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뫼르소는 이럴 때 바다에 해수욕을 하러 가던데… 그러자 마음속의 제정신이 나에게 충고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뫼르소는 사형을 당하는 거야. 엄마를 묻고 와서 해수욕이나 하러 갔다고 말이야."
나는 마룻바닥에 반듯이 누워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천장에서 거미 한 마리가 줄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다가 다시 그 줄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거미의 움직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빛나가 외톨이가 된 나를 내버려 두어서도 아니고 장례식에 오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스물일곱의 그 저녁에, 남들은 눈부신 청춘이라며 부러워하는 스물일곱의 그 밤에, 나는 내 생이 어쩌면 이렇게 하찮게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계시와도 같은 예감에 직면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삶, 여자친구의 대학원 숙제는 도맡아 해주면서도 정작 필요할 때는 버려지는 이런 삶은 앞으로 찾아올 찬란한 인생의 전주곡, 그러니까 고진감래라고 말할 때의 그 ‘달콤한 고(苦)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삶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아, 그러나 나는 결코 내 인생이, 예고편이 전부인 뻔한 영화가 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인생을 바꾸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뭘까? 가장 간단한 일은? 그것은 빛나와 헤어지는 것이었다. 아, 그 동안 왜 이 생각을 한번도 못 했지? 해수욕을 가는 대신 빛나를 차버리는 거야. 나는 빛나에게 건화를 걸었다.
빛나가 전화를 받자 나는 불쑥 찾아온 통찰과 홀로 내린 결단에 대해 말했다.
"우리 그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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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이 되자 그 아이가 전교 회장 선거에 나왔다. 왕따 없고 싸움 없는 학교, 모든 아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정 많고 따뜻한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어른들도 홀딱 넘어갈 만큼 말을 참 잘하는 아이였다. 여러분! 밀레니엄 시대에 걸맞은 참된 어린이, 여러분의 진실한 봉사자! 부지런하고 참된 일꾼! 뽐내거나 거만하게 굴지 않고 학생 한 명 한 명을 진심으로 대하는 그런 회장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말이 아니라, 그 아이의 잘나가는 친구들과 저학년부터 반장을 해온 전력과 두둑한 용돈에 반했다. 시의원을 여러 번 하신 저희 아버지는 저에게 매일 밤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 남의 말을 먼저 듣고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정의감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저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하고 당당히 말하던 그 아이는 모두의 예상대로 전교 회장이 되었고, 그날부터 동하는 그 아이와 어울려 다니는 패거리의 시비와 무시에 시달려야 했다.
- P271

절대 좋아지는 법 없이 어제보다 오늘 더 어렵고, 오르고, 좁아지는 것. 그게 세상이었다.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평평한 대지에선 많은 사람이 어울려 살 수 있었지만,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대지가 품을 수 있는 생명은 한정되었다.
- P279

부끄러운 기억이 사람의 평생을 지배하는 기라.
엄마가 말했다.
좋거나 즐거운 기억이 아이라, 부끄러운 거이.
한 엄마는 동하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고, 다른 엄마는 동하의 입가를 젖은 손수건으로 살살 닦아줬다.
남들도 다 아는 부끄러운 거보다, 지 혼자만 아는 부끄러운 거이, 그런 게 평생을 따라가는 기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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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 P60

꽃씨를 거두며
도종환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것이 남아 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
- P62

산에 가면
조운산

산에 가면
나는 좋더라
바다에 가면
나는 좋더라
님하고 가면
더 좋을네라만!
- P90

사랑은

김남주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보며.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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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P28

갈대

신경림

언제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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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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