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후의 거리
박지영 지음 / 청어람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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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장을 덮었을 때, 슬프고 따뜻한 영화를 한편 본 기분이었다. 조금은 안온한 풍경 속에서 은령과 은성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절로 그려지는. 여운이 긴 소설이 될 듯하다.

 

 

서른 넷 신은령과 서른 살이 된 은성의 재회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시 만나기까지 7년을 엇갈린 그들의 사연은. 흐르듯 스쳐지나가듯 멈춰 선 순간순간 되살아간다. 은령이 신호등 불빛이 바뀌길 기다리며 멈춰선 사이, 봄날의 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과거 은성과 함께한 추억이 깃든 버스정류장에서 툭툭 터져나오는 과거의 기억들은 은령의 시선으로 담담히 때론 아프게 재생된다.

 

 

초중반까지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 편집 형식으로 서술되는데, 이 점이 아주 좋았다. 시간의 구조를 순행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려면 필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어지럽지 않게 자연스러우면서 이 작품만의 분위기를 유지했다.(영화로 치면 '건축학 개론'에서 과거와 현재의 교차진행으로 왔다갔다 하면서도 특유의 분위기를 간직하는 느낌이다.)

 

 

과거의 '그 사건' 이후로 웃음을 잃어버린 은령과, 그녀가 결코 만나선 안 될 사람이 되어버린 은성. 은령과 은성의 잘못이 없음에도 정말 우연한 사건은 그들의 관계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런 현실적인 벽을 넘어설 만큼 은령은 용기있는 사람도, 사랑에 빠져 사랑 하나만 보는 사람도 못되기에. 은령은 은성의 손을 놓아버린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반복'스러웠다는 것인데. 밀어낼 수밖에 없는 은령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밀어내고, 다시 만나고, 밀어내고의 반복 패턴이 살짝 지루한 감이 있었다. 자꾸만 밀어내고 용기를 내지 않는 은령이 좀 답답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은령이 처음으로 용기를 내는 것도 은성을 사랑하고, 함께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에. 모든 망설임과 머뭇거림, 두려움을 떨치고 은성에게 다가갔다는 것에 감동이 있다.

 

 

마지막으로 좋았던 점은 문장들이 아름답다. 봄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가 봄향기가 나는 배경들이 설렘을 느끼게 한다. 두 번째 문장은 대조적으로 시크한 느낌을 풍겨서 매력있다. 두 문장 모두 은령의 감정이, 그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읽는 사람과 동화되는 느낌이 주어서 몰입을 증대시키는 것 같다.

 

 

머리 위에서 속삭이던 꽃잎 하나가 무리에서 이탈하면서 허공을 떠돌았다. 음료수 캔을 들고 있는 내 손바닥으로 꽃잎이 수줍은 듯 얌전히 착지했다. 손안으로 들어온 꽃잎을 난 소중히 내려다보았다. (250p)

 

차디차게 식은 아메리카노는 씁쓰레한 향기조차 소실되었다. 찬 기운이 퍼지는 잔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흐르는 것도 아닌데, 손가락 끝이 따끔거리며 시려왔다. (89p)

 

 

슬프고 아련한 장면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생각하면 '따스한 봄날 오후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 풍경에 자리잡은 은성과 은령과 함께. 그래서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다. 다시 읽은 땐 또다른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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