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탈구축‘ 자체의 기초적인정립에서 출발해야 한다. 데리다적 탈구축, 또 하나의 탈구축, 정신분석적 탈구축, 혹은 『우편엽서』의 집요한 등치를 참조하여 앞으로는 그것을 우편적 탈구축이라고 부르기로 할 때, 그것은 결국프로이트의 무엇을 계승하고 또 하이데거의 무엇에 저항했던 것일까? 바꿔 말하면, 데리다가 발견한(그렇다고 우리가 생각하는)프로이트의 가능성의 중심은 무엇일까? 제4장은 이 물음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데리다를 통해서, 또 데리다를역으로 비추면, 하이데거와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재독할 필요성과도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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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를 통한 권위는 무엇인가를 경이적으로 증대시킬 때의 매력에서 생긴다. 권위는 운에 의해 생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운이 다하면 사라지고 만다. 요컨대 지속되지 않는 순간적인 현상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권위를 길게 유지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다. 한번 카리스마를 통해 권위를 발휘해 본 사람은 그 영광을 계속해서 지니고 싶어 하고 주위 사람이성스러움에 홀려 있는 경우 그와 같은 매혹적인 광휘를 가능한 길게 보고싶어 한다. 당시의 중세 민중이 그러했다.
이처럼 지속성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자 순간적인 카리스마를 통한 권위에 확실한 형태를 부여해서 그것을 고정화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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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극도로 치밀하게 실행된다. 나는 ‘즉자적 차이‘ 장의 두 번째 부분의 세 번째에서 다섯 번째 단락을 포괄하여 그 주된 논점을 다음과 같이 좀 더 단순한 형태로 정리했다. 여기에서 들뢰즈 논증의 목표는 종, 유 그리고 존재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가 가장 큰 차이를 규정하기 위한 근거가 될 수 없다는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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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급작스러운 취약성과 협상하기 - 무엇이 옵션일까? 무엇이 장기적인 전략일까? 여성들은 이 질문을 아주 잘알고 있고 거의 언제나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식민적 권력의승리와 연관된 모든 것들이 이런 종류의 폭력에 우리가 노출되었음을강하게 부각시켰다. 취약성 자체를 부인할, 즉 침투성이 없는 것으로비춰질 가능성은 존재한다. 사회적으로 여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가 폭력적으로 변하는 상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편 예로부터 내려오는 다른 옵션, 다음 번 재난을 선매하거나 비껴나가게 하려는 무익한 노력으로서 죽음을 희망하거나 죽게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죽은 자가 되지 않거나 모방적으로 폭력적이게 되지 않는 방식, 모두 함께 폭력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이 가능성은 신체적 취약성이보호받는, 따라서 신체적 취약성이 근절되지 않는, 동시에 그런 보호와근절 사이에서 밟아나가야 하는 노선이 강조되는 그런 세계를 요구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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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드로스편에 따르면, 철학자의 인식은 그가 결코 자신의목적지를 바라볼 수 없는 추구도 아니며, 더구나 목적지에 지속적으로 머무를 수 없는 것도 물론 아니다. 오히려 영혼은 "그능력의 정도에 따라(Kata Sivaquuv) 언제나 신적 존재를 기억하는 것이네."(249c) 그러나 이전에 보았던 것에 대한 영혼의 이러한 상기는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따라서 각각의 인간은 본성상 철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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