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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의 120일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201
사드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8월
평점 :
이 책에 대해 단호하게 판금 조치를 때려버린 결정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체의 이름으로 내려졌겠지만 그래도 최종 결정자는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그 양반은 꽤 올드 패션드한 새디스트임에 틀림이 없다.
가학과 피학의 심리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작동한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인데,
잔혹한 가학 행위로 점철된 소설을 출판한 뒤 사드 그 자신이 법적인 감금의 대상이 되는,
피학적인 포지션으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항상 함께 간다는 것 말이다.
가학적 행위에서 쾌락의 자양분을 빨아들이는 이들이
어느새 그 가학의 대상과 심리적 동일성을 경험하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책에서도 나오듯,
가학적 행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그 대상을 결박하고 눈을 가리거나 입을 틀어 막아버리는 식의 일련의 행위들인데
책에 대한 판금 조치 역시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업이라 생각된다.
이 책의 위대한 점은 그 내용 자체보단
어떤 사회가 이 책을 다루는 방식에서 다양한 시사점들을 유발한다는 데에 있다.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반복되는 행위에 대한 묘사 속에서 지루함이나 피로감만 쌓이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그나마 19금으로 수정이 된 것은 다행이지만,
신중한 논의 없이, 하나의 사조를 창조한 것으로 평가되는 고전에 대해 판금 조치를 날리는 것은
그 행위의 주체가 굉장히 즉각적이고 유치한 방식으로
불특정 국민에게 '힘을 과시하고 강제하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드적 환상(가학-피학의 관계)을 실현하려 했고
스스로가 이 플레이에 있어 매우 미숙한 수준의 기술자라는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내 버렸다.
사드가 또 다시 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