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채링크로스 84번지> 책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단지 제목이 끌려서 집어 들었던 책. 어떤 내용인지 조금만 읽어봐야지 했다가 재미있어서 간직하려고 주문했던 책이다. 이 책이 도서 구매자와 서점 주인이 무려 20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책이므로 나는 그들이 주고받은 20년의 긴 세월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왜 그토록 이 책이 끌렸던 것일까. 단순히 꼽아보자면 도서 구매자와 서점 주인이 주고받은 편지라는 자체가 흥미롭다. 손편지는 이제 구시대 유물이 되어버린 탓인지 편지하면 낭만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고, 찾고자 한다면 뭐든지 구할 수 있는 요즘 시대에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찾아 바다 건너 멀리까지 편지를 보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궁핍한 시대에 대한 향수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가치 있고 소중해지는 무언가를 이 책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아닐지. 무엇을 애타게 갈구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마음을 다해 수고해 본 적이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한다. 게다가 그곳이 어디인지 왠지 찾아보고 싶고, 가보고 싶게 만드는 런던의 채링크로스 84번지이다. 헬렌 한프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줘야 할 것만 같기도 하고.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나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이 책이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사무적인 업무에서 시작해 편지로 우정을 쌓아가고 서로의 삶을 공유해 나가는 방식이다. 본적도 없고, 멀리 떨어져 있고, 단순히 책방과 구매자라는 순수한 관계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주위 사람들을 챙긴다는 것이 가능할까. 게다가 구매자는 까다롭고 쌀쌀맞기 그지없다. 서점 주인도 무뚝뚝하고 사무적이다. 그럼에도 자그마치 20년 동안 편지로 우정을 쌓아갈 수 있었던 것은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서점 가는 것도 귀찮아서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것이 보편화된 지금 그런 낭만이 가능했던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늘 어딘가 부족했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살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풍족하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순수했고, 따뜻했고 풍요로웠던 그때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보물 같은 시간들이 이 책 속에는 있다.

 

"친애하는 헬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먼젓번 편지에서 요청한 세 권이 일제히 당신한테 가고 있습니다. 일주일이면 도착할 겁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묻지 말아요. 그저 마크스 서점의 서비스라고만 생각해줘요."

 

우체통 안에 들어있는 편지 봉투만 봐도 설렜던 기억이 있다. 사랑도 연애도 이별도 편지로 했었던 시대가 있었다. 중요한 연락도 편지가 대신하던 시대였다. 이 세상에 편지를 대신할 낭만이란 없다고 믿었던 때가 있어서인지 작은 메모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갈수록 나이를 먹듯 편지도 빛도 바래고 짐처럼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버릴 수도 없다. 그것을 버린다면 나의 젊은 날 추억도 함께 버리는 것일 테니까. 요즘 우체통을 보면 쓸데없이 광고지들만 넘쳐난다. 모든 것을 디지털 기기가 대체하는 시대가 오면 우체통도 사라질까. 소중했던 것들이 자꾸만 사라져가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그렇다고 어쩌지도 못할 거면서. 시대의 변화에 충실히 따라갈 거면서 아쉬워만 하고 있다. 소중한 시간의 보물을 꺼내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쩜 우리 세대는 행복한 세대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것은 행복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제는 사라지고 기념 동판만이 남은 런던 채링크로스 가 84번지에는 헬렌 한프의 마지막 부탁을 기억하는 독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서점 주인과 한프가 주고받은 편지가 주는 감동에 독자들도 큰 신세를 지고 있어서일까. 삶의 기적의 맨 처음은 소소한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책방과의 소중한 추억, 서점 주인과의 특별한 인연 하나쯤 있었으면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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