을 읽기를 간절히 바라는 내가 발견된다.

그러니까 이야기와 연출과 구성과 캐릭터 모두에 흠뻑 빠져들어 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고, 아주 탁월하고 매력적인 이 이야기를 계속 읽을 거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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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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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출판사들로 흩어져있던 김연수의 소설들이 문학동네의 디자인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읽었지만 갖고있지 않았던 책들을 다시 사기 시작했는데, 사고 나니 또 읽을 수밖에. 더군다나 ‘밤은 노래한다‘는 읽었을 때에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책인데다가 지금 떠올려봐도 줄거리조차 기억나지 않으니 더더욱 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은 민생단 사건, 혹은 반민생단 투쟁 사건에 대해 다룬 소설이다. 동만주 지방, 그러니까 지금의 연변 지방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민생단이라는 친일 성격의 민족주의 단체와 연결되어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의심받으며 파멸의 지경에 이르게 된 사건이 민생단 사건이다. 민생단으로 오해받은 인물들은 민생단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동료를 팔거나 없는 사실을 지어내기도 하였으며, 혹은 탈출하여 공산주의를 저버리거나 혁명가를 부르며 죽어갔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죽어나가던 이 역사적 사실의 잔해를 김연수는 아주 철저하게 추적하여 이 한권의 소설로 묶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박완서의 말마따나 실록처럼 읽힌다.

따라서 어려울 수 있다. 동만특위니, 만철이니, 동만청년총동맹이니 하는 단어들이 한페이지에도 무더기로 쏟아지는 이 소설을 정확히 이해하며 읽었다고 말하긴 힘들다. 어렴풋이 ‘아, 이 단체는 중국쪽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을 이르는 말이군, 아 이 동맹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띈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단체로군‘ 하는 식으로만 파악했으니, 나는 이 소설 속 이야기의 큰 줄기를 말그대로 맥락만 읽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연수는 이 소설 속에서도 낭만을 잃지 않는다. 그가 만일 실록을 썼더래도 나는 만족하며 읽었을만한 사람이지만, 이 이야기 역시 김연수식의 이야기 구성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들, 그리고 그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들이 등장하기에 나는 결국 두번째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주인공은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던 해에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은 소위 지식분자로, 일제니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들과는 꽤 먼 거리를 살아가는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가 만철 직원으로서 간도에 특파되어 간도임시파견대의 중대장인 나카지마와 교류하고, 그곳 용정에 체류하던 이정희라는 여성을 사랑하기 시작하며 그가 알던 안온한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가 표현했듯, 세상을 하늘 위에서 바라보며 찍어 그려낸 지도와 발로 걸어서 측량해 그려낸 지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이전까지는 하나의 세상만을 알았으나, 일련의 사건 후에 그가 알게된 것은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 그리고 그것들이 중첩되어 있는 이 세계의 본모습이었다.

‘... 그 충격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 말을 듣기 이전의 밝은 세계에서 내가 영원히 추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다음은 믿을 수 없는 일들로만 가득한 어둠의 세계, 나 자신도 신뢰할 수 없는 밤의 세계였다.‘

그리고 나락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결국 얻어낸 치유의 순간은 아름답다. 절망 이후 아편에 중독되어 더러운 아편굴을 전전하던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주인공은 결국 살아남아 세계를 등진 채 묵묵히 그야말로 살아나간다. 그러한 그에게 새로운 치유의 순간은 찾아왔으니,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나는 지난 가을의 고통을 완전히 치유받았다. 지금 여기 내게 없는 것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이리라.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빛도 어둠도 아니면서 동시에 빛과 어둠인 세계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낸 자신의 세계 역시 혼돈의 세상 속에서 완전히 박살나버린다. 이때부터 이야기의 속도는 진전되고, 주인공과 얽힌 다른 인물들에 대해 숨겨져있던 이야기의 파편들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인물로 돌변한다. 낭만적이고, 현실적인 당대의 지식분자에서 혁명가를 부르는 시대의 단단한 전사로. 그 변환 이후에 반민생단 투쟁 사건이 스멀스멀 입을 벌리고 모두를 집어삼킨다.

이후의 이야기는 소설을 읽는 편이 좋을 것이다. 사실 줄거리를 좀 자세히 요약해서 적어두려고 했으나(나중에 또 까먹을까봐.. 김연수의 이야기는 플롯이 교묘하게, 그러나 아주 효과적으로 얽혀있어 한번 읽어서는 당최 기억해내기가 힘들다), 다시 읽어보니 서평을 쓴 한홍구님이 자신의 서평에 이 소설의 줄거리를 시간순서대로 친절하게 밝혀두었다. 기억이 안난다면 그 서평을 다시 읽어보려한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등장한 가장 좋아하는 대사.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 여옥이가 외발로 주인공을 만나러 달려온 후 내뱉는 대사다.

˝내사 모릅지. 지금 어떤 시절인지 내사 모릅지. 내시 아는 것이라곤 외발로라도 반나절이면 어랑촌에 갈 수 있다는 것뿐이겠으꼬마. 시끄럽습둥. 내사 얼굴이 전만 못합메?˝

이러한 세상에도 사랑이 존재한다. 아는 것이라곤 외발로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갈 수 있다는 것뿐이니, 이 시대가 어쩌한지 시끄럽게 떠들지 마시라, 그보다 내 얼굴 예전보다 못나졌느냐고 묻는 사랑이.


+ 모두를 사랑했다는 말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는 말.
++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이 온통 초록으로 물들 것처럼 세상이 푸르렀다는 문장.
+++ 그리고 사실은 이런 글을 더 잘쓰는 것 같은 김연수의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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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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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윷형과 차를 타고 동행할 일이 요즘 자주 있다. 차에서 우리는 술을 마셨을 때와 비슷한 대화들을 한다. 요즘 듣는 음악 이야기, 팟캐스트 이야기, 정치와 사회이야기, 혹은 드물게 읽고 있는 책이나 보고 있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나는 윷과 대화하는 게 꽤 좋다. 윷은 드물게 나와 키워드가 꽤 맞는 인물이기도 하고, 윷의 대화법은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게 하는 무언가가 있으므로.

아무튼 최근에 윷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서 윷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형, 나 요즘 그 전설의 소설을 다시 읽고 있어. (뭔데?) ‘노르웨이의 숲‘ 하하하.‘ 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나는 최근 기억조차 흐려져버린 그 전설의 소설을 다시 읽었다. 고등학생 시절이던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시작해서 나는 그의 소설들 중 상당수를 거의 읽었다. 읽으면서 재밌다는 생각은 했다만 어린날의 내가 그것들을 읽으며 딱히 사적인 감상같은 것에 젖어들진 않았다. 종종 인물들의 특수성에 공감을 못해서 거북해하기도 한 것 같다. 그럼에도 그 (길고 긴)책들을 꾸준히 읽어온 이유는 뭘까. 다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이상한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어온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윷에게 덧붙였다. ‘이 책, 완전 사적인 소설인 것 같아.‘

2.
나는 내 이전 세대에게 일종의 동경과 선망의 감정을 갖고 있다. 70-8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의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라던지, 더 이전 세대의 격렬한 시대의 이야기들을 들으면 가슴이 뛰곤 한다.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선 세계는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침묵하고, 무언가를 저주하고, 서로를 혐오한다. 거대담론이란 없고 국지적인 갈등만이 도처에 전시되어 있다. 나는 대학생이란 마르크스를 읽고 독재에 맞서며 지하에서 운동하는 인간들이라 여겼던 옛 세대가 솔직하게 말하면 멋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이 참 어리고 둥그런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역시 종종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그런 내게도 ‘노르웨이의 숲‘에서 등장하는 나가사와와 같은 인간과 관계했던 적이 있다. 1여년의 휴학 끝에 군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시 학교로 복학한 나와 약 3개월간 같은 방을 쓰게된 그 선배는, 좁은 틀 안에 갇혀있던 내 인간관계에서 독보적으로 특이한 인간이었다. 짐을 싸들고 그 선배가 혼자 살고있던 이인실에 휑덩그레 놓여져있던 기억이 난다.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그 선배는 부재중이었지만, 그 선배의 책장만 훑어봐도 이상한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고 직감했던 느낌이 선명하다. 그 선배의 책장에는 마르크스와 자본론과 혁명에 관한 책들과 자본주의에 대해 힐난하는 책들이 가득했다. 곧 돌아온 그 선배는 곧 내 인생의 한 부분을 점령했다. 대학생들이란 온통 술이나 마시고 학점을 관리하고 취업에만 매달리는 인간들이란 내 생각이 바뀌었던 시점이다.

나는 그 선배를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웠고, 20세기의 시대적 격랑과 거대담론의 붕괴, 자본주의의 오류에 대해 들었다. 주로 술을 마시며 작은 2인실에서 떠들었던 그 이야기들은 지금에는 추억으로 머릿속 어딘가에 부유한다. 지금이야 어렴풋이라도 그 선배의 이야기들을 구체화해서 이해할 수 있다만, 당시 내게 그 선배가 떠드는 이야기들은 이해할수도, 동의할수도 없는 헛소리 비슷한 어려운 이야기들로 생각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선배와 나는 달랐다. 선배는 사회과학서적 외의 다른 책들은 전부 쓰레기, 그중에서도 소설이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이었고 나는 소설 외의 다른 책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선배는 늘상 여자친구가 세명 이상이었고, 종종 그들간의 관계는 공공연하기도 했으며, 그 여자친구들 외에도 함께 몸을 섞는 여자들은 언제나 있었다. 술취한 선배는 어디선가 전화통화를 하고 오면 주변 방을 돌아다니며 콘돔을 찾곤 했다. 나는 첫 연애에 실패하고 방황하던 상황이었으며, 낯선 이성과의 잠자리나 성을 구매하는 것들, 이중연애 따위를 혐오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하고싶진 않아하던 인간이었다. 또한 선배는 언제나 명료하고 정확한 어휘로 구체적인 문장들을 만들어 자신을 표현하는 인간이었다. 그 선배의 구어체에는 묘하게 문어체에 등장할 듯한 어휘들이 쓰였다. 그는 ‘예컨대‘라던지, ‘이를테면‘같은 접속사를 많이 사용했다. 학술적인 어휘들이 너무 많아 전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고 했지만 사실 열에 둘정도는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우리는 곧 친해졌다. 술을 좋아한다는 것,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다녔다는 점. 그와 나는 기숙사에서 매일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떠들었고, 종종 방에서 내가 기타를 치면 선배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방구석 모임이 노상에서까지 이어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음주가무를 지켜보곤 했다. 박수를 받고, 박카스 따위를 받자 우리는 수시로 밖에 나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둘이서 머리를 질끈 묶고 같이 우산을 쓰고 술을 마시러 나간 밤, 그 다음날에는 서로 여자친구가 생겼더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지금 그 선배가 어찌 사는지 모른다. 그 선배는 아주 이상한 종류의 사람이었지만, 내게는 조금 특별한 관계였던 점을 인정한다.

3.
소설 속에는 크게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나‘인 ‘와타나베‘, 나의 죽어버린 친구의 여자친구인 ‘나오코‘, 나오코의 요양원 친구인 ‘레이코 씨‘, 나의 선배인 ‘나가사와‘, 그리고 마지막에 와타나베가 찾게되는 인물인 ‘미도리‘까지. 각개의 인물들이 소설을 읽은지 얼마 안되는 지금, 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려진다. 나는 그 인물들에서 내 삶을 찾을 수 있다. 2번과 같이 내게 있었던 일들과 나와 관계했던 사람들의 생각들을 이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음악들과 사소한 소품들, 그들의 대사들에서도 어떤 우연의 일치를 발견할 수 있다. 빌 에반스의 왈츠포데비, 비틀즈의 음악들, ‘왜지?‘라는 대사와 나오코와 미도리의 미묘한 매력갈등까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소설 속 첫 장면은 독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와타나베가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곡을 들으며 두통에 휩싸인다. 곧 음악이 빌리조엘로 바뀌며 안정을 찾는 장면이다. 나는 제천음악영화제를 찾았던 어느해에 먼지쌓인 레코드판을 파는 상점에서 꽤 좋아보이는 판을 두장 샀다. 그것이 바로 비틀즈의 노래들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레코드와 빌리조엘의 베스트 앨범이었다. 혹은, 나는 왈츠포데비라는 빌에반스트리오의 앨범을 2009년의 앨범으로 기억한다. 그 앨범을 들으며 진로포도주와 커피를 몇리터는 마셨다. 그 밤들에 나는 행복하기도했고 절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너무나 사적인 소설로 여긴 것은, B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 소설을 읽으며 그녀의 수 많은 행동과 말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녀의 사소한 말투와, 이상한 행동과, 종종 내게 물었던 ‘너는 미도리같은 여자가 좋아, 나오코같은 여자가 좋아?‘따위의 질문들과, 내게 요청했던 연주의 목록들(Michelle이나 Norwegian Wood같은)을 떠올려본다. 어렸을적 그녀를 지배했던 것들이 이 소설 속에 있었음을 이해한다. 그녀는 마치 미도리와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생각하게하는 이 소설을 읽기가 그래서 버거웠다. 괴로웠다.

4.
하지만 그렇게 사적인 소설에도 다시 읽는 기쁨은 있었다. 내가 거의 기억하지 못했던 문장들을 다시 읽는 동안 하루키에 대해 다시 감탄하게 됐다. 사실 하루키라는 이름은 이제 한국에서는 거의 허세와 동일시되는 이름으로 여겨지기도 하지 않는가. ‘나는 하루키를 좋아해요‘라는 문장은 누군가에게는 인간관계에서의 필터와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문장은 이제 마치 (하루키식으로 표현하면)‘나는 매일 마스터베이션을 해요‘와 같이 부끄럽고 말하기 힘든 문장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왜 하루키가 그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나는 누차 이야기했듯,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의 뒤틀린 환상세계도 좋고, 이원론적 세계의 기묘한 이야기도 좋다. 매번 같은 이미지로 소모되는 듯한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매번 반하며, 그의 길고긴 소설들을 읽으며 흥미와 즐거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좀 다르다고나 할까. 단순한 문학적 흥미를 넘어, 문장들의 아름다움을 넘어 이 소설에만 존재하는 또다른 이면의 이야기들에 나는 새삼 다시 풍덩 흡수되어버렸다. 사실 ‘상실의 시대‘로 더 유명했던 이 소설의 또다른 이름은 나름대로 긍정할 수 있다. 주인공을 비롯해 주변을 굴러가게 하는 인물들은 몽땅 제대로된 인간이 없다.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겪은 최초의 상실에서부터 시작된 뒤틀린 세계는 한번 돌아선 이후 그들을 계속해서 다른 장소로 끌어당긴다. 나오코의 친언니와 기즈키와 나오코 자신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역사는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내게 없는 세계를 간직한, 그러니까 스스로 죽음을 내면에 키워가는 종류의 인간들이 이 소설 속에는 도처에 널려있다. 장례식을 간병보다 간단히 여기는 미도리 역시 마찬가지. 그런 인간들 사이에 와타나베는 끝없는 상실을 경험할 뿐이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지극히 사적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이 소설은 이렇게나 길고 아름답게 그린다. 그러므로 나는 이 소설의 11장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다. 혹은 가장 슬프다고 느낀다. 그 모든 상실에도 처연했던, 혹은 내면의 방들 중 일부에 마치 정전이 있었듯이 고요하게 무언가를 픽픽 죽여나갔던 인물이 자신의 가장 큰 존재를 상실했을 때에 일으키는 방황과 치유가 11장의 주된 이야기다. 나는 돌발적으로, 그리고 아주 강렬하고 빠르게 진행해나가는 이 장의 첫 시작과 초반의 이야기에 쉽게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 불타오른 강렬한 분노와 차갑게 서리내린 세계의 종말을 하루키는 너무나 사적으로 써내려갔다. 앞에 앉은 사내가 자신의 상실을 이야기할 때에 그의 목을 조르고 싶어했던 와타나베의 허무를 이해한다. 삶은 그와같이 불성실하며, 불확정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무엇들로 가득하다. 진창을 걸어나갈뿐이라고 했던 와타나베의 말에 온전히 동의한다.

5.
나는, 예전에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로지 기억하는 것이라곤 달빛 아래에서 옷을 벗은 나오코를 묘사했던 대목 뿐이랄까. 내가 어릴적 세상은 둥그렇고 부드러운 무언가였다. 나역시 가정사 속에서 인생의 충격이 몇 있었지만, 절망의 언저리에도 가보지못한 순진무구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이 뒤틀린 인간들을 이해하기엔 십대의 나는 너무도 경험치가 적었다.

지금에서야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세계가 이따위로 생겨먹었다는 사실에 동감할 수 있다. 사람들의 상실과, 병적인 고통과, 영원한 격리같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죽음과 죽음을 안고 사는 종류의 인간들까지도. 그래서 지금 다시 읽은 이 소설을 나는 이제 제대로 기억할 것 같다. 새로운 디자인으로 나온 이 책을 기꺼이 구매한 누나에게 고마움을.


+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레이코 씨와 와타나베가 함께 나오코의 특별한 장례를 치뤄주는 부분. 그들이 음악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한곡 한곡 추모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나올 뻔했다.
++ 제일 좋아하는 대사는 미도리의 이 대사.
˝재미있었어. 다음에 또 보러 가자.˝ 미도리가 말했다.
˝몇 번을 봐도 똑같은 것밖에 안해.˝
˝어쩔 수 없잖아. 우리도 늘 똑같은 것밖에 안 하는데.˝
듣고 보니 과연 그랬다.
+++ 사실 예전엔 나오코같은 인물에 더 끌렸다. 지금은 미도리가 더 좋다. 자신과 타인에게 솔직하고, 타인의 시선에 거리낌이 없는 매력적인 인물. 당돌하고 자신의 리비도에 솔직하며, 연약하고 강인한 그녀의 모든 부분이 좋다.
++++ 조금 거슬린 부분이 있다면, 모든 캐릭터들이 너무도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것. 어찌된 인간들이 모두 자신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원인과 모순과 장단점을 전부 꿰뚫고있다. 오로지 화자인 와타나베만이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 나는 와타나베와 같은 인간이라고 느꼈다. 내 주변에 이렇게도 자신의 인생에 현명한 인간들을 나는 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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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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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있어서 시내에 갔는데, 매번 볼일이 있던 장소에서 주차비를 해결해주던 CGV에 주차를 했는데, CGV 주차시스템이 개편되어서 이제는 주차권을 발급해주질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그렇다면 CGV건물 내에 있는 서점에서 책이라도 사야겠다 싶어서 책을 두권 샀다. 하나는 소설리스트에서 본 듯한 ‘너무 시끄러운 고독‘,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책, ‘쇼코의 미소‘. 정작 사고보니 주차비는 30분밖에 해결이 되질 않았지만, 그리고 나는 36분을 주차해서 초과 6분에 대해 30분치의 주차료를 지불해야했지만, 어쨌건 책을 읽고난 후에는 그닥 후회되질 않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쇼코의 미소는 총 7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제목과 같은 이름의 중편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그와 유사한 서사를 갖는 다른 중단편 6개가 연이어 이어진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거만하게도 ‘꽤 평이하군‘ 이었다. 음, 그러니까, 끝까지 읽는다면 이 말에 동의할 사람이 좀 있기도 할텐데, 결국 이 책에 해설을 덧붙여준 서영채 선생의 말처럼, 이것은 이 책에 던지는 혹평이 아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소설들은 거의 모두가 평면적인 서사구조를 갖고 있고,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이 너무 직설적이며, 결국엔 어떤 다른 감상을 꺼내기도 전에 책을 읽고난 뒤에는 아, 좋았다- 정도밖에 할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평면적인 이야기 속에는 직진하는 진정성과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고, 직설적인 감정묘사 뒤에는 다분히 감각적이고 읽는이의 속을 깊숙히 찌르는 아름다운 묘사들이 숨겨져 있다. 감각적이라는 표현은, 이른바 예술계에서 일컫는 ‘감각있다‘같은 실체없는, 그저 세련되었다 정도의 의미를 포함하는 어휘가 아니라, 문장마다 감각, 그러니까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등의 구체적인 현실세계의 감각들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문장들이 이 책의 직설적이고 평면적인 이야기들을 아름답다고 느끼며 읽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종내에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나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결국엔 서로 소통하게 되는 이야기의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한지와 영주의 경우에는 나 역시 끝내 그들의 자연재해와도 같은 단절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블로그 이웃인)어느분의 서평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영주의 단순함, 그러니까 한지의 섬세와 예민과 반대되는 영주의 다른 속성이 그들을 어떤 단절의 고랑 속으로 내몰았을 것이라는 그분의 이야기에 나중에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들은 저마다 자신의 상실과 세계의 붕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읽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다. 각자의 세계에서 읽힐만한 이야기들이 그 세계에서 읽힐 뿐이다. 개인적으로 내 세계에서 읽히는 이야기들은, 굳이 이야기하자면, (김연수의 표현에서)플롯이 이끄는 이야기보다는 인물의 내면이 이끄는 이야기들이다. 이름을 거론하자면 나는 기욤 뮈소가 싫고 더글러스 케네디의 ‘빅픽쳐‘같은 작품이 싫다. 딱히 더 읽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최은영의 이 힘있고 감각적인 문장들로 구성된 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참 좋았다. 사실 김연수의 추천사 때문에 책을 고르긴 했지만, 앞으로도 최은영의 이야기들을 찾아 읽고 응원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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