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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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시간

30대 초반에 은행의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하여 마라톤을 시작했다. 계약직이었지만 총무를 맡게 되어 많은 마라톤대회에 참가했고 풀코스도 수차례 완주했다. 하프코스를 두 번 달려보고 처음으로 도전해서 힘들게 완주한 풀코스 기록은 4시간 43분이었고 이후 4시간 10분대의 기록으로 몇 번 더 완주했다. 그 정도가 딱 맛있게 달릴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40대 초반이던 Y언니가 나를 몰아세웠다. 배구선수 출신이라는 Y언니는 기록을 단축하려고 삭발을 겨우 면한 정도로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고 열심히 훈련해서 좀 규모가 작은 대회에서는 입상을 하기도 했다. 내가 기록을 단축할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정신력의 문제라고 야단을 쳤고 나중에는 뒤에서 내 험담을 하고 다녔다.
이 책을 읽고 떠오른 기억이다. 단지 취미일 뿐인데도 강박적으로 경쟁에 몰두하는 Y언니 같은 사람이 있고 즐길 수 있는 수준에서 만족하는 나같은 사람도 있다. 그 언니는무엇을 위해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붙였을까?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물론 사서교사로서의 나는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일을 좀더 잘해내고 싶은 열망일 뿐, 경쟁과는 다른 것이다.

이 소설에는 야구로 연결된 세 인물이 등장한다.

혁오는 중학교 때부터 아름다운 자세로 완벽한 투구를 하고 팀을 승리로 이끄는 뛰어난 선수였다. 명성에 걸맞는 대우로 화려하게 프로에 데뷔했으나 프로 데뷔 이후 결정적인 순간마다 실점을 하는 통에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다.

진삼은 혁오와 같은 중학교 야구부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혁오에 자극 받고 열심히 훈련한 끝에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 받았으나 같은 이유로 야구를 포기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회사에서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럭저럭 버티다 보면 승진도 하고 결혼도 하게 될거라고 여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의 부당하고 치사한 시스템에 환멸을 느낀다.

기현은 초등학교 야구부에서 남자들의 시기를 받는 실력있는 선수였으나 여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는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야구를 포기했다. 원하는 대학에도 가지 못했고 언론고시에서도 실패했지만 스포츠신문사에 기자로 입사했고 남들이 뭐라건 성공하겠다고 결심했다. 혁오가 승부조작에 가담했을 거라고 확신하고 반복해서 인터뷰 요청을 한다.

명료하고 재치있는 문장에 작가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 봤으나 찾을 수 없었다. 첫 작품인 듯한데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은 다큐멘터리 연출이라는 작가의 이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살면서 경험했던 또는 외면했던 나의 비굴함, 비겁함을 소환하게 하는 소설이다. 내가 배신했거나 배신 당한 경험, 정답이라고 믿고 걷던 길의 끝에서 좌절한 기억들도 소환되었다. 그럼에도 소설의 끝에선 묘한 개운함을 느낀다.

우리학교엔 야구부와 하키부가 있다. 운동부 아이들은 표시가 난다. 자기들끼리 몰려 다니고 대체로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가방을 두 개씩 들고 다닌다. 유니폼을 넣어 다녀서 그렇단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인사를 잘한다. 훈련을 받느라 힘든 와중에도 내가 보이면 멀리서 큰 소리로 인사하는 아이들이 있다. 모자까지 벗고 고개 숙여 인사하기도 한다. 모두 원하는 바를 이루길바라지만 슬럼프가 찾아올테고 운동을 그만두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좌절과 선택의 순간이 와도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인생은 성공과 실패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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