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의 백합 을유세계문학전집 4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서 첫째 날---  모성애의 결핍이 심한, 스무살을 갓 넘친 청년이 어떤 부인에게 푹 빠져들고 있다. 이런 이야기 계속 읽을 만한지 어쩐지...의심스러워 잠깐 책을 덮었다. 플로베르에 비하면 발자크의 문체는 상당히 빨리 써졌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하기보다는 풍성하게 장식하고 남김없이 드러내는데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사람의 내면이라는 것이 명료하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런 장황스러운 문체는 자꾸 신뢰감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그가 묘사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그의 안목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발자크의 체험이 많이 녹아 있어 보이는 소설이다. 주인공 펠릭스는 파티에서 만난 어떤 부인의 어깨가 아름다워서 무의식 중에 키스를 하고 말았고, 그 부인에게 신성한 사랑을 느낀다. 철없게도 보이고, 어머니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한 남자에게 이런 사랑이란 예정된 수순이다 싶어서 동정심이 느껴지기도 하고....   계속 읽을지 말지는 결정하지 못하겠다.


독서 둘째 날---드디어 펠릭스는 모르소프 백작 부인(앙리에뜨)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부인은 우정 이상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앙리에뜨는 희생 정신과 도덕심이 무척 강한 여자였는데, 인생은 그것을 증명해 보라는 요구라도 하듯 그녀에게 가혹했다. 어머니는 냉정했으며, 남편은 신경질적인 사람이었고, 두 아이는 병약했다. 앙리에뜨가 얼마나 지쳐있는지와, 이런 심적 고통을 나눌 친구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펠릭스 군의 열정이 그녀에게 얼마나 매혹적인 것이었을지..... 

독서 셋째 날 - 모르소프 백작 부인의 인내와 자기 훈련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게 된다. 모르소프처럼 발작적인 남편의 갖가지 폭력을 감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늘 두둔하고, 치켜 올려주며 아이들이 아버지를 존경하도록 신경쓴다. 병약한 아이들을 늘 정성스레 간호하면서도,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다. 집안의 재산도 현명하게 관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늘 호의적으로 대한다. 정말 지혜롭고 현숙한 여성이다. 철없는 펠릭스에게도 늘 한결같은 호의와 거리감을 가지고 대한다. 펠릭스에 대해서 그녀로서는 마음의 선이 넘어간 적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늘 정숙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본인의 경건함이나 의지로 미루어볼 때, 탈선의 위험이 없고, 순결한 우정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여겼을 테지만, 남자에게 이런 류의 사랑이 얼마나 치명적일지 가늠할 수 있다면, 모르소프 백작 부인은 아예 싹부터 잘라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르소프 백작 부인의 고행 같은 일상을 생각하면, 놓치기 싫은 우정이었을 것이다.


독서 넷째 날 - 펠릭스는 모르소프 백작 부인의 전적인 지원으로 파리 사교계에 진출하게 된다. 국왕의 신임을 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경의를 받는 멋진 청년이 된다. 심지어는 어릴 때부터 펠릭스를 무시하고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던 그의 식구들까지 태도를 바꾼다. 이게 성공의 위력인가 보다. 가족들의 태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펠릭스의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모르소프 백작부인과의 편지 왕래가 그의 기쁨이고 삶의 이유이다. 펠릭스가 성공하여, 모르소프 백작 부인을 방문했을 때, 그녀가 보인 불안을 보니 그녀도 얼마나 펠릭스에게 의지하고 빠져있는지 충분히 알겠다. 가여운 앙리에뜨..당신은 경건하고 훌륭한 여성이기도 하지만, 또 연약한 여성이기도 하지... 가여운 모르소프 백작, 부인이 당신보다 몇 백배나 훌륭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에게 난폭하게 굴지. 그녀에게 자상하게 굴었다면, 그녀가 저렇게 외로워서 우정을 갈구하지 않았을텐데... 당신이 제일 가여워... 여자에게는 훌륭한 남자를 남편으로 모시고 싶은 로망이 있다. 그의 훌륭함을 위해서라면, 일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어떤 숭고한 사명감이 있다. 모르소프 백작 부인이 자기 남편을 보면서 한정없이 지치는 것도, 엄정한 국정 수행 능력을 보여주는 펠릭스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얼마나 모순덩어리로 여겨졌을 상황인가. 무능하고 공격적인 남편과 경건하고 훌륭한 부인....


독서 다섯째날 -  그렇지만, 백작 부인에게는 전혀 잘못이 없는 것일까.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인내하는 경우, 다른 한 쪽은 그것을 당연시하게 된다. 백작이 미치광이처럼 굴어도 부인이 스폰지처럼 다 받아주었던 것이 정녕 지혜롭기만 한 일이었을까? 펠릭스조차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인내는 숭고합니다. 그러나 그게 당신을 우둔하게 만들어 버리지 않을까요? 그러니 당신과 어린애들을 위해 백작을 대하는 방법을 바꾸도록 하세요. 나무랄 데 없는 당신의 마음씨가 그 사람의 이기주의를 키워 준 거예요. 당신은 어머니가 어린애를 위해 너무 위해 주기만 해서 잘못 기르는 것처럼, 백작을 잘못 다루었던 거예요(171쪽)
고리오 영감이 딸들에게 지나치게 헌신적이었던 것처럼, 백작부인도 남편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사람은 때로는 상대방에게 거울 역할을 해 줄 필요가 있다. 백작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괴로움을 주고 있는지 알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독서 여섯째 날  - 혈기왕성한 청년이 정신적인 사랑으로만 어찌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아주 능숙한 유혹자가 있을 때에는 빠져들기 쉬웠을 것이다. 매혹적이고 남자를 잘 다룰 줄 아는 더들리 부인(아라벨)은 본인이 느끼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펠릭스를 확 쥐어버렸다. 그 소문이 모르소프 백작 부인에게 들어갔고, 펠릭스는 사과하러 백작부인을 방문한다. 집요한 아라벨은 거기까지 동행을 한다. 펠릭스의 배신 행위로 백작부인의 내면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라벨 부인에 대한 질투, 자신이 힘들게 지킨 정숙함에 대한 회의, 신에 대한 죄책감이 복잡하게 펼쳐진다. 자신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이상적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종종 성경을 읽을 때 끔찍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가령 예를 들자면
고린도 전서 7장 -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고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라는 대목 말이다. 마치 낭만적 사랑이나 분별력과 고상함에 대한 믿음은 하나도 없는 듯한 저 명령은 어찌나 삭막하게 들리던지... '인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모르소프 백작부인보다 사도 바울이 좀더 현명하고 현실적이라는 것을 알겠다. 사람이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정도에서 멈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백작부인은 살아온 삶 내내,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살아왔으니, 자신이 원하는 정도의 거리감을 지키며 펠릭스를 가까이 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약한 인간이라고 늘 말은 하면서도, 그 정도를 감지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진정한 현실주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독서 일곱째 날 -- 앙리에뜨의 소원으로 두 여인은 만나게 된다. 앙리에뜨는 펠릭스의 누이나 어머니 같은 태도로, 아라벨을 만나려 하지만, 아라벨은 그녀의 도덕심이 펠렉스를 매료시켰다면,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는 둥 펠릭스를 휘어 잡는다. 펠릭스를 신과도 같이 대하는 아라벨의 태도를 펠릭스는 뿌리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을 향해 찬송가를 부르는 불쌍한 사람이란 어찌나 강력한 유혹일는지...  파리로 돌아온 후, 펠릭스는 점점 더 아라벨이 주는 환락에 빠져들고 사회적 명망도 잃어간다. 차분하고 맑은 앙리에뜨의 사랑에 비해 그녀의 사랑은 이중적이고 자기 충족적이었으므로, 펠릭스는 점점 더 앙리에뜨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자신을 진정으로 위했는지를 깨달아간다. 국왕에게 휴가를 받아 앙리에뜨에게 달려가지만, 그녀는 이미 임종을 앞두고 있을 만큼 쇠약해진 상태였다. 마음의 고통으로 인한 병이었다. 앙리에뜨는 쇠약한 육체로 인해, 전혀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펠릭스에 대한 애정을 쏟아내고 만다. 충격적이었다. 저것이 앙리에뜨의 내면이었단 말인가. 어린애처럼 자신의 욕망만을 고집하는....  그런 착란도 잠시 후에 가라앉고, 그녀는 고귀하고 아름답게 임종을 맞는다. 앙리에뜨의 내면이 복잡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이야 했지만, 죽음 직전에 펠릭스에게 쓴 편지를 읽고 울 뻔했다. 앙리에뜨가 첫키스 때부터 얼마나 펠릭스에게 빠져들었는지, 빠져들어가는 마음을 제어하려고, 순수하게 그 마음을 지키려고 얼마나 내면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렀는지... 그 전투는 죽음을 불러올 정도로 치열한 것이었는지 편지를 보고서야 알았다. 사랑의 갈등과 죄책감이란 것이 죽음을 불러올만큼 사람을 흔드는 것이지...


책을 덮고 나서
-- 

1. 앙리에뜨는 연약하고 훌륭한 여성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갖은 감정들을 모두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차가워져야겠다 . 앙리에뜨의 순진함을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순수는 쉽게 위험에 빠진다. 순진하고 착한 28살의 앙리에뜨가 젊은 청년의 감각적 충동과 그 표현인 키스를 그 나이의 철없는 청년이 저지를 수 있는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영혼이 흔들리지는 않았을 텐데....  인간의 본성에 대해 현실적으로 사고했더라면, 펠릭스를 그렇게 가까이 두지 않았을텐데..... 순진함이나 순수함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인간의 악덕을 간파하는 눈을 가진 사람을 더 만나고 싶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서로를 해치지않는, 진정한 배려를 할 수 있지 않을까.

2. 이 책은 '나탈리'라는 펠릭스의 새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편지를 읽고 나서, 나탈리가 펠릭스에게 보내는 결별의 편지가 가장 마지막에 첨부되어 있는데, 내 눈에는 나탈리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여성이 아닌가 싶다. 펠릭스의 두 여자 이야기(앙리에뜨와 아라벨)를 듣고 나서, 이 남자를 파악해 버렸다. 사랑할 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한 없이 어린 몽상가라는 것을.... 

3. 발자크가 훌륭한 작가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그의 문체는 지나치게 장식적이서 깔끔하지 않았지만, 앙리에뜨가 겪었던 고뇌의 일반성을 생각할 때, 이런 인간형을 그려낸 것은, 그 작가로서의 소명을 다한 것이다. 세월의 신산을 견디고 어떤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