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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단편모음집, 런어웨이. 총 8개의 단편이 실려있다. 책을 읽기에 앞서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고동색의 흙같은, 건조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인데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랑 잘 어울린다. 침착하고 나지막하게 서술되어 비가 올 것 같은 회색빛 하늘같은 느낌이다. 그 풍경 안에 위트와 희망이 숨어 있다가 드러나곤 한다.
첫 번째 단편. '런어웨이'는 남편의 정신적 학대로부터 벗어나고픈 여자 칼라의 이야기다. 칼라는 남편과 함께 시골에서 말을 기르며 승마지도와 남의 말을 맡아주는 일을 하고 있다. 남편과의 불화를 겪는 칼라의 유일한 위안은 하얀 염소 플로러 였는데, 어느 날 플로러가 사라진다. 마음의 평안이 없는 칼라는 이웃집의 실비아와 대화를 나누다가 충동적이며 비이성적으로 남편을 떠나야 겠다고 결정한다. 실비아의 옷을 빌려 입고, 토론토로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싣는데..
'런어웨이'에서 앨리스 먼로에 의해 묘사되는 감정들이 인상 깊었다. 칼라의 심정.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런 마음들.
폐 속 어딘가에 아주 뾰족한 바늘이 있는 것만 같았지만, 숨을 조심스럽게 쉬면 통증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 심호흡을 할 때면 바늘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그녀를 아프게 했다. -72p
남편과의 불화, 풍요롭지 않은 경제력, 자식이 없는 부부. 뻔하고 통속적인 이야기 속에 독특하게 반짝이는 위트는 하얀 염소 플로러다. 칼라에게 위로를 주는 작은 친구 플로러는, 칼라와는 정반대의 노선을 달리며 글의 분위기를 잡아준다. 우울한 칼라 옆에서는 재간둥이로 그리고 이야기의 후반부에서는 약간의 반전과 궁금증을 유발하는 기묘한 느낌의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 짧은 단편 이야기에 하얀 염소 플로러는 각 등장인물을 공통적으로 잇는 존재면서도 모호한 미스터리다.
8개의 단편 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단편은 일곱 번째 챕터 '반전'이었다. 다른 단편들이 여러 가지 중첩된 느낌과 메시지를 남긴다면 이 단편의 주는 메시지는 '엇갈린 인연' 한가지로 분명하다. 로빈이 가방을 잃어버려 땡전한푼 없이 집에 갈 기차표를 걱정하던 날, 우연히 만난 외국인 남자 다니엘은 로빈을 도와준다. 기차역에서 헤어질 때, 다니엘과 로빈은 일년 후에 같은 곳에서 만나기로 한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가능한건지, 로빈이 모태쏠로라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빈은 일년 후 만날 그를 생각하며 다니엘의 나라, 몬테네그로에 대한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 읽기도 하며 행복해한다. 그리고 일년 후. 다시 만난 그는 그녀를 모른척하고 냉정하게 거부한다. (왜 그랬을까는 책을 읽어 보시길..) 이 반전이 없이 둘이 결혼했다고 해도 과연 행복했을까는 의문이지만. 이런 반전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에 여운이 남는다. 후에 과연 진실을 아는 것이 다행일까. 아니면 그냥 모른채로 살아 가는게 나았을까. 이미 엇갈린 인연은 돌아오지 않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외국 소설인 만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들도 있고, (예를들어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독립심, 절연) 또 하나의 단편에서 전달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느낌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재밌게 읽었다. 앨리스 먼로는 이 단편집에서 여러 가지 형태를 선보이고 있다. 2,3,4챕터인 '우연', '머지않아', 침묵'은 이어지는 내용으로 동일한 여주인공 줄리엣이 등장하며, 줄리엣의 청춘부터 노년까지의 삶을 닮고 있다. 또 마지막 8챕터 '힘'에서는 한 단편 안에 여러 소제목으로 분할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솔직히 말해, 눈을 뗄 수 없이 책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의 책은 아니었지만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서의 묘한 위트와 반전이 있어서 여운이 길게 남을 듯한 책이다. 표지의 고동빛처럼 무던하면서도 깊이있는 통찰이 있는 단편소설집이다. 앨리스 먼로의 전작들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번 쯤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