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정치는 몸에 깊이 각인된 아픔으로부터 터져나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미래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로부터 도래할 것이다. 법과 제도가 누구를 차별하고 배제하는지, 시스템의 보호가 어느 지점부터 작동하지 않는지, 정책의 사각지대에서 누가 먼저 죽어가는지, 그 한계를 가장 일찍 몸으로 겪어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득권이 억누르는 공기가 너무 무거워서 숨쉬는 것조차 버거운, 그래서 결국 기득권의 질서 속에서 살기를 거부하기로 한 사람들은 새로운 정치운동을 시작하기도 한다. 우리가 이루고싶어하는 대항 미래 counter-futurees를 선제적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소수만 누리는 자유가 아닌 모두의 해방을 위해, 점진적 개량이 아닌 발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이들이 추구하는 정치가 바로 예시의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다.
 예시의 정치는 기존의 틀에 갇힌 낡은 세계관으로 구상하거나 실천할 수 없는 정치다. 단순히 기존의 사회 구조에 대항하는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가 이미 우리에게 도래했다는 신념으로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스스로 실행하고 만들어가는 정치다. 비록 일시적이고 잠정적일지라도 대안적 사회관계를 우리의 현재 속에서 실현하려는 움직임이다. 사회운동가들의 소모임, 생존자들의 쉼터, 노동조합, 진보정당, 새로운 이론을 공부하고 생산하기 위한 동네 책방 모임, 대안적 주거 공동체, 선택 가족chosen families, 퀴어 커뮤니티와 같은 시공간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구성원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충분히 급진적이고 대안적인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을 우리 안에서 실현하면서 일시적 대안 세계 temporary alternative world를 우리의 현재 속에 구축하려는 협력과 연대의 노력이 바로 예시의 정치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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