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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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김훈 작가님의 책을 올 초에 처음 접했다. <자전거 여행>이라는 책이었다. 원래 책에 줄을 치거나 메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나는 <자전거 여행>을 읽으면서 책의 대부분에 밑줄을 그었더랬다. 이건 중요한 내용이라던가, 이 문장은 멋지다라던가 의도된 생각에서 했던 것은 아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펜을 들고 밑줄을 긋고 있었다. 그전에 접해보지 못 했던 마음을 흔드는 문장들이 나의 손을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김훈 작가와의 만남이 그때가 처음이었고 이어서 다른 작품들도 찾아서 읽어봐야지 하던 참에 <라면을 끓이며>라는 산문집을 만났다. 자전거 여행이라는 친근한 소재가 문장 속에서 갖가지 생각들이 빛났었고 새로운 이야기가 끊임없이 발견되는 놀라운 경험을 익히 했던 터라 <라면을 끓이며> 또한 우리가 먹고 사는 일, 너무나 일상적인 그러면서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 했던 새로운 생각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라면을 끓이며>는 이전에 출간되었던 산문 중에서 작가가 선별한 산문과 새로 쓴 산문 몇 편을 엮은 책이다. 낮고 순한 말로 이 세상에 말을 걸고 싶었다던 작가의 마음이 낮지만 깊게, 순하지만 울림 있게 전해진다. 차례만 봐도 그랬다. 밥, 돈, 몸, 길, 글 등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친숙한 주제이지만 그 주제를 풀어내는 작가만의 삶의 철학은 여러 번 읽고 음미하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에게 여행은 세계의 내용과 표정을 관찰하는 노동이라고 말한다. 계절에 실려서 순환하는 풍경들, 노동과 휴식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 지나가는 것들의 지나가는 꼴들, 그 느낌과 냄새와 질감을 마음속에 저장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생활의 영원성을 몸소 충분히 느끼고 체험하며 끝내는 그 많은 느낌들이 대부분 언어화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할 정도이니 저자에게 삶이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면서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의미를 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면을 끓일 때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리라.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계장의 닭들과 사지를 결박당한 과수원의 포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들과 양식장에서 들끓는 물고기들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는 36억 개 라면의 그 분말수프의 맛을 생각한다. 파와 계란의 힘으로, 조금은 순해진 내 라면 국물의 맛을 36억 개의 라면에게 전하고 싶다." (본문 31쪽)

 

'세월호'에 관한 단상은 답답했던 마음을 속 시원하게 뚫어준다. 사고가 있고 잠시 참회를 하는 듯했던 정부나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태도에 대해 누구 하나 속시원히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그저 마음으로 느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가 느꼈던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가 없어서 끔찍한 재앙을 당한 소수자의 불운으로 자리 매겨졌다. 진상 규명 보다 경제 회복이 우선이었고, 소수의 고통 따위 우는 자들만의 것, 루저들만의 것으로 밀려나야 했다. 저자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나라의 통치구조 전체가 보여준 붕괴와 파행이 곧 또 다른 난파선이라고 말한다. 양태는 다르지만 뿌리가 같아서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고 과거의 사태가 오늘의 사태로 터져 나오고, 오늘의 사태가 미래의 사태를 예비하고 있으며 이 난파선은 아직도 표류중이라고 말이다. 뼈 있는 말에 숙연해진다.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벗어던져야만 먹고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시장의 논리도 아니고 분배의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법치주의가 살아 있어도 법이 밥을 먹여줄 리는 없고, 밥은 각자 알아서 벌어먹어야 하는 것인데, 법치주의를 포기해야만 밥을 벌어먹기가 수월해진다면 이 가엾은 중생들의 밥은 얼마나 굴욕적인 것인가." (본문 166쪽)

 

어떤 책은 읽고 나면 마치 세상을 다 알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정작 진짜 세상을 본적도 느껴본 적도 없고 글로 이해했을 뿐이면서. 반면에 어떤 책은 읽고 나면 세상을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가 겸손해지는 것이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착각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보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느끼는 것 그 이상으로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는 것, 내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그 이상으로 무수히 많은 언어들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때 겸손해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우리를 가장 낮은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깊이 들여다보고 파고들고 생각하는 삶을 향하게 할 것이다. 맑은 가을날, 소리를 낼 수 없는 이 세상의 사물들이 바람에 스치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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