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좋을 그림 - 여행을 기억하는 만년필 스케치
정은우 글.그림 / 북로그컴퍼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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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갈 때, 나들이 갈 때, 잊지 않고 사진기를 챙긴다. 사진으로나마 그때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일상에서도 카메라는 부지런히 매 순간을 담아주곤 한다. 막상 시간이 흐르면 그때의 기억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찍어 둔 사진도 잘 보지 않게 되더라. 그렇다면 사진 찍느라 바빠 중요한 것들을 놓칠 것이 아니라 찬찬히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더 남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여행을 하는 방법도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년필 스케치를 통해 여행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작가 정은우 님의 <아무래도 좋을 그림>은 우리 삶이 지향하는 방향은 빠름이 아니라 느림이고 화려함이 아니라 은은함이고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면의 속살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고급 카메라에 찍힌 여행지의 사진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게 하기도 하지만 떠날 수 없을 때 사진으로나마 위로 삼기도 한다. 셔터 한 번에 멋지게 찍히는 고급 카메라의 근사한 사진에 익숙해져 있다면 왜 만년필 스케치를 고집하는지 의아하기 마련이다. 책을 읽으며 왜 스케치여야 했는지, 그리고 왜 다루기 힘든 만년필인지를 쉽게 알게 된다. 스케치에서 작가의 고된 작업이 느껴지는 것처럼 여행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빠름과 신속이 우선시되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 주목받는 시대에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경계를 발견하는 기쁨을 찾고, 숨은 골목을 일부러 찾아가는 데서도 그 고집스러움을 읽을 수 있다.

 

역사의 흔적을 더듬는 방법 또한 느림이고 냉철함이다. 화려함에 압도되어 감탄을 연발하는 우리 모습은 그래서 인간적이지 못하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라 그 돌덩이 밑에 깔린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는 감수성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길을 잃을망정 그곳에서 또 다른 체험을 하는 것 또한 그에겐 기쁨이고 추억이 된다. 교통수단이 발달했지만 걷는 것만큼 값진 체험을 주지 못할 것이고, 결국 모두가 걷던 시절에 만들어진 사람의 도시였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이동 수단 또한 그에게는 사색의 주제가 된다.

 

"나는 강렬한 그 느낌과 모습을 스케치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런 인상을 받을 때마다 스케치를 하는 것은 비단 오사카뿐 아니라 어느 도시를 여행하건 줄곧 내 여행을 지배해온 일관된 흐름이었다. 마치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귀찮더라도 언더라인을 표시해두듯. 그래야만 후일 책장을 대충 훑어도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 내 결핍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여행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스케치로 남겨둔 풍경은 먼 후일 많은 기억과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들 것이라 믿었던 거다." (본문 192쪽)

 

저자는 고통을 견디는 방법으로 항상 만년필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적는 편이라고 한다. 글로 적어 놓으면 어렴풋하던 것이 선명해지고, 그림을 그려보면 그 풍경 속에 안온해진다고. 따라서 이 책은 저자만의 삶을 견디는 방법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그림은 날카롭고, 글은 솔직하다. 저자는 그곳의 일상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을 구경하는 일보다 자신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남들의 기이한 삶, 뜻있는 삶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 이상으로 바로 지금 저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마음이 여행에서 더 필요하다. 그때에 비로소 남의 삶과 풍경이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여행의 진짜 묘미이지 싶다.

 

개인적으로 창경궁, 덕수궁, 경복궁 등 책에 소개된 서울의 궁의 뒷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평소 궁하면 옛것의 아름다움을 먼저 떠올리고, 아이들과 함께라면 교육적인 측면을 떠올리기 쉬운데, 거기에 누군가의 한과 고독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쉽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깊이 있는 여행을 해본 적이 없고 단편적인 것들만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리라. 여행의 가치는 보고 즐기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슬픔과 아픔까지도 느끼고 체험해 보는 것이다.

 

흔히 책을 통한 여행도 양적인 것보다는 질적인 여행을 하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독을 통해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여행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 곳을 가더라도 여행지에 대한 풍부한 사전 지식도 필요하고 많이 보려고 하기보다는 한 곳을 보더라도 깊이 관찰하고 들여다 보고 그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참된 여행이 될 것이다. 보여지는 멋지고 화려한 것 이면에 감춰진 숨은 속살을 봄으로써 느끼고 깨닫고 돌아올 수 있는 것 또한 여행이 주는 참된 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요즘 하는 여행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사진 기술의 발달은 수많은 인증샷을 쏟아낼 뿐이고, TV 매체의 영향으로 여행지 하면 맛집이 먼저 떠오를 정도다. 남들이 한 번쯤 들른다는 곳을 들러야 진짜 여행을 한 것 같은 착각을 할 때도 있다. 보다 의미 있는 것들을 보려는 노력들을 의식적으로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좋을 그림>이 보여주는 진득한 그림과 깊은 성찰이 돋보이는 여행이 그리운 이유이다.

 

여행은 언제나 옳다. 여행 후 풀리지 않은 여독에 삶이 다시 고달플지언정 여행은 늘 옳았다. 그런데 누구나 다 보는 것을 보고, 누구나 다 가는 곳을 가고, 누구나 다 먹는 것을 먹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여행도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따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런 보여주기식 여행을 자제하고 있다. 정말 여행이 필요할 때, 꼭 가봐야 할 이유가 있을 때 과감 없이 떠나려고 한다. 그래서 늘 마음은 준비되어 있다. 보다 가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한 나름의 여행을 준비하는 마음이랄까. 여행은 남을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떠나는 것이며 편파적이고 사사로운 여행이 되어야 함은 실로 그러하다. 여행을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남의 눈을 즐겁게 하는 데 있지 않고, 나의 성찰이 먼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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