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인간의 정신 중 무엇이 우월할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정신보다 진리가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으로는 진리를 바꿀 수 없다. 진리와 인간의 정신이 똑같이 우수하다면 인간의 정신이 변할 때마다 진리도 변해야 한다. 그러나 진리는 절대 인간의 정신에 따라 변하지도 않고, 변할 수도 없다.
진리는 인간에게 꼭 필요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필연적이고도 불변적인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가 있기에 인간은 정신을 통해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진리는 인간의 정신이 스스로를 인식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인간 인식은 진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럼 진리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진리는 인간의 정신보다 우월하고, 인간의 정신으로는 진리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즉, 진리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신의 것이라고 했다. 특히 영원한 진리가 신의 것으로, 진리는 신에서부터 왔다고 그는 주장한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하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신 존재 증명 방법은 단순한 이론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변증법적인 방법으로도 증명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정신으로 신을 체험하고 경험한다는 것과 신을 향한 인간의 적극적인 태도가 전제되어야 그의 증명 방법은 가능하다. - P172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진리는 인간의 정신이 겪은 내적인 체험이나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고 했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 안에서 행복을 찾지 않으면 밖에서 행복을 얻지는 못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보았다. 행복을 무엇인가 외적인 것에서 찾는다면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행복할 수 없다.
- P173

홉스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각을 중심으로 외부의 것들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고 홉스는 보았다. 사람들은 외부의 인식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하는 원동력은 또 무엇일까? 홉스는 욕망과 공포라고 주장한다. 홉스는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힘의 욕망인 권력이라고 했다. 강력한 힘인 권력이란 욕망이야말로 죽을 때까지 미래를 책임질 힘이라고 믿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공포를 만들어 낸다. 인간은 약한 존재여서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공포를 느낀다. 공포를 느낄수록 인간은 강한 힘을 욕망한다. 결국 사람은 공포와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누구도 갖지 않은 강력한 권력을 가지려 하거나 이미 가진 사람과 가까이하려 한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은 누굴까? 당연히 왕이나 군주다. 사람들은 왕의 통치권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성이 아닌 감각으로 외부를 파악하는 인간은 자신을 움직이는 힘이 곧 욕망과 공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자 한다. 최소한 그런 사람과 가까이해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있는 것이다.
- P182

모든 사람에 의한 모든 사람의 투쟁

자연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인간은 육체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 중 어느 하나가 특별히 우월하지 않고 평등하다고 홉스는 보았다. 사실 육체적인 부분이 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적인 부분이 강한 사람도 있다. 홉스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육체적인 능력과 정신적인 능력이 평등하다고 보고, ‘능력의 평등‘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능력이 평등하다는 것은 자연을 헤쳐 나가는 사람의 능력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곤 해도 사람마다 이루는 것은 다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목적을 정하고, 그 정해진 목적을 최선을 다해서 이룬다. 이런 능력을 흡스는 ‘희망의 평등‘이라고 했다. 능력의 평등이 같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희망의 평등도 같다고 믿는다. 인간은 미래를 전혀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희망의 평등만 믿고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도전한다. 최악의 경우 희망의 평등은 전쟁으로 이어진다.
홉스는 사람들이 희망의 평등만 믿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인다고 주장한다. 자연 상태에서 일어나는 투쟁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자연 상태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정당성을 갖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욕망이 아닌 이성을 중심으로 자연법을 만들었다. 자연법은 모든 나라의 법 제정에 기초를 이루었고, 법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 사이의 투쟁은 끝이 났다. 법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잘못이라는 점을 분명히 명시했기 때문이다.
- P184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과 함께 날개를 편다.

지혜의 여신을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테나로, 로마 신화에서는 미네르바로 부른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사랑한 식물은 올리브 나무이고, 사랑한 동물은 올빼미로 알려져 있다.
헤겔은 역사도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변증법의 특징상 모순과 부정의 단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생긴 모든 과정을 그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분명 역사는 모순이며, 비극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런 역사는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를 가져올 수도 있다.
헤겔이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역사적 사건인 프랑스 대혁명을 보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왕권 정치는계속 이어져 왔을 것이다. 왕권 정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프랑스 대혁명은 분명 퇴보이다. 모순이며 부정의 단계임에 틀림없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프랑스 대혁명은 중세 암흑기를 끝내는 획기적이고도 혁명적인 사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발전적이지, 비극적인 사건은 아니다.

헤겔은 역사란 다른 역사적인 사건에 의해 모순과 부정의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한다고 믿었다. 프랑스의 왕권 정치가 정명제라면 프랑스 대혁명은 반명제이고, 그를 통해 얻은 중세 암흑기의 종말과 왕권 정치의 종식은 곧 종합명제에 이르게 된다. 만약 하나의 사건만 두고 본다면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보는 역사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헤겔은 역사란 좁은 안목이 아닌 넓은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는 말이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그래도 종종 ‘만약 ~했더라면‘ 하고 생각해 본다. 헤겔의 관점에서 ‘만약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았더라면‘ 하고 가정해 보자, 역사는 바뀌겠지만,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가정에 불과하다. 이를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에 비교한다.
올빼미는 특성상 모든 사람과 사물이 잠든 사이 깨어 있는 동물이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과 함께 날개를 편다고 말했다. 낮 동안 일어났던 일을 모두 지켜본 올빼미는 모두가 잠든 사이에 무엇을 할까?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은 그 자체만으로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은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생긴 원인의 결과일 수도 있고, 아무리 파헤쳐도 드러나지 않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낮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올빼미는 사건에 대한 내막을 알고 있을까? 헤겔은 모든 일이 지나간 다음에 안다는 것은 역사를 인식하는 조건이라며 추사고라고 하였다. 올빼미가 낮에 본 것을 밤에 조용히 생각하듯이, 역사적인 사건은 그때 판단하고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말고,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생각하고 조명해야 보다 잘 보이고 선명하게 인식된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 P193

정치에 뛰어든 헤겔의 제자들은 국회는 다른 정치권이든 늘 함께 모여 다녔다. 그들은 늘 좌장을 중심으로 왼쪽에 모여 있었다.
헤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정치인들은 그들을 피해 당연히 오른쪽에 모였고, 젊은 헤겔의 제자들을 좌파라고 불렀다. 좌파라는 말은 오늘날 정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정치가들을 좌파라고 부르는 계기를 헤겔의 제자들이 만든 것이다. 
- P201

‘없는 곳‘이란 의미를 가진 유토피아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다. 그는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상 국가란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에 의해 이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국가를 말한다. 이상 국가는 절제, 용기, 지혜가 조화를 이룬 정의로운 사람이 사는 정의로운 국가이다. 과연 이런 나라가 있을까?

오늘날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를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형태에서 찾는다. 플라톤은 이 제도를 아주 싫어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5년 후 소크라테스에게 민주주의에 의한 재판 방법을 통해 사형이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이때부터 플라톤은 민주주의 정치 형태를 증오하면서 새로운 정치 형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플라톤이 주장한 새로운 정치 형태가 이상 국가이다.
- P207

‘스파르타식 교육‘이란 말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얼마나 엄하게 교육을 시켰는지, 자식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살아남는 놈만 키우는 사자처럼 스파르타 사람들도 그렇게 했다고 알려졌을까! 절벽에서 떨어져 살아남는 아이는 많지 않다. 그만큼 스파르타식 교육의 엄격성을 강조하여 과장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기원전 8세기에 살았던 전설적인 스파르타의 입법자는 리쿠르고스다. 그는 스파르타를 군주 국가로 바꾸면서 스파르타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교육에 중요성을 둔 그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받아야 할 교육과 자라면서 행동해야 할 도덕적인 내용까지 모두 정리하였다. 이것이 스파르타식 교육의 시작이다.

플라톤은 이상 국가를 건설함에 있어 무엇보다 교육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 교육 내용의 대부분은 리쿠르고스의 교육에서 가져왔다. 약하고 힘없던 스파르타가 강했던 아테네를 이긴 이유를 플라톤은 교육에서 찾았으며, 그 교육의 시작이 리쿠르고스라고 보았다.

모든 사람이 꼭 필요로 하는 공부는 무엇일까? 플라톤은 두 개의 과목으로 보았는데, 하나는 음악이고 하나는 체육이다. 당시 도시 국가는 항상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언제 어떤 나라가 어떤 나라와 동맹을 맺고 전쟁을 벌일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 살았다. 전쟁의 위험 속에서도 살아남을 방법을 플라톤은 교육에서 찾았던 것이다.
음악은 두말할 것 없이 사람들의 정서적인 면을 강하게 해준다. 체육은 전쟁에 필요한 강인한 체력을 기르기 위해 필수적이다. 음악과 체육을 통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육체적으로 강인해지는 것이 이상 국가의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첫 번째 자격이라고 플라톤은 보았다.

이상 국가를 구상하다

플라톤 철학의 정점은 이상 국가의 건설이다. 어떤 나라가 이상국가일까? 플라톤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정의로운 나라, 정의로운 개인이 전제 조건이다. 또한 철학을 배운 통치자가 자신의 철학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 그러기 위해 통치자는 절제, 용기, 지혜를 발휘하여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백성들도 모두 정의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백성들은 각자 자신의 직위와 직업에 따라 필요한 덕목을 발휘하여야 한다. 그런나라가 이상 국가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상 국가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서민들로이상 국가에서 가장 많은 부류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 덕목 중에서도 절제를 지키며 살면 그만이다. 그 다음의 부류는 군인으로, 절제와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적지만 꼭 필요한 사람으로, 철학을 배운 통치자들이다. 절제, 용기 외에도 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서민들의 절제, 군인들의 용기, 통치자의 지혜가 잘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사는 나라가 이상 국가이다.

정의롭게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사유 재산 제도의 폐지이다. 나라의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해야 한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공유한다. ‘나‘의 부모, 나의 자식이 아닌 ‘우리‘ 부모, ‘우리 자식으로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해야 한다. 통치자는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게 사유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 비와 바람을 막을 집과 추위와 더위를 피할 집, 꼭 필요한 옷과 허기를 면할 정도의 음식만 지급될 뿐 다른 어떤 것도 통치자에게 지급되어서는 안 된다.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신구와 사치품도 통치자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물건이다.
플라톤은 개인과 국가의 덕목인 절제, 용기, 지혜가 잘 조화를 이루어 개인의 정의와 국가의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 한 나라의 모든 시민들이 자유롭게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나라가 진정한 이상 국가라고 보았다.
- P211

마키아벨리는 지나간 모든 민족과 나라의 역사를 연구하여 한가지 결론을 얻었다. 남을 속이고 배신하는 일, 남과의 관계를 갈라놓는 일, 계약을 파기하고 거짓 맹세를 하는 일, 폭력과 비리로 세상을 경영하는 일 등이 민족을 지키고 나라를 통일하는 최후 수단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은 사소한 시비라도 꼭 보복을 한다. 죽은 사람은 절대로 보복할 수 없으며, 보복에 대한 생각도 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하려면 상대방이 보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완전히 짓밟아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어야 진정한 전제 군주가 되어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P223

"국가의 유지 발전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허용되며, 국가의 운영과 일반적인 행위에 속임수나 겉과 속이 다른 방법도 동원될 수 있다.
오늘날 마키아벨리즘의 정의다. 국가 유지에는 어떤 권모술수나 비리도 허용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 나쁜 사람들에 의해 그 반대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고통받는다. 피해와 고통을 해결해 줄 사람이 군주다. 그런 군주는 전자의 사람같이 되어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주장한다. 참아이러니하다.
- P226

1688년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고, 뒤를 이어 네덜란드의 왕이었던 월리엄 3세와 왕비 메리 2세가 함께 영국의 왕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로크도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로크는 조히 시간을 보냈다.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에게 왕위를 계승시킨 영국 의회에서는 즉위의 조건으로 <권리장전>에 서명하게 하였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과세, 군대의 징집 등을 하지 않을 것과 의회의 언론 자유를 승인하라는 내용 등이 <권리장전>에 담겨 있다. <권리장전〉으로 인해 영국의 왕들은 국가 원수로서의 역할만 할 뿐 정치에서는 완전히 물러나는 입헌군주제를 확립하였다.

〈권리장전〉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 로크다.
로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혁명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고, 혁명을 종식시키는 역할도 동시에 하였다.
- P232

로크는 왕권신수설의 부당함을 주장한다.
로크는 완전한 원시적인 상태처럼 어떤 국가나 사회가 형성되지도 구성되지도 않은 상태를 자연 상태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어떤 누구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으며, 남을 구속하지도 않는 상태이다.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산다. 로크는 자유와 평등은 신이 주었기에 완전한 자유와 평등 상태에서는 지도복종도 없다고 보았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있어서 자연 상태에서는 지배하고 복종하는 관계를 만들지 않고 서로 보호한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생명과 소유물을 다른 사람이 지배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의사를 분명히 할 수 있다. 이성적인 존재 인인간은 자연법에 따라 생활한다.
자연법은 주어진 것이다. 국왕이나 의회가 만든 것이 아니다.
자연법은 법 조항에 따라 문서화된 성문법이 아니라 문서화되지 않은 불문법이다. 로크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영국의 국왕이 만든 법은 더 이상 효력이 없으며, 자연법에 따라 만들어진 새로운법으로 통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P234

로크는 인간의 인식은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백지 상태에서 사람들은 지식을 얻는다고 했다. 그럼 경험으로 어떻게 사람은 인식을 얻을까?

로크에 따르면 사람은 감각을 통해 외적 경험을 만들어 낸다.
외적 경험에는 물체와 분리시키는 속성이 있는가 하면 없기도 하다. 전자를 로크는 제1성질이라 했다. 물체의 견고성, 연장, 형상,
운동, 개수가 여기에 속한다. 물체와 분리시킬 수 없는 속성은 제2성질로, 사람의 다섯 감각으로 얻어지는 색깔, 소리, 냄새 등과같은 것이다.

제2성질은 지각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사람마다 다르게 지각하고 인식된다. 사람에게 다섯 감각 중 한 가지라도 결여되면 제2성질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로크는 황달과 선글라스를 예로 든다. 황달이 있는 사람이 보는 사물과 건강한 사람이 보는 사물은 다르기 마련이다. 선글라스를 낀 상태로 사물을 관찰하면 다른 사람과 똑같이 인식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외적 경험은 객관적인 제1성질과 주관적인 제2성질이 합쳐 만들어진다. 사람에게는 내적 경험도 있다. 무엇을 기억하고, 구별하여 비교하고, 지각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외적 경험과 내적 경험이 합쳐진 쾌감, 고통 같은 경험도 있다고 로크는 보았다. 이 세 가지 경험을 로크는 단순 관념이라고 했다.
- P236

"세상을 창조한 것이 신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신이 창조했다. 그렇다면 악도 신이 창조하지 않았겠는가?"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지만,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은 신은 선만 창조했으며,
인간이 행동을 하면서 악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의 생각에 철학적인 이론을 더한 것이 신을 변호한다는 뜻의 변신론이다. 라이프니츠도 변신론자 중 한 사람이다.

라이프니츠는 도덕적으로 보면 선에 비해 악은 아주 적다고 생각했다. 신이 완전성을 조건으로 세상을 창조했기에 선은 완전에 가깝지만 악은 항상 불완전하다. 문제는 불완전한 악이 사람이 생활하는 모든 부분에 조금씩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 악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사람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므로 자유 의지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에 책임을 지려고 한다. 사람들은 생활 속에 늘 숨어 있는 악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선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된다.

신은 완전해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을 닮은 완전한 세계와 사람을 만들었다. 사람 역시 의지가 있어서 자유로운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자유로운 의지는 신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리 사람의 의지가 신의 의지에서 나왔다고 해도 사람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자발적인 경향이 있다. 자발적인 경향은 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무시하고 스스로 무엇을 행한다. 사람은 어쩔수 없이 신이 만들지 않은 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악은 사람의 자발적인 행동에서 나오지, 신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함께 만든 것이 아니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적인 생각이다.
- P245

라이프니츠는 대학교 교수직도 포기할 정도로 많은 분야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 하였다. 철학 외에도 신학, 수학, 과학 등라이프니츠는 철학자이지만 계산기를 발명할 정도로 수학과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수학에서 그의 가장 큰 공적은 미분과 적분의 발견이다. 영국에서는 뉴턴이 미적분을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독일에서는 라이프니츠가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연구를 표절했다고 주장하였지만, 오늘날 수학자들은 두 사람의 미적분을 동시에 인정하고 있다.
- P250

칸트에 따르면 이론적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천적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를 ‘이론이성‘이라고 하며, 후자를 ‘실천이성‘이라고 한다. 사람의 행동은 이론보다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 실천은 선을 행하기 위한 행동이다. 선에는 ‘절대적으로 선한 것‘,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이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선한 것‘도 있다.
칸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의 가치를 부나 명예, 재능, 성공과 같은 것에서 찾는다고 보았다. 분명 좋은 것이긴 하나, 어떤 사람이 갖느냐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다. 악한 사람이 부와 명예를 갖게 되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선의 가치라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재능이나 성공도 선한 사람이 가질 때와는 다르게 활용될 것이다. 이런 선은 상대적인 선이다.
절대적인 선이란 무엇인가? 칸트에 따르면 절대적인 선이란 조건과 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선한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갖느냐에 관계없이 항상 선한 가치를 지니는 선이 있을 수 있다.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언제 어디에서 갖는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을 칸트는 절대적인 선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선을 이론적으로만 알지 않고 실천하려는 의지도 갖고 있다. 칸트는 ‘선의지‘라고 불렀다. 재능과 소질에 관계없으며,
지식과 교양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선의지를 소유하고 있다. 교육을 받든 받지 못하든, 경험이 많든 적든 사람들은 선의지를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갖고 있다.
칸트는 선의지가 곧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게 한다고 보았다. 선의지는 행동한 다음 생길 어떤 이익이나 결과를 생각하지 않으며, 감정에 따라 행해지지도 않는다. 도덕적으로 옳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행해진다. 모든 사람들은 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 P256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무조건적인 명령

선의지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의무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의무에 맞는 행동을 한다. 칸트는 의무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강제로 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행동을 하게 하는 명령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무조건 해야 하는 명령인 ‘정언명령‘만이 동기주의에 맞는 명령이라고 칸트는 주장한다.

거짓말하지 마라, 빌린 물건은 꼭 돌려줘라, 약속을 지켜라 등과 같은 명령을 우리는 도덕 법칙이라고 말한다. 칸트는 두 가지로 법칙을 나눈다. 하나는 자연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당위 법칙이다. 원인과 결과를 나타내는 인과 법칙,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등은 있는 사실에 대한 자연 현상과 관계가 있는 자연 법칙이다. 자연 법칙처럼 있는 사실에 관한 법칙이 아니라, 있어야 할 사실에 대한 법칙은 당위 법칙이다. 앞의 예와 같은 도덕 법칙이 당위 법칙에 속한다.
도덕 법칙은 항상 명령 형식을 지닌다. 이것을 칸트는 명법이라고 했다. 명법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상황, 조건, 이유에 따라 생기는 ‘가언명법‘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의 여지 없는무조건적인 ‘정언명법‘이다.
왜 도덕 법칙은 가언명법이 아니라 정언명법일까? 칸트는 도덕 법칙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할 수 있어서 하는 행위는 어떤 상황이나 조건, 이유가 있기 때문에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다. 도덕 법칙은 무조건적으로 해야 하기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도덕 법칙의 행위는 가언명령이 아닌 정언명령이라고 하였다. 선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도덕 법칙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도덕 법칙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 칸트의 도덕 법칙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동기적인 것이다.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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