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보름
R. C. 셰리프 지음, 백지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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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례 휴가를 떠날 준비를 하는 스티븐스 가족, 신혼여행으로 영국에서 햇볕이 진하다는 보그너 레지스를 처음 방문했던 스티븐스 부부는 이후 휴가 때마다 그곳을 방문한다. 심지어 신혼 여행 때 묶었던 그들이 함께한 시간만큼 조금씩 낡아가는 숙소에 항상 머물며, 세 자녀와 함께하는 스무 번째인 2주간의 여름휴가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 휴가를 떠난 사람은 상황만 조금 달랐어도 자신이 되었을지도 몰랐던 사람, 자신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사람이 된다. 모든 이는 휴가 중에 동등하다. 모두가 비용이나 건축 기술일랑 고려하지 않고 저마다의 성을 꿈꿀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토록 섬세히 직조된 꿈들은 숭배하듯 보살펴야만 하고 그 다음주의 투박한 빛으로부터는 떨어뜨려 놓아야만 한다. (p. 35)

- 한여름에 햇빛은, 옥외에서 보낸 긴 하루의 끝으로 갈수록 거의 짐덩이가 되는 수가 있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까지 서쪽 하늘에 고집스레 매달려 있는 그 창백한 백열광은 사람을 거의 분개하게 만들고, 커튼을 쳐본들 침실은 완전히 깜깜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구월의 잠식해 오는 밤들은 낮의 전경에 새로운 장면을 더해준다. 악단의 음악은 광채를 뿜는 보석이 있는 왕관에서 흘러오는 듯싶고,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해변 산책로를 따라가는 고무신들의 부드러운 타박거림, 유원지의 꼬마전구들과 바닷속 별들의 반짝임은 낮의 요란한 기상에 부드러운 낭만을 가져다준다. (p. 197)

휴가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이야기의 반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반전이라는 책 소개처럼 별다른 사건이 없는 한 가족의 휴가 이야기는 무료하고 밍밍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오히려 서두르거나 조급함이 없어 잔잔한 이 이야기는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 그는 시간은 시계의 바늘에서나 균등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에게 시간은 미적대면서 거의 뚝 멈추어 있는가하면, 재빨리 내달리고, 절벽을 뛰어넘듯 훌쩍 사라지거나, 다시금 미적댈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약간의 슬픔을 품고서 알았던 것은, 시간이 종국에는 늘 따라잡는다는 것이다. (p. 209)

-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은 기억이 꼭 붙들 수 있는 예리한 윤곽을 남기지 않는다. 읊조린 말들도, 작은 몸짓이며 생각도 남지 않으니, 깊은 감사함만이 시간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머무른다. (p. 341~342)

- 거듭 또 거듭 그녀는 이 휴가가 마지막일 거라고, 그녀가 아버지와 어머니, 딕과 어니와 다시는 결코 이렇게 하지 못하리라고 느꼈다. 슬프고도, 다소 어려운 감정이었고, 지금에서야 그녀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근사한 시절이었다, 보그너에서의 이 휴가들은. 하나 그런 시절들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그런 시절들이 해를 거듭하며 계속되면서, 죽어가는 어린 시절의 불씨에 미약하게나마 부채질을 시도할 수는 결코 없었다……. 거기에서 추억들은…… 그리고 그 시절의 멋진 엔딩이라는 장관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터였다……. (p. 385)

“거창할 것 없는 사람들이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을 만나는 독자들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일상의 소중함과 여행지에서는 별것 아닌 아주 작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기쁨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보여준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 일상을 이어오면서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과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되었다. 비슷한 결의 소설 <스토너>를 떠올리게 하는, 100여년에 가까운 시간을 넘어 지금 읽게 된 <구월의 보름>은 평온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지내는 것의 행복과 이 시간을 잘 누리기를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 독파 챌린지를 통해 다산책방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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