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민족주의적 영웅상에 기반하여 소설이 출간되고 영화도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왜곡된 민족주의적 색채가 덧입혀진 이런 천재 영웅상은 사실과 전혀 무관합니다. 이 이야기는 원래 시인 공석하의 소설 『핵물리학자 이휘소』에서 비롯되었습니다(나중에 『소설 이휘소』로 제목이 바뀌었고, 다시 『이휘소』로 변경되었습니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앞에 내건 소설가 김진명도 이 소설을 기반으로 하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집필했고, 이 작품은 그의 출세작이 되었습니다.

공석하의 소설에 박정희가 이휘소에게 보냈다는 문제의 편지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공석하가 지어낸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공석하의 소설을 이휘소 박사에 대한 전기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김진명의 소설도 거의 그렇게 수용되었고, 심지어 공석하의 소설보다 훨씬 더 많이 읽혔습니다. 이휘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다면, 이휘소의 제자 강주상이 쓴 『이휘소 평전』을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유명인에 대해 깊고 넓게 알고 싶을 경우에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객관적이고 심층적으로 다룬 평전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그런 평전이 출간되어 있다는 전제가 따라붙겠습니다만.

이런 상황에 분노한 유족은 급기야 고소장을 제출했고, 피고는 물론 공석하와 김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조차 피고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소설의 상당 부분이 허위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소설로 인해 망인의 명예가 더욱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낮아진 건 아니라고 판단한다’라는 것이 판결문의 요지였습니다. 이러한 판결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사법부는 소설과 르포의 차이가 엄중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거나, 제대로 몰랐던 것이겠지요.

독자 대중을 미혹하고, 이에 사법부마저 편승하게 만든 이 사기극은 하나의 코미디입니다. 이는 대중의 장르에 대한 이해 부족과 연결됩니다. 소설에서 주장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소설은 소설입니다. 오죽하면 팩션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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