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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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윷형과 차를 타고 동행할 일이 요즘 자주 있다. 차에서 우리는 술을 마셨을 때와 비슷한 대화들을 한다. 요즘 듣는 음악 이야기, 팟캐스트 이야기, 정치와 사회이야기, 혹은 드물게 읽고 있는 책이나 보고 있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나는 윷과 대화하는 게 꽤 좋다. 윷은 드물게 나와 키워드가 꽤 맞는 인물이기도 하고, 윷의 대화법은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게 하는 무언가가 있으므로.

아무튼 최근에 윷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서 윷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형, 나 요즘 그 전설의 소설을 다시 읽고 있어. (뭔데?) ‘노르웨이의 숲‘ 하하하.‘ 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나는 최근 기억조차 흐려져버린 그 전설의 소설을 다시 읽었다. 고등학생 시절이던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시작해서 나는 그의 소설들 중 상당수를 거의 읽었다. 읽으면서 재밌다는 생각은 했다만 어린날의 내가 그것들을 읽으며 딱히 사적인 감상같은 것에 젖어들진 않았다. 종종 인물들의 특수성에 공감을 못해서 거북해하기도 한 것 같다. 그럼에도 그 (길고 긴)책들을 꾸준히 읽어온 이유는 뭘까. 다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이상한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어온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윷에게 덧붙였다. ‘이 책, 완전 사적인 소설인 것 같아.‘

2.
나는 내 이전 세대에게 일종의 동경과 선망의 감정을 갖고 있다. 70-8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의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라던지, 더 이전 세대의 격렬한 시대의 이야기들을 들으면 가슴이 뛰곤 한다.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선 세계는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침묵하고, 무언가를 저주하고, 서로를 혐오한다. 거대담론이란 없고 국지적인 갈등만이 도처에 전시되어 있다. 나는 대학생이란 마르크스를 읽고 독재에 맞서며 지하에서 운동하는 인간들이라 여겼던 옛 세대가 솔직하게 말하면 멋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이 참 어리고 둥그런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역시 종종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그런 내게도 ‘노르웨이의 숲‘에서 등장하는 나가사와와 같은 인간과 관계했던 적이 있다. 1여년의 휴학 끝에 군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시 학교로 복학한 나와 약 3개월간 같은 방을 쓰게된 그 선배는, 좁은 틀 안에 갇혀있던 내 인간관계에서 독보적으로 특이한 인간이었다. 짐을 싸들고 그 선배가 혼자 살고있던 이인실에 휑덩그레 놓여져있던 기억이 난다.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그 선배는 부재중이었지만, 그 선배의 책장만 훑어봐도 이상한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고 직감했던 느낌이 선명하다. 그 선배의 책장에는 마르크스와 자본론과 혁명에 관한 책들과 자본주의에 대해 힐난하는 책들이 가득했다. 곧 돌아온 그 선배는 곧 내 인생의 한 부분을 점령했다. 대학생들이란 온통 술이나 마시고 학점을 관리하고 취업에만 매달리는 인간들이란 내 생각이 바뀌었던 시점이다.

나는 그 선배를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웠고, 20세기의 시대적 격랑과 거대담론의 붕괴, 자본주의의 오류에 대해 들었다. 주로 술을 마시며 작은 2인실에서 떠들었던 그 이야기들은 지금에는 추억으로 머릿속 어딘가에 부유한다. 지금이야 어렴풋이라도 그 선배의 이야기들을 구체화해서 이해할 수 있다만, 당시 내게 그 선배가 떠드는 이야기들은 이해할수도, 동의할수도 없는 헛소리 비슷한 어려운 이야기들로 생각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선배와 나는 달랐다. 선배는 사회과학서적 외의 다른 책들은 전부 쓰레기, 그중에서도 소설이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이었고 나는 소설 외의 다른 책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선배는 늘상 여자친구가 세명 이상이었고, 종종 그들간의 관계는 공공연하기도 했으며, 그 여자친구들 외에도 함께 몸을 섞는 여자들은 언제나 있었다. 술취한 선배는 어디선가 전화통화를 하고 오면 주변 방을 돌아다니며 콘돔을 찾곤 했다. 나는 첫 연애에 실패하고 방황하던 상황이었으며, 낯선 이성과의 잠자리나 성을 구매하는 것들, 이중연애 따위를 혐오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하고싶진 않아하던 인간이었다. 또한 선배는 언제나 명료하고 정확한 어휘로 구체적인 문장들을 만들어 자신을 표현하는 인간이었다. 그 선배의 구어체에는 묘하게 문어체에 등장할 듯한 어휘들이 쓰였다. 그는 ‘예컨대‘라던지, ‘이를테면‘같은 접속사를 많이 사용했다. 학술적인 어휘들이 너무 많아 전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고 했지만 사실 열에 둘정도는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우리는 곧 친해졌다. 술을 좋아한다는 것,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다녔다는 점. 그와 나는 기숙사에서 매일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떠들었고, 종종 방에서 내가 기타를 치면 선배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방구석 모임이 노상에서까지 이어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음주가무를 지켜보곤 했다. 박수를 받고, 박카스 따위를 받자 우리는 수시로 밖에 나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둘이서 머리를 질끈 묶고 같이 우산을 쓰고 술을 마시러 나간 밤, 그 다음날에는 서로 여자친구가 생겼더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지금 그 선배가 어찌 사는지 모른다. 그 선배는 아주 이상한 종류의 사람이었지만, 내게는 조금 특별한 관계였던 점을 인정한다.

3.
소설 속에는 크게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나‘인 ‘와타나베‘, 나의 죽어버린 친구의 여자친구인 ‘나오코‘, 나오코의 요양원 친구인 ‘레이코 씨‘, 나의 선배인 ‘나가사와‘, 그리고 마지막에 와타나베가 찾게되는 인물인 ‘미도리‘까지. 각개의 인물들이 소설을 읽은지 얼마 안되는 지금, 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려진다. 나는 그 인물들에서 내 삶을 찾을 수 있다. 2번과 같이 내게 있었던 일들과 나와 관계했던 사람들의 생각들을 이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음악들과 사소한 소품들, 그들의 대사들에서도 어떤 우연의 일치를 발견할 수 있다. 빌 에반스의 왈츠포데비, 비틀즈의 음악들, ‘왜지?‘라는 대사와 나오코와 미도리의 미묘한 매력갈등까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소설 속 첫 장면은 독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와타나베가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곡을 들으며 두통에 휩싸인다. 곧 음악이 빌리조엘로 바뀌며 안정을 찾는 장면이다. 나는 제천음악영화제를 찾았던 어느해에 먼지쌓인 레코드판을 파는 상점에서 꽤 좋아보이는 판을 두장 샀다. 그것이 바로 비틀즈의 노래들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레코드와 빌리조엘의 베스트 앨범이었다. 혹은, 나는 왈츠포데비라는 빌에반스트리오의 앨범을 2009년의 앨범으로 기억한다. 그 앨범을 들으며 진로포도주와 커피를 몇리터는 마셨다. 그 밤들에 나는 행복하기도했고 절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너무나 사적인 소설로 여긴 것은, B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 소설을 읽으며 그녀의 수 많은 행동과 말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녀의 사소한 말투와, 이상한 행동과, 종종 내게 물었던 ‘너는 미도리같은 여자가 좋아, 나오코같은 여자가 좋아?‘따위의 질문들과, 내게 요청했던 연주의 목록들(Michelle이나 Norwegian Wood같은)을 떠올려본다. 어렸을적 그녀를 지배했던 것들이 이 소설 속에 있었음을 이해한다. 그녀는 마치 미도리와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생각하게하는 이 소설을 읽기가 그래서 버거웠다. 괴로웠다.

4.
하지만 그렇게 사적인 소설에도 다시 읽는 기쁨은 있었다. 내가 거의 기억하지 못했던 문장들을 다시 읽는 동안 하루키에 대해 다시 감탄하게 됐다. 사실 하루키라는 이름은 이제 한국에서는 거의 허세와 동일시되는 이름으로 여겨지기도 하지 않는가. ‘나는 하루키를 좋아해요‘라는 문장은 누군가에게는 인간관계에서의 필터와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문장은 이제 마치 (하루키식으로 표현하면)‘나는 매일 마스터베이션을 해요‘와 같이 부끄럽고 말하기 힘든 문장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왜 하루키가 그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나는 누차 이야기했듯,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의 뒤틀린 환상세계도 좋고, 이원론적 세계의 기묘한 이야기도 좋다. 매번 같은 이미지로 소모되는 듯한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매번 반하며, 그의 길고긴 소설들을 읽으며 흥미와 즐거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좀 다르다고나 할까. 단순한 문학적 흥미를 넘어, 문장들의 아름다움을 넘어 이 소설에만 존재하는 또다른 이면의 이야기들에 나는 새삼 다시 풍덩 흡수되어버렸다. 사실 ‘상실의 시대‘로 더 유명했던 이 소설의 또다른 이름은 나름대로 긍정할 수 있다. 주인공을 비롯해 주변을 굴러가게 하는 인물들은 몽땅 제대로된 인간이 없다.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겪은 최초의 상실에서부터 시작된 뒤틀린 세계는 한번 돌아선 이후 그들을 계속해서 다른 장소로 끌어당긴다. 나오코의 친언니와 기즈키와 나오코 자신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역사는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내게 없는 세계를 간직한, 그러니까 스스로 죽음을 내면에 키워가는 종류의 인간들이 이 소설 속에는 도처에 널려있다. 장례식을 간병보다 간단히 여기는 미도리 역시 마찬가지. 그런 인간들 사이에 와타나베는 끝없는 상실을 경험할 뿐이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지극히 사적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이 소설은 이렇게나 길고 아름답게 그린다. 그러므로 나는 이 소설의 11장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다. 혹은 가장 슬프다고 느낀다. 그 모든 상실에도 처연했던, 혹은 내면의 방들 중 일부에 마치 정전이 있었듯이 고요하게 무언가를 픽픽 죽여나갔던 인물이 자신의 가장 큰 존재를 상실했을 때에 일으키는 방황과 치유가 11장의 주된 이야기다. 나는 돌발적으로, 그리고 아주 강렬하고 빠르게 진행해나가는 이 장의 첫 시작과 초반의 이야기에 쉽게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 불타오른 강렬한 분노와 차갑게 서리내린 세계의 종말을 하루키는 너무나 사적으로 써내려갔다. 앞에 앉은 사내가 자신의 상실을 이야기할 때에 그의 목을 조르고 싶어했던 와타나베의 허무를 이해한다. 삶은 그와같이 불성실하며, 불확정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무엇들로 가득하다. 진창을 걸어나갈뿐이라고 했던 와타나베의 말에 온전히 동의한다.

5.
나는, 예전에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로지 기억하는 것이라곤 달빛 아래에서 옷을 벗은 나오코를 묘사했던 대목 뿐이랄까. 내가 어릴적 세상은 둥그렇고 부드러운 무언가였다. 나역시 가정사 속에서 인생의 충격이 몇 있었지만, 절망의 언저리에도 가보지못한 순진무구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이 뒤틀린 인간들을 이해하기엔 십대의 나는 너무도 경험치가 적었다.

지금에서야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세계가 이따위로 생겨먹었다는 사실에 동감할 수 있다. 사람들의 상실과, 병적인 고통과, 영원한 격리같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죽음과 죽음을 안고 사는 종류의 인간들까지도. 그래서 지금 다시 읽은 이 소설을 나는 이제 제대로 기억할 것 같다. 새로운 디자인으로 나온 이 책을 기꺼이 구매한 누나에게 고마움을.


+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레이코 씨와 와타나베가 함께 나오코의 특별한 장례를 치뤄주는 부분. 그들이 음악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한곡 한곡 추모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나올 뻔했다.
++ 제일 좋아하는 대사는 미도리의 이 대사.
˝재미있었어. 다음에 또 보러 가자.˝ 미도리가 말했다.
˝몇 번을 봐도 똑같은 것밖에 안해.˝
˝어쩔 수 없잖아. 우리도 늘 똑같은 것밖에 안 하는데.˝
듣고 보니 과연 그랬다.
+++ 사실 예전엔 나오코같은 인물에 더 끌렸다. 지금은 미도리가 더 좋다. 자신과 타인에게 솔직하고, 타인의 시선에 거리낌이 없는 매력적인 인물. 당돌하고 자신의 리비도에 솔직하며, 연약하고 강인한 그녀의 모든 부분이 좋다.
++++ 조금 거슬린 부분이 있다면, 모든 캐릭터들이 너무도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것. 어찌된 인간들이 모두 자신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원인과 모순과 장단점을 전부 꿰뚫고있다. 오로지 화자인 와타나베만이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 나는 와타나베와 같은 인간이라고 느꼈다. 내 주변에 이렇게도 자신의 인생에 현명한 인간들을 나는 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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