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따라쓰기 처음책방 필사책 4
박인환 지음, 김기태 엮음 / 처음책방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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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한 권의 시를 읽고, 마음을 들여볼 수 있는 여유가 있기를

오랜만에 시집 한 권은 오랜 시간 동안 읽었다. 박인환 시인의 <박인환 따라쓰기> 책이다. 이 책은 필사책으로 박인환 시인의 시가 45편 수록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필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줄칸으로 되어있다. 동시는 틈틈히 읽는 편인데, 오랜만에 시를 읽으니 다소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여러 번 읽어본 시들이 꽤 되었다. 조금이라도 시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말이다. 다 이해가 간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좋았던 시 두 편을 소개해 본다.



<박인환의 따라쓰기> 시집에서 인상 깊었던 시 두 편

행복

노인은 육지에서 살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시들은 풀잎에 앉아

손금도 보았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정사한 여자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때

비둘기는 지붕 위에서 훨훨 날았다.

노인은 한숨도 쉬지 않고

더욱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성서를 외우고 불을 끈다.

그는 행복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거저 고요히 잠드는 것이다.

박인환, <박인환 따라쓰기>, p.96

박인환 시인은 1950년대에 활동한 시인이다. 여전히 우리나라가 혼란한 시기에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박인환 시인은 심장마비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마와 숙녀> 는 시인의 사후 20년이 지난 1976년에 시집으로 나오게 된다. 이번 <박인환 따라쓰기>에 수록된 45편의 시가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내가 좋았던 '행복'이라는 시를 다시 살펴보자. 일단 시인이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어떤 시를 썼을지 궁금했다. 최근에 독서모임에서 행복에 대한 각자의 개념을 나눠보았다. 행복에 대한 내가 내린 두 가지 생각이 있다. 첫 번째는 '행복을 달라 했는데 감사를 배우라했다.'는 표현이다. 이 문장은 내가 만든 것은 아니고, 어떤 행사에서 캘리그라피로 예쁜 문장을 써주었는데, 내가 고른 글귀다. 생각해보면, 행복은 감사를 인식하는 데서 부터 오는 듯하다.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우리는 애를 쓰지만, 사실은 그 옆에 수 많은 행복의 세 잎 클러버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두 번째 행복에 대한 생각은 '행복은 포착하는 것이다.'라는 점이다. 무엇 무엇을 하면(이루면), 행복이 오겠거니가 아닌, 하루하루의 행복한 순간을 내가 발견하고, 그 순간을 충분히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박인환 시인의 행복에서도 노인은 거창한 행복을 바라지 않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차 한잔을 마시고, 성서를 외우고, 고요히 잠드는 일상. 시인에게 행복이란 평온함이 아니였을까? 가장 좋았던 문장은 "시들은 풀잎에 앉아 손금을 보았다"는 표현이다. 풀잎을 고요히 바라보았을 시인의 눈이 떠오르고, 풀입을 바라보다보니 시인의 시상이 풀입에 내려앉아을 것만 같다. 참신하고도 예쁜 표현이다.

목마와 수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라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이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박인환 따라쓰기>, pp.6~9

어디서 한 번쯤 들어본 시였다. 이 시가 박인환 시인의 시라는 것을 몰랐을 뿐. 이런 시는 어떻게 음미해야 할까? 시의 의미를 알듯말듯 하다.

처음책방 필사책 시리즈의 네 번째. <박인환 따라쓰기>

좋은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장 위대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며,

그것을 따라 쓰는 것은 그 위대한 사람의 마음에 내 마음을 보내는 일입니다.

<박인환 따라쓰기> 중에서

처음책방 필사책 시리즈에는 김소월, 김영랑, 윤동주 등이 있다. 이번에 내가 읽은 시리즈는 네 번째로 내가 잘 몰랐던 박인환 시인의 시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책 뒷 부분에 있는 '김기태의 초판본이야기'도 흥미롭다. 시집을 읽다가, 멈춰보고, 필사해본다면, 이번 겨울 같은 가을의 어느 순간을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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