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미 말한 바 있잖아요. 사랑의 본질은 권력욕이라고, 그 당사자에게 매혹적인 것, 그 당사자의 생존에 가장 유익한 것, 그 당사자의 욕망과 일치하는 것이라고요. 사랑은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유지시키려는 본능과 맞닿아 있어요. 생식을 통한 종족 보존의 욕구까지 포함해서 말예요.」
「맞아요. 나는 사랑을 권력욕이라기보다는 생존 본능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아기들이 왜 엄마를 좋아하겠어요? 단지 엄마니까?
아니에요. 젖을 주고 보살펴 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예요. 아기에게 엄마는 생존 그 자체죠. 학생들이 교사를 사랑하는것, 여직원이 부서장을 흠모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교사나 부서장은 그들이 소속된 조직에서 그들의 생존을 좌우하는 존재인 거예요.」
박정연의 말을 이번에는 최미라가 받았다.
「그래서 에로스가 생명과 창조의 신인 거죠. 어렸을 때는 그 말을,
남녀의 사랑을 통해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 직접 사랑을 해보니 그 말의 다른 뜻이 이해되더군요. 에로스는 그 당사자의 생존 욕망의 척도예요. 인간은 사랑의 감정 없이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실은 자신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런다는 것, 누구나 사랑을 통해 생명 현상을 지속시킬 힘을 얻고 싶어한다는 것, 그런 것들이 이해되더군요.」
「그러니까 세 분 말씀은, 사랑은 삶을 지속시키는 힘이고, 사랑을 찾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노력이라는 뜻인가요?」황정미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복습하듯 되물었다. 세 사람이 그렇다고 답하는데 문득 윤영우의 소녀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세 분 얘기 들으니 굉장히 허무한데, 나는 오히려 사랑을 미학적 체험이라 생각해요. 그냥 사심 없이 아름답고 마음에 드는 것, 그것을 사랑이라고요. 예를 들어 저기 꽂혀 있는 저 꽃, 저게 그냥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요. 사람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잖아요. 내 눈에 아름답고 좋아 보이는 것, 그런 게 사랑 아녜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랑을 사회화된 체험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좋다는 감정이나 전기가 통하는 필링, 권력 지향이나 미학적 가치판단조차 사실은 사회화된 경험에서 나온다는 거죠.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말하는 순수하게, 사심 없이, 첫눈에 반했다 등등의 표현조차 이미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이고 언어인 거예요.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저 남자가 내 생존에 유익하다고 판단하는기준은 모두 사회적으로 습득된 지식이죠.」
좌중이 잠시 조용해졌다. 진희숙의 주장은 권인경이나 박정연의 주장보다 더 삭막한 느낌이었다. 특히 윤영우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세진은 앞접시에 코를 박고 갈비찜 한 토막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즈음에야 인혜는 세진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방에 들어온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한 대의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사랑을 소통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대화가 통한다든가 정서가 통한다든가 하다못해 미움의 감정이라도 서로 통하면 그 속에서 친밀감이 싹트고 사랑이 생기는 게 아닌가…….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을 찾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소통이 중요한 게 아닌가……….」
구자연의 조심스러운 주장에 즉각 말을 받은 사람은 다시 권인경이었다.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이라는 게 가능해요? 인간의 자아가 얼마나 완강하고, 타인을 이해한다는 행위조차 자신의 프리즘을 통해 받아들이는 오해이기 십상인데,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어요? 나는 사랑하는 행위야말로 가장 정직한 나르시시즘이구나 생각될 때가 많아요. 자기에게서 나가서 상대를 통한 다음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이 아닐까 하는 거죠. 」
「사랑에 대해 피력하는 서로 다른 얘기들을 들으니 저마다 고유한 정서적 센서로 사랑을 받아들인다고 생각되네요. 그런데 가 고유한 정서적 감응 장치란 대체로 저마다의 상처거나 콤플렉스임에 틀림없어요. 그러니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사람을 고르고, 가난을 상처로 가진 사람은 부자를 찾죠. 학력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그 부분을 충족시켜 줄 사람을,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권력 가진 자를 선망하죠.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여러분이 하는 말은 곧 여러분 각자의 상처나 콤플렉스일 거예요.」
세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한두 명,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었다. 인혜도 그 의견에는 동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라는 것도 대체로 콤플렉스와 콤플렉스의 만남일 경우가 많아요. 거짓말쟁이 아내와 의처증 남편이, 모성 과잉인 여성과 유아적인 남성이, 아니무스가 강한 여성과 아니마가 강한 남성이,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많은 사람이, 가학증 아내와 피학증 남편이…… 그런 사람들이 서로 첫눈에 상대를 알아보죠. 아, 내가 비빌 언덕이 바로 저기구나.」「맞아요, 맞아요. 주변에 그런 식으로 만나는 커플을 많이 봐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잘 살잖아요.」「그 노이로제를 버리지 않는 한 잘 살겠죠.」「그렇다면 객관적인 조건들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선택하는 건왜 그런 거예요? 그런 선택은 권력욕이나 보상 심리와는 배치되잖아요...」
「그건 본인이 가진 자기 이미지가 낮거나, 누군가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사람의 사랑법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