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변동
잉카 부족들은 결정론을 믿었고 세습적인 계급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는 직업 지도의 문제가 없었다. 농부의 아들은 농부가 되고 무사의 아들은 무사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급을 세습하는 과정에서 혹시 생길지도 모를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아이들의 몸에 금방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새겼다. 그 방법은 이러했다. 정수리가 채 굳지 않아서 숨구멍이 발딱거리는 갓난아이의 머리를 나무로 만든 특별한 바이스에 물려 놓는다. 그 바이스는 아이들의 머리통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왕의 자식들은 네모지게 무사의 아이들은 세모지게 하는 식이다. 머리통 모양을 주어진 틀에 맞추어 가는 그 공정은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벋니를 교정하기 위해 치아 보정 기구를 달고 다니는 거나 크게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물렁물렁한 머리통은 나무틀 속에서 단단해진다. 그러고 나면, 설령 왕자가 발가벗은 채 거리에 버려진다 해도 그게 왕자라는 것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 네모꼴의 왕관을 쓸 수 있는 네모진 머리를 가진 아이는 왕자뿐이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사 자식들의 머리통은 세모꼴로 맞추어졌고, 농부 자식들의 머리 모양은 뾰족했다.
그렇듯, 저마다 사회적 계급과 직능을 머리통에 찍고 평생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잉카 사회에는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고, 개인적인 야망이 피어날 여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