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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 -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꾼 결정적 순간 45
시릴 아이돈 지음, 이순호 옮김 / 리더스북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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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떤 사정이야 있겠지만, 2010년 1월에 출판되어 1년이 채 지나지도 않은 시기에 품절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 책에 대해 리뷰를 쓴다는 것은 조금은 서글프고 아쉬운 일인 것 같다. 인류의 역사에 대해 연대기적인 접근으로 풀어나가는 이 책의 일면 평이한 진행은 오히려 저자의 압도적인 필력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차용해 조선의 역사를 설명하기도 하고 19세기 후반으로 넘어가면서는 서술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측면도 있지만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인류의 역사에 대해 능수능란한 진행으로 현란하게 나름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필력이 놀랍다. 지난한 인류의 발자취를 하나의 이야기책 처럼 읽으며 450여 페이지가 쉼 없이 넘어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세계사 전반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에 대한 욕구를 재점화 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독서 경험이었으며, 그래서 더욱 때 이른 품절 표시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에 나름의 이해를 바탕으로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부여해서 풀어나가는 저자의 교양에 호감과 질투가 교차하는 부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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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 - 중국의 잔혹성과 서구의 시선 동아시아와 그 너머 1
티모시 브룩 지음, 박소현 옮김 / 너머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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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우, <능지처참>이라는 책을 집어 들고 읽어나가기로 결정을 내렸을 때 작용하였을 일종의 내적인 요인을 따져보자면, 중국의 형벌 제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보다 논리적으로 접근해 보자는 학습적 열망보다는 일종의 본능적 호기심이 더 큰 동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소위 ‘타인의 고통’에 대한 호기심인 것으로 '천 번을 절개해서 죽이거나, 살을 저며서 죽인다'는 능지형에 대한 초현실적인 묘사들이 이를 더욱 동하게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책의 접근 방식은 신중하다 못해 다소 지루할 정도의 엄격한 진행을 보여준다.

제 1장에서는 청대의 혼란기를 틈타 악행을 저지른 왕 웨이친이라는 인물의 능지형을 묘사하고 추후 다루게 될 쟁점들에 대해 논의를 한 뒤, 2장에서는 명과 청 시기의 법령들을 살피면서 사형이라는 제도 내부에서의 능지형의 위치와 능지형을 집행하게 되는 세부 죄목들의 유교적인 측면들을 살핀다. 3장에서는 주로 능지형의 기원을 요나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해 보고 4장과 5장을 거치면서 각 시대별 법률집 속에서의 능지형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살펴본다. 특히 명나라 시절 홍무제가 능지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의 저서인 <어제대고>를 통해서 추적해 본 작업은 이 형벌이 국가 그 자체인 황제에게 가지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5장에서는 국가가 통제하고 처벌하는 대상인 민중들의 상상력 속에서 능지형이 어떤 위치를 점하게 되는지를 가상의 사후 지옥 순례기인 <옥력>이라는 기록물을 통해서 살펴본다. 능지형에 대한 서구적 왜곡이나 편견을 바로잡으려는 저자들의 강한 의지가 나름의 중립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함임을 이해하지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6장, ‘서구적 관념 속의 중국적 고문’에 이르면 같은 주제의 끝없는 변주 속에서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이러한 모든 텍스트를 압도하는 4장의 처형 사진이 들어있다. 모든 사진들은 저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나름의 정서를 유발하는 역할을 하기 마련이지만, 이 4장의 사진들은 일종의 상처,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종류의 이미지들이다. 이 사진들이 들어있는 장을 지하철에서 읽다가 주변 사람들 신경이 쓰여 그냥 넘겨버리기도 했고 주변의 내용들을 건너 띄고 다음 장으로 황급히 넘어가 버리곤 했다. 그리고는 슬쩍 다시 들여다보기도 여러 번. 중국의 처형의 역사에 문외한인 나에게 그 형벌의 전후 과정이나 역사적인 의미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 사진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즉시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나 야만성에 대한 사색으로 이어지기가 십상이었다. 이는 이 책 7장의 제목처럼 ‘능지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나 오해에 다름 아니겠지만 말이다. 서구적인 생활방식으로 살며 전근대를 탈피하도록 교육 받은 나에게 그 사진들의 이미지는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전후 사정을 따져보며 객관적으로 접근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4장의 사진은 아마도 청대 말기인, 1904년과 1905년에 푸주리에서 실행된 각기 다른 3처형 과정 사진 3장과 처형 이후 해체되어 시장 바닥에 전시된 신체를 담은 1장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흑백으로 처리된 사진들은 당시 청나라에 머물고 있던 외국 재원이나 외교관, 선교사들이 찍어서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장에 설치된 약 2.5m 높이의 장대에 머리가 결박된 사형수의 눈은 초점이 상실되었으며 어떤 감정 자체를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상태로 보인다. 능지형의 집행인은 신속한 손놀림으로 별 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절개를 실행하고 있다. 신체의 일부분은 이미 훼손되어 떨어져 나간 상태이며 이를 둘러싼 군중들의 얼굴은 다소간의 긴장과 불안감 등을 읽을 수 있을 뿐 거의 표정 없이 굳어 있는 상태이다. 사진의 모든 등장인물의 표정은 비어있고, 이 비어있음은 언제나 묘한 억측과 오해를 위한 적절한 자리를 제공한다.

사실, 그림이나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나 묘사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것은 거의 언제나 해설자 그 자신의 관점이나 그 자신의 시선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바라는 방향으로 주의를 이끌 뿐이다. 8장 전체를 할애하여 다루고 있는 조르주 바타유의 경우는, 편집자에 의해 왜곡되었을 그의 집필 의도에 대한 음모론적 접근을 배제한다면, 그 사진에서 종교적 엑스터시와 폭력적인 에로티즘의 연관성을 관찰한다. 어떤 백과사전은 ‘황홀한 기쁨이 표현된 얼굴’이라는 급진적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한 영국인 사업가는 죄수의 살점을 군중들에게 던지는 집행인을 보며 이곳은 아직도 중세적이라 한탄을 하고, 다른 영사관 관리는 사형수가 묶여있는 장대에 십자가의 이미지를 투사한 뒤, 희생자에게 구원을 위한 희생의 드라마적인 요소가 없음을 아쉬워한다. 서구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취하거나, 보기를 기대했던 부분들이 발현되지 않을 경우 이에 대해 심한 불만과 혐오감을 쏟아냈다.

저자들은 서구의 제의적인 처형과는 달리, 중국의 처형장은 일종의 교육의 장으로서 기능했음을 강조한다. 사형수의 신체는 아무런 드라마나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준엄한 법률이 실현되고 집행되는 장소로서 존재하였다. 신체적은 고통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집행전의 사형수는 아편에 취해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집행인은 빠른 손놀림으로 3회나 4회의 절개를 통해서 사형수의 목숨을 먼저 끊어놓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즉, 이는 고문의 성격도 아니었으며 종교적 의미의 고행도 아니었다. 사무적으로 진행되는 유교적 법률의 집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사형수의 신체를 해체하는 것은 유교적 관념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데 사후 세계에서의 영혼의 파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부분은 이번 독서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능지형에 대한 서국적인 시점을 유지해 왔던 셈이기도 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이러한 능지형의 실행이 청말 서구 세력의 접촉과 침범으로 불안해진 사회적 정황에서 기강 확립 등의 목적으로 그 선고의 횟수가 증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아니 할 수 없겠다. 

왕 웨이친이 종교적 엑스터시와 에로티시즘의 연속선에서 사디즘과 연관된 강렬한 쾌감을 경험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아마도 그런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았을까. 능지형의 집행은 기독교적 수난극이나 의식화된 행사도 아니었으며 희생자의 세밀한 계획과 동의를 거치는 사도마조히즘적 퍼포먼스와도 그 궤를 달리했다. 형장에는 무대도, 이를 증언하고 기억해줄 관객으로서의 군중도 부재했다. 기독교적 ‘형벌미학’이 철저히 배제된 장소에 남아있는 것은 신속하고 사무적인 법의 집행, 법 그 자체의 실행이었다. 그의 육신은 교육의 장으로서 전시되었으며, 법의 준엄한 집행으로서 이는 완성되었고 동시에 해체되었다.

제국주의는 타자를 지배하는 인간의 본성이 집단적으로 드러난 전지구적 현상이며 식민지와 경제적, 문화적 세력권을 형성함으로써 거대 제국을 창출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는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의해서 수행되지만, ‘백인의 사명’이라는 기독교 전파를 통해 야만적인 저개발 국가에 유럽문명의 축복을 전해주는 것으로 그 맹목성을 합리화했다. 제국주의자들은 태생적으로 명령과 힘의 행사를 위한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사디스틱한 이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고통과 훈육에의 복종을 통해 특유의 야만성을 벗어나려 하고 이러한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일종의 마조히스트들을 그 존재의 조건으로 상정했다. 19세기 서구 열강들이 보고 싶었던 모든 것들, 사형수가 보이는 고통에 대한 순응과 그에 대한 도착적인 반응 및 이를 관망하고 즐기는 듯 보이는 중국 군중들의 야만스럽고 잔인한 민족성 등이 능지형의 사진 속에 알맞게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제국주의적 환상과 연상들이 한 껏 피어오르는 그 순간, 그 곳에는 현실적인 의미의 어떤 중국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왕 웨이친도 거기에는 없었다.

이 책은 능지처참이란 형벌에 대한 두 가지 판본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하나는 뚜렷한 절차와 적용 기준을 가지고 명청시대의 황제들이 사법행정의 일부로서 시행을 허락한, 세계 형벌학 속 혹형의 한 범주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객관적인 능지형의 역사이며 다른 하나는 서구인들의 오랜 상상속의 세계에서 한 차례도 그 생명력을 잃은 적이 없는 전설의 형벌, 공포와 불안, 매혹과 혐오가 뒤섞인 능지형에 대한 오해의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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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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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자신을 구조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를 어떤 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그는 프로이트의 성실한 주석자를 자처하며 기존의 정신분석을 쇄신한 사람이다. 그런 이를 구조주의 4인방 중 하나로 소개하는 입문서를 찬성할 수 있겠는가? 뭐, 이런식의 문제 제기는 사실 이 매력적인 입문서에 대한 조금의 흠집도 만들 수가 없다. 저자의 이러저러한 친절한 접근과 해석은 사실은 우리를 포함한 '아마추어' 철학애호가들을 위한 친철한 인사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 분야의 소위 고수들, 전문가분들이야 저자의 이런 저런 설명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런 수준의 성실한 서비스 정신으로 일관하는 입문서를 그 고수님들이 써내려갈 수 있는지는 엄연히 다른 문제이니까 말이다. 구조주의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며 적절하거나 참신한 예들을 들어 풀어가는 저자의 접근은, 깊이 성찰한 뒤에 그 무거움을 걷어버리고 다시한번 그 핵심으로 단박에 돌진해 가는 경쾌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대중을 위한 전문가의 입문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려깊은 모법답안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나의 경우, 이 책을 읽고 다시한번 푸코나 바르트의 책들을 뒤져보게 되었으니 그 효과야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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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케빈 2011-02-26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책인가 보군요.
많은 구조주의 유파가 바슐라르 이론의 은총?을 받았지만 라캉이나 데리다는 예외로 보입니다. 로쟈님 서재 댓글에서 말씀하신 헤겔은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가 마음에 듭니다.. 파라노이드 파크의 궁전장면이 떠오르네요.
 
책 사용법 - 한 편집자의 독서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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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이자 열혈 독자로서의 저자의 애정에는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의외로 구성이 산만하고 허술한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굳이 저런 식의 목차 구분이 필요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49에서 50 page에 수록되어 있는 책의 분류 및 배치에 대한 적절한 정리는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5단계를 따르게 되어있다. 

정보를 철저히 습득하는 데 필요한 책 - 내 경우 출판, 문학, 트렌드, 예술 분야 등을 다른 책 -   은 가까운 곳 -  책상, 머리맡, 소파 옆 - 에 두고 항시 시간이 나는 대로 펴들게 된다.  이런 책은 서가에도 잘 가져가지 않는다. 다 읽기 전에는. (1)

정보 습득이 필요하나 좀 시간이 걸릴 만한 분량, 또 단시간에 정보를 습득하지 않아도 되는 책은  먼저 목차나 내용의 일단을 살펴보아 이 책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한 후 서가에 잘 띄게 꽂아둔다. (2)

정보 습득이 다 끝난 책은 서가의 깊숙한 곳, 심지어 창고까지 가기도 한다. 이런 곳에 잃어버리지만 않을 정도로 둔다. 곁에 두고 봐야 할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별하여 가급적 많은 분량을 따로 보관하도록 한다. (3)

즐거움으로 가볍게 보는 책은 갖고 다니기도 하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까운 데 두고 보다가 
읽기가 끝나면 주위 사람들에게 주거나 버린다 (이런 책들이 주인이 되어 서가를 차지하고 있지 않도고 항상 유의한다). (4)

구입한 책 가운데 내용 파악이 안 된 책은 책상 위나, 때에 따라 서가 밑(꽂아둔 것은 감별이 끝난 책이므로)에 쌓아둬서 주말이나 휴일에 마음먹고 몰입하여 먼저 내용 파악을 한 다음 1번에서 4번으로 각각 처리한다. (5)  

본인의 책이 가까운 서가에서 안식을 취하게 될지, 창고로 직행하게 될지, 혹은 가까운 친구에게 증여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궁금해 지기도 한다. 

아마도 나는 가볍게 즐긴 뒤에 주위 사람에게 증여해 버리는 수순을 밟지 않을까 싶다. 좋은 편집인이자 능란한 작가가 되는 일이 쉬울리는 없겠다. 

*** 저자는 211쪽에서 김수영 전집을 언급하면서 '지금도 나는 수시로 그 시 전집을 들추며 봄날에는 '봄밤'을, 외로운 날에는 '달나라의 장난'을, 사랑이 필요한 날에는 '사랑의 변증법'을, 투지가 필요한 날에는 '풀'이나 '폭포'를 낭송하며 큰 위안을 받는다고 썼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김수영 시 전집을 펴보니, '사랑의 변증법'이란 시는 없고 '사랑의 변주곡'이란 시가 덩그러니 버티고 있었다. 뭔가 착오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역시나 책을 쓴다는 일은 쉬운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착각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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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2010-07-12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softcell님, 서평을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을 확인했습니다.저희가 놓친 것이 맞습니다. 저자분이 직접 인용하신 부분은 편집자가 일일이 대조하였으나, 지문에서 책명이나 작품명을 언급하신 부분은 오자가 아니면 그냥 지나친 것이 문제였네요.(저자분은 기억에 의존해서 쓰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익숙하게 생각하신 것이 그만...)
말씀하신 김수영 시인의 작품은 <사랑의 변주곡>이 맞구요.
참고로 133쪽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진실과 소설적 거짓>도 잘못이군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 맞습니다.
앞으로 팩트가 틀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softcell 2010-07-13 13:54   좋아요 0 | URL
이렇게 친철하게 설명까지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좋은 책들 펴내주셔서 즐거운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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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인을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경구 같은 것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은 없더라.’라는, 우리가 일상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쓰게있는 말이었다. 이야기의 초반에 다소 허무하게 드러나 버리듯 주인공 유이치는 우발적 살인의 가해자이며 곧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폴 리쾨르는 악(惡)을 죄(범하는 악)와 고통(감내하는 악)의 공통 뿌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생각했는데 이러한 보편적인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죄를 범한 유이치는 역시 악을 행한 악인(惡人)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숨겨져 있던 나름의 사정들이 점차 드러나면서 쉽고 단호하게 판단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소설이 절정으로 치닫게 되면서 독자들은 그의 행동에 일정 수준의 개연성을 부여하는, 치밀하게 배치된 수많은 단서들과 그의 범죄를 둘러싼 여러 시선과 악의(惡意)들을 마주하게 된다. 게다가 피해자인 요시노는 왠지 부도덕하고 속물적인 인간으로 그려져 동정심을 가지기 어려워지고 마스오 게이고는, 사실 진정한 악인은 이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경박하고 충동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결국 소설이 진행될수록 악을 행한 사람이 악의 주체가 아닌 객체처럼 생각되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이 교차하면서 독자들은 가벼운 혼란에 빠지게 되고 등장하는 악인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나의 경우, 나의 관심을 끈 악인은 유이치였다.




 유이치는 버려진 아이였다. 집을 나간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거짓말을 한 어머니는 아이를 선착장에 버려둔 채 도망쳐 버리고 남겨진 아이는 행정적인 절차를 걸쳐 외가 쪽에 입양된다. 그는 뭔가 결핍되고 위축된 존재로 성장한다. 주된 취미는 공들여 튜닝한 차에 몸을 싣고 황량한 국도를 따라 이 곳과 저 곳 사이를 오가는 일이다. 단짝 친구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에 대해 ‘차 없으면 아무데도 못 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한다. 한 곳에 머문다는 안정감이 경박하다는 듯, 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매끈하게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간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기 마련이다. 근본적인 신뢰 관계가 훼손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패션헬스에서 일하는 미호와의 관계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관찰된다. 이 관계에서 그는 육체적인 욕구 충족보다는, 함께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일상을 공유하는 데서 오는 친밀감이나 익숙함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는데, 둘 사이는 일종의 유사 모자 관계와 같아 보인다. 유이치는 이 관계에서 일정 수준의 충족감을 얻게 되지만 미숙한 유이치의 갈망은 불행히도 집착의 수준으로 변질되고 결국 이에 부담을 느낀 미호는 별 다른 예고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잠적해 버린다. 유이치는 유년기의 정신적 유기를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다. 능동적으로 주도하려던 관계는 실패로 마감되고 이로 인한 상처는 어린 시절 피동적으로 경험했던 어머니와의 단절의 기억을 되살리고 이를 더욱 짙은 불안과 좌절의 색채들로 덧칠하였을 것이다.

 이후의 관계인 유이치와 요시노와의 만남은 주로 인터넷이나 핸드폰의 문자 서비스 등을 통해서 진행되는데, 이는 체온이나 체취가 제거된 매우 방어적인 만남의 형식으로 보여 진다. 유이치는 요시노의 이미지를 휴대폰에 저장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는 아무런 갈등이나 상처가 존재하지 않는, 스스로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하려는 유이치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행동으로 비춰진다.

 이후 미쓰세 고개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살인 사건 현장에서 요시노는 의도하건 그렇지 않았건 유이치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발언을 하게 된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납치하고 폭행했다는 거짓된 진술을 경찰에 할 것이라고 소리치고 이에 항의하는 유이치에게 “너 따위가 하는 말을 누가 믿어줄 것 같아”라고 경멸하듯 대꾸해 버린다.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던 유이치에게 이는 치명적인 위협으로 인식되고 결국 우발적인 살인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후 이 소설의 전개가 흥미로운 것은, 살인 사건을 계기로 그가 자신의 죄책감을 해소하고 타인과 소통을 하기위해 태도의 변화를 보인다는 점이다. 미쓰요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신뢰, 애착, 소통 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미쓰요라는 구원의 인물과 도피 중에 차를 버리고 등대로 숨어 들어간다는 설정으로 형상화 되는데 이동과 방랑을 의미하는 차를 버리고 등대라는 고립되었지만 안정된 공간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필요 없는 돈을 강요하며 필사적으로 가해자의 위치를 점유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하곤 했던, 미숙하고 순진한 그가 본인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이를 피하거나 숨기지 않고 대면하였으며 이를 고백하는 과정에서 마쓰요라는 타자와의 연대감을 체험하고 그 만큼의 인간적인 성장을 보여주게 된다. 비록 그것이 늦은 감은 있지만 말이다.




 소설은 미쓰요가 자신이 만난 유이치라는 인물을 악인이라고 믿어야 하는지 묻는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악인을 정말 악인이라고 할 수 있나’라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악은 모든 관계의 파괴와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불안감을 느끼는 대상은 우리가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아예 무지한 대상이고 타자이다. 불안은 공포의 감정과 연결되고 이러한 공포가 투영된 대상은 우리에게 악인의 이미지로서 다가오게 된다. 독자가 유이치에 대해서 가지게 되는 연민과 동정의 감정은 소설 속에 서술된 그에 대한 정보나 관심의 양과 비례하게 된다. 반대로 마스오에 대한 혐오의 감정 역시 그에 대한 정보나 배경 등이 소설 속에 거의 드러나지 않아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여지가 차단되어있는 상황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분리, 냉담, 불일치와 같은 것들을 악의 실제적 모습이라고 본다면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개개인의 취약성보다는 오히려 모든 관계를 해체하고 개개인들을 완전한 침묵과 단절 속에 위치시키는 존재 조건, 사회적 조건이라고 생각된다. 좀처럼 객관적이고 냉정한 기술자의 위치를 지키던 작가도 피해자의 아버지인 요시오의 생각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슬픔을 비웃고 소비해 버리는 젊은이들의 태도나 매스 미디어의 보도 행태에 대해 비판과 근심의 시선을 숨기지 않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사회는 사회적인 관계가 부재할 때 위기에 처하게 된다. 관계의 파괴와 분열의 이미지로서 만연하는 악에 대한 대처 역시 그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과학적 이해나 분석보다는 애정과 동정에 뿌리를 둔 동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인간이 혼자가 아니라면, 악의 무게는 덜 무거울지도 모른다. 민감하고, 진정어린 경청과 의사소통 등은 악을 물러나게 할 전략에 대한 검토에서 일차적으로 참조되어야 할 요소들이다. 즉, 관심 있는 자만이 돌을 던질 일이다.

 소설의 내용 중에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왠지 한 인간의 부재가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무게감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의 언급처럼 다가온다. 유이치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 지금도, 미쓰요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얼마간의 머뭇거림과 안타까움을 포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는 죄를 지었고 그 점에서 악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촘촘한 관계의 그물로 악의 심연으로부터 건져 올릴 수 있었던, 이제는 내가 알게 된 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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