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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평점 :
정보라 작가님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SF소설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SF소설인데 자전적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와 닿지 않았지만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면서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 해양 생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여섯 편의 단편에는 작가님이 살고 있는 도시 포항의 배경과 함께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 그 속에서 겪은 실화를 바탕에 둔 이야기에 담겨있다.
- 나는 그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나의 천직이었다. 학생은 선생이 없어도 스스로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학생이다. 그러나 선생은 학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학생들을 사랑했고 강단을 사랑했고 교육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다. 그것이 내 존재의 의미였다. 그러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학교가 원하는 대로 조용히 사라져줄 수는 없었다. (p. 18~19)
- 내가 언젠가 물어보았다. 세상을 바꾸려고. 그래서 그렇게 싸운 끝에 세상이 바뀌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그가 현장에서 30년을 보낸 지금, 그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자신이 세상을 아주 조금이나마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이나 지나서, 눈가에는 주름이 생기고 손목과 어깨와 허리가 수시로 아프게 된 지금에야 말이다. 싸워서 세상을 바꾼다는 건 그런 것이다. (p. 67)
비정규직 강사들에 대한 이야기 문어부터 매스컴을 통해 접했던 현실 속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긴 이야기들은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해고 처분,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한 문제, 지금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 해양 생태계 파괴와 원전 오염수 방류 등 노동, 장애, 기후, 생태에 관한 이야기가 해양 생물들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 속에 들어있다. 무거운 주제들을 담고 있는 이야기지만 중간중간 웃음을 주는 요소들이 있다. 특히 사건마다 등장하여 어딘가 모를 장소로 데려가는 검은 정장을 입은 덩어리들이라 불리는 해양정보과 사람들은 정체에 대한 궁금함과 새로운 해양 생물이 나올 때마다 그들이 등장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언제 등장할까 기다리게 만들었다.
- 나는 그 ‘언젠가’가 지나치게 빠르고 가차 없이 진행되는 것이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새롭게 사랑하게 된 가족을 순식간에 모두 잃을까 몹시 두려웠다. (p. 95)
- 인형을 두세 개씩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선우가 우려하는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는 일도 자주 있었다. 세상은 선우에게 인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인형은 선우가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혹은 다른 아이인지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선우에게는 더더욱 인형이 필요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세상은 선우와 인형의 관계를 더더욱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p. 145)
- (있잖아, 모험이란 그저 고생의 다른 말일 뿐이야. 그러니까 사실은 나 자신도 모험을 그토록 원했었는데, 얼마 전까지도 말이야, 모험이란 아주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알고 보니까 그저 골칫거리일 뿐이야, 전부 아주 굉장히 커다란 골칫덩어리일 뿐이라고……) (p. 163)
작가님이 포항에서 살게 되면서 환경이 달라지니 자연스레 바다나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직접 투쟁의 현장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며 겪은 감정들이 담긴 이야기들은 어떤 것보다 생생하고 치열함과 더 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지구 생물체 모두가 살아남는 길이다.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작가님의 이 말이 이 소설집의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전하고 싶은 주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현실에서 눈을 돌려 과학의 이름 뒤로 도피하고 싶은 사람들과 생계는 물론 생명까지 위협받게 된 사람들의 충돌은 부드럽게 끝날 수 없었다. 이 충돌은 완벽하게 무의미했다. 방사능 폐수를 바다에 버리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서로 욕하고 소리치는 동안에도 폐수를 바다에 계속 신나게 버리고 있었다. (p. 22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