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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 - 쇼펜하우어와 함께 이겨내는 삶의 고통
강산 지음 / 알토북스 / 2026년 5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스무 해 가까이 회사를 다녀 보면, 어느 순간 알게 되는 게 있어요. 사람이 바뀌어도, 부서가 바뀌어도, 갈등은 비슷한 얼굴로 다시 찾아온다는 사실이요. 한동안은 제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고, 또 한동안은 운이 없어서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게 정말 저 한 사람의 문제일까 하는 의심이 슬그머니 들기 시작했어요.
서평단으로 받은 강산 작가의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를 펼친 건 그런 마음이 머물러 있을 때였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도착한 표지를 처음 마주했을 때, 격자 안에 또박또박 놓인 제호와 ‘쇼펜하우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쇼펜하우어는 유튜브나 블로그에서 짧은 명언으로 자주 마주쳤던 이름이라, 그 단어가 표지에 또렷이 박혀 있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생기더라고요. 나이를 먹어 갈수록 마음 깊이 새기게 되는 문장들이 그분에게서 많이 왔다는 것도 떠올랐고요. 두께가 부담스럽지 않아서, 퇴근 후 짧은 시간을 모아 수월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점도 좋았습니다.

이 도서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겪는 피로가, 정말 나의 문제일까 하는 거예요. 저자는 그 답을 ‘구조’에서 찾습니다. 사무실은 협력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은 각자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무대에 가깝다는 거죠. 그 위에서 사람들은 상사·부하·동료·경쟁자라는 역할에 몰입하고, 본래의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갈등이 예외가 아니라 필연이라는 분석이, 묘하게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어요. 따뜻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정확한 설명이 더 큰 위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오랜만에 느꼈습니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자리는 ‘타인의 평가는 그 어떤 기준도 되지 않는다’는 챕터였어요. 회사에서 ‘세평(世評)’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겁게 작동하는지를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느껴 봤을 거예요. 공식 기록도 아닌데 인사이동이나 승진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그 흐릿한 평가요. 저자는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관계와 감정이 반영된 해석의 총합에 가깝다”고 짚어 줍니다. 어제의 지지자가 오늘의 비판자가 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는 문장 앞에서 잠시 멈췄어요. 회의실에서 누군가의 표정 하나에 마음이 흔들렸던 날들이, 사실은 그 동요 자체가 자연스러운 거였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사형수의 일화도 오래 남았어요. 사형 집행일 아침, 사제의 마지막 설교에는 무심했던 한 사람이 교수대에 오르며 군중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는 장면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끝내 놓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저자는 이렇게 정리해요. “이 사형수의 행동은 용기의 표현이라기보다, 인정 욕구가 만들어 낸 마지막 연출이다.” 평가에 휘둘리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결국 어딘가에서는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을 쥐고 있는 제 모습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2장의 ‘평균이 기준이 될 때 고독은 필연이 된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어요. 집단은 ‘다르다’는 신호를 보내는 사람을 중심으로 경계를 만들고, 그 사람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응집력을 강화한다는 분석이었습니다. 뛰어난 성과나 자기만의 잣대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균형을 깨뜨리는 변수로 취급된다는 문장은, 회사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부딪혀 본 풍경일 거예요. 그런데 저자가 곧이어 건네는 한 줄이 있습니다. “고독은 이들에게 외로움이 아니라, 소음이 제거된 상태에 가깝다.” 외로움과 고독이 같은 단어가 아니라는 걸, 이렇게 또렷하게 갈라 준 글은 오랜만이었어요. 외로움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상실이라면, 고독은 능동적으로 선택된 거리라는 정의도 함께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저자는 무게의 위치를 조용히 옮겨 갑니다. 오랜 시간 책임을 다해 왔는데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조직에서는 대체 가능한 인력처럼 느껴지고, 가정에서는 이미 역할을 다한 존재로 인식되는 순간이 온다고요. 그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시간을 살아왔는가?”에 저자는 섣부른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쇼펜하우어가 행복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 외부 조건이 아닌 ‘자아’ — 성품과 기질, 지적 역량 — 를 꼽았다는 점을 차분히 일러 줄 뿐이에요. 외부 조건은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내적 구성은 오래 지속되며 삶의 질을 더 깊게 규정한다는 설명 앞에서, 그동안 제 무게중심이 너무 바깥쪽으로 기울어 있었다는 걸 인정하게 됐어요.
에필로그의 한 문장은 저자가 건네고 싶었던 말을 한 줄로 모아 줍니다. “우리가 관계 속에 살아가는 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그러니 갈등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그 안에서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거예요. 저자도 자신이 성격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기준 하나가 생겼을 뿐이다”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잣대 하나가 생기는 일, 어쩌면 마흔 후반에 가장 필요한 변화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평단으로 이 도서를 받아 든 시점이 마침 조직 개편 이야기가 슬슬 들려오던 무렵이었어요. 누가 어디로 간다더라, 누구의 평가가 어떻다더라 하는 말들이 사무실 공기에 옅게 떠다닐 때, 한 권이 곁에 있어 줘서 다행이었습니다. 들려오는 말들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외부의 인식과 무관하게 제 속도를 유지해도 괜찮다는 것을, 서평을 쓰는 동안 조금씩 다시 익히게 됐어요.

5월 말이 되니 사무실 창밖으로 초록이 부쩍 짙어졌습니다. 퇴근길 햇살은 길어졌는데, 마음은 오히려 조용한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고 싶은 시기예요. 바깥의 시선에 오래 흔들려 왔다면, 어느 저녁 사무실에서 문득 ‘나는 대체 가능한 사람일 뿐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 멈춰 선 적이 있다면, 이 도서를 천천히 펼쳐 보셔도 좋겠어요. 위로의 말을 건네는 책은 아니지만, 정확한 설명이 어떤 위안보다 더 단단하게 곁을 지켜 준다는 걸 알려 주는 한 권이에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단단한 잣대로 마음에 자리 잡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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