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구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더 미묘하고 정교하고 잘 차려입은 욕망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바로 여기 바로 이 시점에존재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어떠한 구함도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진리를찾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있는 진리보다 더 나은 어떤 진리를 찾아 헤매기 일쑤입니다. 그러한 구함조차도 감사로 맞이하기를 권합니다. 그 구함이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면, 설령 그 구함이 진리는 이미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짓에 근거하고 있다 할지라도,
당신은 진리를 "구하기"를 원해야 마땅합니다. 그 구함이 현존한다면 활짝 열린 마음으로 그러한 구함을 그냥 긍정하십시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시 전력으로 판단할 때 레이테 만에서 일본 함대가 미국 함대에 승리할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나 만약 상황이 일본군이 계획한대로 되어 일본함대가 레이테 만의 미 상륙선단을 전멸시켜 미군이 레이테 상륙 작전을포기하게 된다면, 11월초에 예정인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루즈벨트가 낙선되고 새로이 선출되는 대통령은 루즈벨트의 정책(일본에 무조건 항복을요구)을 수정하여 일본에 유리한 조건으로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일본은 이러한 결과를 태평양 전쟁 이전부터 기대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직관과 개념은 순수하거나 경험적입니다. 자신 안에 감각적인 것을 함유하고 있으면 경험적이고, 그 표상에 아무런 감각도 섞여 있지 않으면 순수합니다. 포성의 반복은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겠죠? 따라서 시간(공간)이 감각적인 것이 섞이지않고 감각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한 직관이라면, 반복되는 포성은 경험적 직관이겠습니다. 개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과 같은 개념은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므로경험적 개념이지만, ‘필연성‘과 같은 개념은 경험할 수 없으므로 순수한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경험적 직관과 경험적 개념은 우리가 경험하는 직관적 질료와 관계하고, 순수직관과 순수개념은 그런 질료들을 담는 일종의 형식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감각은 감성적 인식의 질료라고 일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직관만이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직관되는 형식을 포함하며, 순수한 개념만이 대상 일반을 사고하는 형식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순수직관과 순수개념들만이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경험적인 직관과 개념들은 후험적으로만가능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자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타인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설사타인으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항상 "나에 - 대한 - 대상성"으로서 나타나지요. 타인이 나와의 관계에서 갖는 이 두 가지 계기는 비록 경우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울러 그 존재 방식에서 차이를 드러내 보일지언정, 도대체 제거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대타 존재로서의 나의 대자를 탐색하고 파악하고자 할 때 이 두 계기에 대한 고려는 필수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나를 파악하고자 하는 나의 이러한 시도를 "성적 욕망(désir sexuel)"이라고 단정합니다. ‘성적 욕망‘에 대한 상식과는 상당히 다른 참으로 묘한 정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달하우스 발언의 엄격주의에 매료되기도 하고 생경함을 느끼기도 한다. ‘구성적‘, 즉 스스로를 입증하는 예술 작품이란 범주를 위한 불같은 호소와 자기 증명의 본질을 분석적으로 밝혀내려고 할 때 그의 열정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사이 달하우스는 베토벤에서 쇤베르크에 이르는 작품의 구조 분석으로 해당 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