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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 어느 문외한의 뉴욕 현대 예술계 잠입 취재기
비앙카 보스커 지음, 오윤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예술은 왜 어려울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해봤을 질문을 단계별로, 심층적으로 탐구하고 서술한 책이 바로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이다.
단순히 어려움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예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의 좋은 대안 또한 명쾌하게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 또한 미술의 ‘어려움’에 의문을 가진다. 저널리스트로서 현실적인 선택과 조건에 파묻혀 살던 저자는 어느 날, 집을 정리하다가 할머니가 그린 당근 그림을 보고 과거 할머니가 예술을 취미나 선택이 아닌 삶의 필수적인 무언가로 생각하던 것을 떠올린 후 예술에 대한 이해를 갈망하기 시작한다. 이후 예술에 대해 내밀하게 알기 위해 직접 개인 갤러리에서 일하거나 아트페어에 참가하고, 신진 예술가들과 소통하며 종국에는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에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느낀 바를 서술한다.
저자는 왜 예술이 어려운지 질문하고, 여러 가지 시선에서 답한다.
첫 번째 답변은 ’예술계의 폐쇄성‘을 거론한다. 영향력 있는 전문가들과 그 전문가들과의 인연과 평판이라는 영역으로 생성된 예술계는 영역 외 사람들을 배척하며, 또한 영역의 기준과 특권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인원이 쉽게 유입되어 예술 작품에 다가가고 해석하기 힘들도록 은연중에 조장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들이 길을 가다가 아무렇게나 갤러리에 들어오지 않도록 2층을 임대하고, 간판을 달지 않는 등의 폐쇄적인 조치가 만연함을 꼬집는다.
두 번째 답변은 예술계의 폐쇄성에서 유발된 감상 방법의 강제성을 언급한다. 예술에 대해 배우다 보면 특히 ‘맥락’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이 ‘맥락’은 그 분야에 깊이 들어온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 외 정보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가는 어느 미술대학 출신이며, 박사를 땄는지 따지 않았는지, 언제부터 활동을 시작해서 어느 갤러리에서 전시를 했는지, 이 작가의 작품을 누가 소장했는지, 어떤 갤러리 혹은 작가와 친한지 등과 같은 정보가 이 작품의 맥락을 구성하며, 그 맥락 없이는 그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권위적인 의견이 주류임을 시사한다.
저자는 이런 미술계의 맥락이 아주 소용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감상이 이런 권위주의적인 방법만 존재하지 않음을, 되려 맥락은 다른 감상 방법 이후에 적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하며 새로운 방안을 제시한다. 바로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있는 그대로 작품을 보는 것은 말로는 쉽게 느껴지지만, 이 책을 읽으면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일하게 된 갤러리를 그만둔 뒤 저자는 줄리라는 화가의 어시스턴트로서 일하게 되는데, 어느 날 그 화가가 그림에 사용할 회색을 만들기 위해 크롬 오렌지, 네이플스 옐로, 퀴나크리돈 마젠타, 프탈로 터콰이즈, 레드 오커같은 다양한 색의 물감을 가져와 회색을 만드는 과정을 목격한다. 그저 검은색과 흰색 물감을 가져와 회색을 만들면 되는 것을 왜 굳이 저런 물감을 사용하는지 의문을 가지던 차에 줄리는 작업실 문을 가리키며 “저런 회색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저자는 줄리가 가리킨 회색 문을 다시 보지만, 그저 회색으로 보일 뿐이다. 줄리의 눈에는 보인 작업실의 회색 속에 자리한 다채로운 색상이 저자의 눈에는 그저 회색으로만 보이는 이유는 줄리는 문을 있는 그대로, 저자는 ‘예상 여과기’라는 필터를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난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우리가 예상 여과기를 치우기만 하면 세상은 어지러운 정보의 도가니가 돼요.” 리베카는 그렇게 말했다. 바로 그 일이 여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색채의 지저분한 향연과 저 문을 바라보는 긴긴 응시 끝에, 줄리는 지금 자신의 예상 여과기를 치우고 저 ’회색‘에 담긴 광채를 온전히 포착하는 중이었다.’
-332p
사람들은 사물을 볼 때 예상 여과기라는 필터를 거친다. 회색 문은 그저 회색 문, 갈색 탁자는 그저 갈색 탁자, 하지만 자세히 보면 회색 벽은 빛을 받는 각도, 시간, 조명의 종류에 따라 탁한 레몬색이 되기도 하고 어두운 남색이 되기도 한다. 카페에 널린 갈색 탁자는 모두가 똑같이 생긴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앉아서 단 1분만 들여다봐도 각자 가지고 있는 무늬와 패턴이 전부 다르다는 것을 쉽게 눈치챈다. 이 책은 현대 미술이 어려운 이유와 더불어, 예상 여과기를 끼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방법이 미술과 친해지는 가장 쉽고도 즐거운 방법이라고 설득한다.
이런 시선은 단순히 예술 작품을 보는 데에만 사용되지 않는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술에 둘러싸여 살 수 있다. 평소 감승 없이 다니던 상점의 가판대에서도 각자 사물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레기장에서도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를 만날 가능성이 생긴다.
카프카는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얼어붙은 바다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 말하는 ‘예상 여과기’ 또한 그 얼어붙은 바다의 얼음층 중 하나일 거라고 확신한다. 사물을 바로 보는 법을 배우면 나를 꽁꽁 감싸 단단하게 고정시켜 둔 얼음층을 깨는 방법 중 하나이리라. 한 권의 책도, 한 점의 그림도 언제든 어디서든 예상치 못하게 나를 유연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만 이해해도 이 책의 가치를 다 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