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타이머 사계절 1318 문고 138
전성현 지음 / 사계절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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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소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과 함께 독자를 책 속으로 빨아들이곤 우주의 혼돈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다. 아주 제대로 열린 결말인 일곱 개의 단편소설들이다.

포춘쿠키를 먹어본 적 있는가? 입체적인 하트에 가까운 모양의 과자를 반으로 자르면 길고 얇은 종이에 행운을 담은 메세지가 적혀 있다. 요즘은 테마별 포춘쿠키로 다양화되기도 했지만, 원래의 포춘쿠키를 먹으면 그저 그 작은 종이 조각에 적힌 메시지가 뭐라고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진짜 행복한 일이 나에게 생길 것만 같아서 하나 더 먹어서 행운을 두배로 만들고 싶단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런데 첫 번째 단편 소설인 <포춘쿠키>는 우리가 마주한 그 '행운'을 담은 메시지가 늘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되는 행운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행운을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꾸짖어준다. 생각해보자. '늦가을에 나비를 만날 수 있다는.' 행운은 어느 누가 들어도 행운 같지 않고 힘이 되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나비'가 바로 등장인물이 좋아하는 고양이를 의미한 거라면 우리가 우연히 포춘쿠키를 열어보지만 결국은 그 자신만을 위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철거 대상 마을에서 어서 주민들이 사라져 주길 바라는 철거업체 쪽 사람이라면 그가 뽑은 포춘쿠키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주민들이 모두 집을 비우고 떠난 불빛이 사라진 그런 마을을 갈망하는 모습은 시커멓고 무섭고 잔인한 마음이다. 작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포춘쿠키에는 메시지에 담긴 숨은 의미를 보여주지 않고, 표현 그 자체에 갇혀버리게 만들었다. 그런 점이 반전 같고 과연 이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놀랄 무렵 글은 마지막 문장을 드러낸다.

 

 

두 번째 소설인 <가설의 입증>은 더욱 심하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다음 이야기가 마구 궁금해지는데, 거기서 딱 펜을 내리는 작가의 모습이 그려지며 어서 펜을 들고 더 써달라고 말하고 싶다. 방역과 학생지도 심지어 수술 외에는 간단한 처치도 가능한 의료진이 상시 대기하는 의원급 보건실까지 갖춘 기숙학교에서 이상한 증상을 보이는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단순히 전학을 갔다고 보기엔 너무나 유망하고 경쟁력 있는 학교였다. 철저한 방역 시스템으로 각종 호흡기 질병이 유행해도 비껴가는 학교였다. 그런 학교에서 이상한 증세를 보이는 학생이 나타나다니!!!

 

"환경오염이나 방사능 유출로 생겨난 변이 생물들... 이런 변이 생물 종이 나타났다는 건 가설이니 해당 표본이 많아야 입증이 가능하다." - 과학 수업 중 교사와 학생의 대화(재구성)

 

갑자기 하나 둘 씩 사라지는 아이들. 정말 표본이 많아야 한다는 말처럼 이 학교는 변이 생물의 표본으로 RT 바이러스 감염자들을 모아 놓은 곳인가? 그렇다면 왜? 누가? 대체 무엇을 입증하기 위해서란 말인가? 질문만 마구 던져놓고 끝나지 않은 듯 또 이렇게 이번 소설도 마지막 문장을 남긴다.

 

.... 대체 어떤 가설을 입증하고 싶은 것일까...?(39)

 

 

이 외에도 도플갱어 같은 다른 차원의 같은 아이들이 같은 SNS계정을 공유하며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는 이야기 <유진의 계정>, 각종 환경오염으로 비대면 수업이 일상화되며 저마다의 줌 화면 속에 갇혀 버린 <패러데이 상자>, 영구 동토가 녹으며 인간이 경험하지 못했던 고대 박테리아에 감염되고 수명을 에측하던 앱 데스 타이머의 수명 잔량이 점점 줄어드는 <데스 타이머>, 악몽을 물리쳐주는 기능이 아닌 수면 정보를 이용해서 악몽같은 현실을 감추려 한 <드림캐쳐>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삶을 떠나는 항구 도시 이야기인 <포틀랜드>가 저마다의 색깔을 띄며 독자들의 뇌세포를 깨운다. 상상을 하고 겨우 분위기를 파악할 즈음 나머지 이야기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 채 뒤돌아 걸어가는 작가들의 모습이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무성해지는 책이다.

표본의 수가 많아야 가설이 입증되는 것 - P38

정말 포춘쿠키가 행운을 가져다준 걸까?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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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원 - 제20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137
김지현 지음 / 사계절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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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삶을 바로 곁에서 바라보며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친구관계, 우정 그리고 어떤 어른으로 자랄 것인가에 대한 고민까지 마치 표지의 테이블에 앉은 네 소녀 옆에 의자를 바짝 끌어가 앉아보고 싶을 정도로 친근했다.

어린 시절 한번 쯤 유명한 연예인을 좋아해 본 경험이 있을 거다. 정원이 만큼 혹은 정원이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라도 '나의 연예인'이라 칭하고 싶은 대상이 있고, 또 같은 연예인을 좋아할 때 친구들과의 대화도 재밌어졌던 경험도 있을 거다.

비단 연예인만이 아니다. 즐겨보는 드라마가 좋아서, 영화가 좋아서 또 책이 좋아서.. 그렇게 청소년 기에는 공통의 관심사를 갖는 일이 우정의 힘이 되는 것처럼 절실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들은 좋아하지 않을 만한 대상을 나만 좋아한다고 그것이 문제가 될까? 어른의 시선으론 그건 전혀 문제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에겐 큰 고민거리가 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친구가 유치하게 보면 어쩌지? 내가 좋아하는 걸 친구가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고민이 청소년기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만큼 커다란 고민이 될 수도 있다.

작품 속 정원은 덜 유명한 가수 아이돌을 좋아한다. 그의 인스타를 즐겨보고,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고, 신곡이 나오면 팬카페 멤버들 사이에 서둘러서 순위 안에 올라가도록 재생횟수 올리기에 동참한다. 실제 내 옆에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친구가 없지만 그냥 만족한다. SNS로만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 '달이'와 소통할 수 있었기에 안심한다. 그러나 어느 날 달이와 연락이 끊기자 순간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정원이.

하루 중 3분의 1을 보내는 학교는 그저 허물을 잠시 벗고 배회하는 장소와 같다. 그러나 거기서 멈췄다면 이 작품은 그저 좀 안타까운.. 청소년들의 우정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우려만 낳고 말았겠지만, 정원은 마냥 공허해 할 겨를이 없다.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정원에게 드디어 같은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생긴거다. 먼저 다가와 준 친구들. 그들은 아주 밝고 명랑하다. 정원으로 하여금 학교라는 공간에서 누군가와 친하다는 소속감도 느끼게 해준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것인지 정원도 깨닫는다.

그리고 이 작품의 더 큰 매력은 또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거다. 정원이가 스스로의 삶 속에 갇혀 있다가 소통할 친구가 없어져서 공허함을 느끼지만, 손을 내밀어준 다른 친구들이 있었던 것처럼, 정원이도 또 다른 친구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는 점이다. 내가 배우고 깨달은 걸 다른 이에게 전해주는 자세는 작품을 읽는 내내 우려가 안도와 안심과 응원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게 도와주었다.

작품 속에서 성장했고, 마음열기에 대한 용기를 얻은 정원이는 과도한 다이어트로 좋지 않은 식습관을 가진 친구 혜수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소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함께 마음을 나눌 장소, 즉 상담실로 갈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대해보는데 그 모습이 참 따스해보였다.

이렇게 관계맺기에 도움을 준 정원이의 세 친구들은 동네 책방에서의 독서모임을 이어가는데, 이 풍경도 너무나 아름답다. '문학소녀'라는 표현이 머릿 속에 몽글몽글 솟아나는 것처럼, 책표지에서 책과 동물과 친구와 함께하는 소녀들의 따스한 풍경처럼 그렇게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 속에 언젠가 친구 혜수도 함께하길 소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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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좀 빌려줘 사계절 1318 문고 136
이필원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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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감과 토닥임이 느껴지는 다섯 편의 소설과 섬뜩함이 느껴지는 한 편의 소설이 한 데 모였다. '지우개 좀 빌려줘'를 대표작으로 하는 이필원 작가의 소설집은 분명 무거운 사회 이슈를 기저에 담고 있으나 따스함과 신비로움 속에서 어느 순간 문제가 해결되는 느낌을 준다.

지우개_좀_빌려줘

지우개를 빌려달라는 말은 무언가를 꼭 지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이 가는 친구에게 친근감을 표현하는 말이자 믿을 수 있는 상대에게 신뢰를 담아 할 수 있는 말이란 것이 인상적이다. 한국식으로 보면 마치 '밥 한번 같이 먹자' 하는 말과 비슷한 류의 표현이랄까? 작가가 설정한 청소년의 세계에서는 지우개를 빌려달라는 말이 그 의미를 더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편안하게 지우개 좀 빌려달라고 말할 수 있는, 혹은 말하고 싶은 상대가 있을까? '친구'라는 말로는 신뢰하기 힘든 사회적 분위기와 흐름 때문인지.. 절친, 베프란 표현을 해야만이 그나마 안심할 수 잇는 진정한 친구가 되곤 한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지우개 좀 빌려달라고 말할 때, 뚱한 표정으로 '왜?'라는 반문을 품은 말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웃으며 빌려 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간다면 보다 훈훈한 인간관계를 맺어갈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해본다.

호랑님의_생일날이_되어

호랑이 생일파티에 초대받는 아이라니.. 설정만으로는 유치한 어린이용 전래동화인가? 싶었지만, 읽다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마을에 스며드는 외로움이 고이지 않길 바라는 호랑이의 마음이 외로움과 분노로 가득 찬 주인공을 찾아온 이야기란 점에서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며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깨닫게 했다. 자신의 인생에서조차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 아이. 자신에게 아픔을 준 사람에 대한 분노와 차가운 서리 같은 복수심까지도 다독여주는 호랑이의 말이 우리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위로해준다.

"나쁜 마음으로 누군가를 멀찌감치 세워 두고 외롭게 하는 이들은 반드시 벌 받게 돼 있어." (79p.)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러나 외로운 게 지겨워진다면 우리가 먼저 그 자리에서 한 걸음이라도 벗어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럴 때 호랑님의 생일파티에 초대된 고운이처럼 우리도 외로움의 무게를 떨쳐버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우는_용

'엄마와 대화를 나누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사춘기 청소년이 부모와 갈등을 겪는 전형적인 모습이란 생각에 처음부터 마음이 먹먹해졌다. 미묘한 집안 분위기와 대면대면해지는 부모자식 관계.

이 작품에서는 골동품을 수집하는 엄마와 수완이의 갈등이 묘사된다. 누구 하나 울어야만 끝나는 말다툼, 갈등. 닫힌 방문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부모와 자식. 이젠 미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다가도 표현하기를 꺼리즌 상황까지 온 상태같다. 그런 수완이에게 오래된 범종 위에 붙은 작은 용 '포뢰'가 말을 건다. 오직 수완이에게만 보이는 용이다. 수완이와 엄마의 마음을 번갈아 생각해보도록 돕는 용은 수완이를 움찔 움직이게 만드는 한 마디를 해준다.

"시간이 너무 지나면 어느 순간 미안하다는 말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104p.)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수완이라는 말에 순간 이거 무슨 내용이지? 싶었다. 죽어가는 수완. 엄마와의 관계가 깨어질 데로 깨어진 상태로 모종의 사고를 당한 건지, 지병이 악화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건 수완이가 생의 마지막에 있다는 사실.

병실풍경이 이어지며 드디어 3분의 2를 읽어나갈 때야 이들 모녀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아챌 수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수완이는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행복했나? 즐거웠던가? 생각해 보니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와 자주 싸웠지만, 그건 어쩌면 우리가 더 친해지고 가까워지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다 큰 어른이 된 나도 엄마와 싸운 적이 많다. 그러나 수완이가 느낀 것처럼 어쩌면 서로를 사랑하다보니 더 가까워지려고, 더 배려하다보니 더 위해주려다 생긴 갈등일 경우가 더 많았다. 절대 엄마를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미워한 적은 없었다. 수완이의 그런 회상이 힘이 되었을까? 죽음의 문이 닫히고 삶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수완아, 최수완." 하며 손을 잡고 힘 있게 중얼거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말라는 마법의 주문이 되어 눈을 뜬다. 점점 환해지는 시야 속에서 엄마와 눈이 마주친다. 기나긴 갈등과 상처는 어느 덧 사라지고 행복한 미소가 서로를 마주한다. 참 아리고도 따스한 소설이다.

호박마차

"도깨비 놀기 좋은 날씨네." 붕어빵을 파는 '호박마차' 주인 여자가 이렇게 말하자 윤희는 어안이 벙벙하다. 뭐지? 게다가 저~기 대동강 옆 보통문 쪽에 도깨비들의 아지트도 있단다. 도깨비를 볼 줄 아는 사람인가? 윤희는 이상한 기분에 얼른 자리를 뜬다.

윤희. 29일째 집에서만 지낸 아이다. 아무리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지만 엄연한 성범죄에 노출당할 수밖에 없는 달콤엔젤93과의 성매매란 표현에 허걱 했다. 경찰 단속에 걸리고 학생이 자발적으로 만난 거면 '합의'를.. 그게 아니면 돈을 받았으니 성매매.. 머리가 하얘진다. 그런 윤희에게 호박마차 여자는 외로움을 먹고 사는 도깨비가 붙은 거라며 퇴치법을 알려준다. 윤희에게 나타나서 '너는 보호받지 못해. 너는 혼자야. 죄인이야. 벌을 받아야만 해.'라며 속삭이는 도깨비들의 소리로부터 윤희는 아니라고 정신없이 중얼거려본다.

외로움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소녀. 그런 소녀들만 골라서 악마같은 검은 손길을 마구 뻗는 어른들. 그 사이에서 외로움을 먹고 산다는 도깨비는 끊임없이 소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한다. 그런 소녀에게도 너의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해줄 수 있는 호박마차 주인 여자같은 사람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을까? 나부터도 스스로 연락해서 만난 성매매의 당사자에게 친절한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소녀의 배경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찔림이 느껴졌다. 표면적으로 문제아, 사고치는 아이라는 표현들을 하기 이전에 그 아이가 가진 내면의 아픔을 먼저 치유해줄 방법이나 장치가 안전한가.. 가정, 학교, 사회.. 국가 모두의 책임이란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법의 망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검은 손을 내미는 어른도, 마음의 외로움을 달랠 길이 없어서 그런 검은 손을 잡게 되는 아이들도 모두 치유받아야 할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런 모두를 건강하고 올바른 삶으로 정착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간절함이 차올랐다..

우주장

정신없이 도망자 신세가 된 은채가 숨죽이며 정찰로봇을 피해 달아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긴박한 숨소리가 종이책을 뚫고 내 귓가에까지 전해진다. 할머니를 훔친 아이, 은채. 은채는 할머니와 유독 친했다. 할머니와 우정 반지를 나눠서 낄 정도면 이건 웬만한 손녀와 할머니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할머니에게 딱 한번 크게 실망한 기억을 갖고 있다. 결혼에 실패한 엄마가 또 다시 재혼하려고 데려온 남자를 눈에 차지 않아 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은채까지도 나서서 실망감을 내비친다. 할머니의 기준으론 지구상에 맘에 드는 사윗감은 없을 거라며.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가벼운 감기처럼 차차 나아지리라 희망했던 것들이 산산히 조각나며 결국 할머니는 떠났다. 은채는 할머니의 유해가 담긴 캡슐을 품에 꼭 안고 할머니의 평생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한 목표로 무작정 도망자가 된 거다. 우주장. 우주로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장례식.

딱 한번의 실망으로 관계가 멀어진 뒤 제대로 된 사과조차 못했던 은채의 죄책감과 할머니에 대한 사랑의 힘은 은채를 행동으로 옮기게 했다.

"우주는 어둡고, 난 우주를 좋아하지. 까만 우주를 좋아하지. 은채도 좋아하니?"

할머니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 천문대 근처라도 가면 실제로 우주장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달려간다. 할머니를 무사히 우주로 보내드릴 수 있을까? 할머니의 소원대로 지구 바깥을 실컷 구경하다가 유성이 되어 빛을 내며 멀어질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할머니를 홀가분히 떠나보낼 용기와 행운이 나에게 있을까? 은채는 막연하지만 간절함으로 캡슐을 꼬옥 안고 별들 아래에 누워 눈을 감았다.

순간 나타난 할머니의 모습.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할머니의 말씀, 미안하다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은채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괜찮다고 다 잊었다고 말해주는 할머니의 말씀에 은채는 할머니를 향해 화이팅을 외친다!

"안녕!"

이 장면을 상상만 해도 속이 후련해졌다. 사랑하는 할머니의 평생 소원을 들어드리는 손녀딸의 정성과 사랑. 문득 나는 할머니와 얼마나 가까웠을까.. 나는 할머니가 평생 바라시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어린 날, 죽음이 뭔지도 모르고 뛰놀던 어릴 적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이 어렴풋이 마음에 담겼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이 한 편의 소설은 사실 목차상으론 두 번째 소설이다. 그러나 위의 소설들과는 결이 다른, 나에겐 섬뜩한 소설이어서 마지막에 적어본다.

안녕히_오세요

'살아남는 데 필요한 건 의심, 약간의 의심이다.' 이 한 문장이 이 작품의 처음과 끝을 모두 이해하게 해주는 문장으로 다가왔다. 합리적 의심이 인간을 얼마나 이성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인지도 생각해보게 한다.

어느 날 지구로부터 떨어진 운석. 그건 운석이 아닌 우주 생명체가 지구에 보낸 미래 기술들에 대한 정보였다. 냉동인간이 된 채로 우주 여행을 할 수 있는 시대를 연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학교에선 성적순으로 우주 초대권을 나눠줬고, 그 서열 아랫쪽에서 겨우 '나'도 초대장을 받는다. 그러나 지구 중력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은 '나'는 그 초대장을 반납하리라 결심한다. 당연히 우주로부터의 환대의 초대장이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선 '나'의 결정을 의아해하다 못해 비난하기까지 한다. 텅 빈 지구 속에 혼자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나'의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건 아마도 첫 문장 때문이었을 거다. 약간의 의심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힌트. 모두가 좋다는 것에는 순간 멈칫 하며 고르지 않게 되는 심리와도 같다. 그래서 '나'의 선택에 내심 동조하고 있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동면상태로 초대장을 보낸 곳으로 날아가고, 후기 메시지도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곳입니다. 우리의 예상대로.

-어서오세요. 이곳으로.

-다들 안녕히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품 후기 중에 믿을 만한 것이 몇 프로였던가? 우주에서 보내온 후기 메시지도 그런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누락된 메시지를 발표했다.

-오지 마세요. 안녕히.

진실을 왜곡하려는 사회의 움직임이 일사천리로 이뤄진다. 버그가 생기고 메시지가 삭제되고, 우주 여행에 대한 의문을 가진 단체의 사이트도 폐쇄되고.

점점 사람들도 의문을 이제야 갖기 시작한다. 아무리 그곳이 좋아도 고향이 그립지 않을까? 편도 티켓만 준 게 아닌데, 충분히 돌아오는 기술도 있는데 왜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걸까?

점차 지구는 극심하게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신을 똑바로 차린 소수 중 하나가 연설을 하기 시작한다. '생물을 산 채로, 혹은 죽더라도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지구의 사례를 언급한다. 광어 같은 활어 수출처럼 말이다. 그런 생선들은 완전히 해동되기 전에 식탁에 오른다. 마치 완전히 해동되기 전에 우주인들의 소화기관으로 들어가버리는 지구인들처럼.

소름이 좌악 끼쳤다. 이건.. 김동식 작가의 작품과도 같은데!!! 미래사회, 예측 가능할 듯 하면서도 불가능한 전개, 그리고 반전! 이필원 작가가 왜 이 소설을 다른 소설과 섞어서 담은 것일지!! 아예 따로 빼서 이런 종류로만 모아두면 제 2의 김동식 작가의 작품이라 할 정도로 짜릿하게 스며드는 무서운 이야기에 정신이 퍼뜩 차려졌다.

'살아남는 데 필요한 건 의심, 약간의 의심이다.'

‘살아남는 데 필요한 건 의심, 약간의 의심이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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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의 내일 - 사계절문학상 20주년 기념 앤솔러지 사계절 1318 문고 134
이선주 외 지음 / 사계절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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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이고 상대적인 다양한 정체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게하는 책 같다. 다섯 편의 소설에서 만나는 인물들의 경험들을 더이상 낯설게 바라보지 않는 건 아마도 작가들의 진솔한 마음이 담긴 스토리들이기 때문 아닐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들이 조금은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상에 살아가는 그저 같은 인간이란 생각을 진지하게 하며 읽어본다면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공존하는 삶 그 자체로 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1. 선택 - 이선주

청소년 소설 작가에게 한 학부모가 민원 메일을 보낸다. 비혼에 대한 내용이 담긴 책을 청소년 소설이랍시고 내놓은 것은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민하지 않는 책임감 없는 어른이라는 지적이있다. 과연 그럴까. 작가가 고민해야하는 게 정해진 답을 이끌어내는 글쓰기일까? 나쁜 사상을 세뇌시키려는 심보가 아니고서는 어느 작가도 청소년들이 잘못된 사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니라고 반론하는 그 마음에 힘을 보태고 싶어졌다.

2. 모로의 내일 - 최영희

친구들 세 명에게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평소 성향과는 너무나 다른 행동으로 심지어 경찰에게 잡혀가는 일까지 생긴다. 모로는 일상과는 괴리가 있는 이 사건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료진과 언론인들은 그저 성장기의 혼란과 정서적 고립감을 SNS나 게임 등으로 해소하는 청소년들이 감정 조절을 어려워하며 생기는 돌발행동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런데 청소년만이 아닌 유아들에게도 같은 현상이 발생하자 모로는 분명 뭔가 감정을 조종하는 것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처음엔 공감하지 않던 담임도 조카마저 같은 증상을 겪자 적극적으로 모로와 함께 원인을 찾기 시작하는데...

환청같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그 행동 이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며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기 힘들었다는 거다.

모로는 암시와 최면을 불러온 힘을 '꼰대들의 목소리'로 통일한다.

'나 때는 말이야....!!' 가 불러온 정신과 행동 조종 현상인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롭고 너그러워져야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인해 정신적으로 힘든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문득 나도 나이들면 저러면 안되는데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꼰대의 잔소리나 참견이 아닌 진정 후대를 아끼고 존중하는 인자함을 갖춘 어른이 되고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하는 소설이다.

3. 행성어 작문시간 - 최상희

무대는 지구가 아닌 우주다. 수많은 행성에서 사용하는 각기 다른 언어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강자와 약자, 번성하는 행성과 쇠퇴하는 행성. 요킨네 가족도 더이상 살아가기 힘든 '구오진'에서 '헤카테'로 이민온 상태다. 행성어 학교를 무사히 졸업해야 헤카테의 정규 학교에 진학이 가능한데 깐깐한 조우마린 작문선생님의 강의는 2년째 재수강 중이다. 새로운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필수로 알아야 하는 것이 언어인 것은 맞지만, 단순히 언어를 배운다는 것에 더해서 작문 과제를 매번 통과해야 한다는 것은 요킨에게 참 버거운 일이었던 것 같다. 최소한 열 문장 이상, 한 페이지를 채워야 하는데, 늘 딱딱하게 대하던 조우마린 선생님은 그날 따라 조금 상세히,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완전히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지만 기억을 통해 모든 것을 나 자신으로 남아있게 해준다는 말은 이주민의 입장에서 새로운 사회에 편입하기 힘든 요킨과 사실은 자신도 이주민인 조우마린 선생님 자신에게 해주는 위로의 말과 같이 들린다.

그동안 많은 이주민들이 헤카테 행성에 모였다. 이주민 정착을 지원하는 사회체제도 마련되어 있기에 힘든 통과의례라도 열심히 해내리란 희망과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이주민들이었는데, 점점 토착민들은 반기를 든다. 마치 우리 시대에도 볼 수 있는 난민수용에 대한 반대 입장과 유사해 보이는 양상이 이곳 헤카테에서도 점점 확산되기 시작한다.

마지막 작문 과제는 'OO하는 법'이다. 발표의 마지막 순서로 요킨은 '화물칸에서 살아남는 법'이란 글을 발표한다. 화물칸에 몸을 싣고, 구오진을 떠나 헤케테로 오기까지의 여정 속에 담긴 살아남은 이들의 기적과 삶의 단면들은 이들을 거부하는 헤카테인들의 이주민 정책 지원 반대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준다. 우린 과연 누군가를 품어줄 수 있는 아량을 가졌을까...

4. 안녕! 정신 나간 천사 - 황영미

웹소설이 한창 인기를 얻고 있을 때였다. 나는 시골에 살다 서울로 이사온 전학생으로 사투리가 튀어나올까봐 늘 주눅들어 있던 그때 <정신 나간 천사>라는 웹소설의 주인공 '강재경'에게 빠져든다. 십대 소녀 시절 누군 한번 쯤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속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지 않을까? 작품 속 '나'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등장인물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를 점찍어보기도 하며 어쩌면 그를 좋아하면서 삶의 활기를 찾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너무나 강재경과 많이 닮은 J를 만나 좋아하게 된다. 소위 썸을 탄다는 표현이 더 맞으려나? 같은 말을 해도 사람 마음을 더 흔들어 놓는 J, 그 사람의 한 마디에 내 삶이 바뀌어버리게 만드는 J앞에서 '나'는 청순가련형의 전형적인 여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J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런데.. 점점 하나씩 얼음송곳같은 것이 마음을 지르고 들어오는데.. 어쩌면 가치관의 차이일 수 있으나 가난하면 무용도 배우기 힘들고 해외 유학도 가기 힘들다는 것이 당연한 원칙이라 여기는 이들 앞에서 점점 '나'는 J에 대한 마음이 식어간다. 정작 자신을 좋아해서 자신과 만난게 아니라 자기를 좋아한다니까 만나준 나쁜 자식인거다. 시골 출신이라 비아냥거리는 말투 안에서 더이성 '나'는 J를 바라볼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것이 곧 십대에 마음을 휩쓸었던 <정신 나간 천사>에 대한 이별 통보이기도 한데, 오히려 독자로서는 진작에 내던져버려야 했던 것 아닌지, 왜 그렇게 늦게 깨달은 건지 답답함에 한참을 씩씩대게 만들었다. 숭상했던 작가의 작품이 늘 가지고 있었던 레파토리를 뒤늦게 현실 속에서 깨달은 '나'에게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J를, <정신 나간 천사>를, 그 작가를 잘 걷어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5. 너와 함께 트와일라잇을 - 조우리

제목에 있는 트와일라잇! 그렇다 인간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진 로맨스 판타지 영화!! 설마하며 읽었다. 게다가 항상 두통에 시달리는 나의 미간을 이영이가 어루만져준 다음부터 신기하게 두통이 사라지고, 영이가 스스로를 뱀파이어라고 밝히는 부분에서는 실소가 나오기도 했다. 뭐야, 진짜 그 트와일라잇? 그런데, 컨셉이 다르다.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이 책의 출발점이란 점에서 본다면, '나'의 엄마가 가진 성 정체성으로 인해 부부의 관계가 끊어지고, 세상에서 단 둘만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되어버린 영이와 '나'의 실체로 인해 결국 '나'는 홀로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나 작가는 결코 성 정체성이 다름으로 인한 실패의 모습으로 그리지 않는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된 이후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그저 담담하게 서술한다. 그래서 처음엔 이상했다가도 안타카운 마음이 더 많아진다. 이상적인 가정을 꿈꿨다가 절망에 빠진 아빠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고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갖지만 자신의 삶을 선택한 엄마도 그리고 인간이 아닌 영생의 존재로서 자신만의 삶을 꿋꿋히 살아가는 주인공 솔이의 모습도 어느 하나 비난하고 싶지 않고 그저 신경이 쓰이게 하는 작가의 글이어서 계속 마음에 남는다...

평범하다는 표현의 기준이 무엇일까? 그저 지끔껏 일반적으로 생각해온 것들이 평범하다는 것으로 정하고 싶다면 표현상의 양해를 구해서 평범하지 않은 인식과 가치관이 우리 삶에서 많이 드러나고 있고 작품 속에서도 다양하게 다뤄지고 있는 현상이 결코 감출 일은 아니란 생각에 동의한다. 다만, 누구의 탓이 아닌 각자의 삶 그 자체를 서로가 존중하는 사회로 성장하면 참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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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찬위 지음 / 하이스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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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받은 저에게 위로해주는 제자들이 선물로 사준 책! 적재적소에서 따스한 메시지에 공감하며 힘을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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