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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좀 빌려줘 ㅣ 사계절 1318 문고 136
이필원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평점 :
신비감과 토닥임이 느껴지는 다섯 편의 소설과 섬뜩함이 느껴지는 한 편의 소설이 한 데 모였다. '지우개 좀 빌려줘'를 대표작으로 하는 이필원 작가의 소설집은 분명 무거운 사회 이슈를 기저에 담고 있으나 따스함과 신비로움 속에서 어느 순간 문제가 해결되는 느낌을 준다.
지우개_좀_빌려줘
지우개를 빌려달라는 말은 무언가를 꼭 지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이 가는 친구에게 친근감을 표현하는 말이자 믿을 수 있는 상대에게 신뢰를 담아 할 수 있는 말이란 것이 인상적이다. 한국식으로 보면 마치 '밥 한번 같이 먹자' 하는 말과 비슷한 류의 표현이랄까? 작가가 설정한 청소년의 세계에서는 지우개를 빌려달라는 말이 그 의미를 더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편안하게 지우개 좀 빌려달라고 말할 수 있는, 혹은 말하고 싶은 상대가 있을까? '친구'라는 말로는 신뢰하기 힘든 사회적 분위기와 흐름 때문인지.. 절친, 베프란 표현을 해야만이 그나마 안심할 수 잇는 진정한 친구가 되곤 한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지우개 좀 빌려달라고 말할 때, 뚱한 표정으로 '왜?'라는 반문을 품은 말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웃으며 빌려 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간다면 보다 훈훈한 인간관계를 맺어갈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해본다.
호랑님의_생일날이_되어
호랑이 생일파티에 초대받는 아이라니.. 설정만으로는 유치한 어린이용 전래동화인가? 싶었지만, 읽다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마을에 스며드는 외로움이 고이지 않길 바라는 호랑이의 마음이 외로움과 분노로 가득 찬 주인공을 찾아온 이야기란 점에서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며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깨닫게 했다. 자신의 인생에서조차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 아이. 자신에게 아픔을 준 사람에 대한 분노와 차가운 서리 같은 복수심까지도 다독여주는 호랑이의 말이 우리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위로해준다.
"나쁜 마음으로 누군가를 멀찌감치 세워 두고 외롭게 하는 이들은 반드시 벌 받게 돼 있어." (79p.)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러나 외로운 게 지겨워진다면 우리가 먼저 그 자리에서 한 걸음이라도 벗어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럴 때 호랑님의 생일파티에 초대된 고운이처럼 우리도 외로움의 무게를 떨쳐버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우는_용
'엄마와 대화를 나누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사춘기 청소년이 부모와 갈등을 겪는 전형적인 모습이란 생각에 처음부터 마음이 먹먹해졌다. 미묘한 집안 분위기와 대면대면해지는 부모자식 관계.
이 작품에서는 골동품을 수집하는 엄마와 수완이의 갈등이 묘사된다. 누구 하나 울어야만 끝나는 말다툼, 갈등. 닫힌 방문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부모와 자식. 이젠 미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다가도 표현하기를 꺼리즌 상황까지 온 상태같다. 그런 수완이에게 오래된 범종 위에 붙은 작은 용 '포뢰'가 말을 건다. 오직 수완이에게만 보이는 용이다. 수완이와 엄마의 마음을 번갈아 생각해보도록 돕는 용은 수완이를 움찔 움직이게 만드는 한 마디를 해준다.
"시간이 너무 지나면 어느 순간 미안하다는 말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104p.)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수완이라는 말에 순간 이거 무슨 내용이지? 싶었다. 죽어가는 수완. 엄마와의 관계가 깨어질 데로 깨어진 상태로 모종의 사고를 당한 건지, 지병이 악화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건 수완이가 생의 마지막에 있다는 사실.
병실풍경이 이어지며 드디어 3분의 2를 읽어나갈 때야 이들 모녀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아챌 수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수완이는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행복했나? 즐거웠던가? 생각해 보니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와 자주 싸웠지만, 그건 어쩌면 우리가 더 친해지고 가까워지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다 큰 어른이 된 나도 엄마와 싸운 적이 많다. 그러나 수완이가 느낀 것처럼 어쩌면 서로를 사랑하다보니 더 가까워지려고, 더 배려하다보니 더 위해주려다 생긴 갈등일 경우가 더 많았다. 절대 엄마를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미워한 적은 없었다. 수완이의 그런 회상이 힘이 되었을까? 죽음의 문이 닫히고 삶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수완아, 최수완." 하며 손을 잡고 힘 있게 중얼거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말라는 마법의 주문이 되어 눈을 뜬다. 점점 환해지는 시야 속에서 엄마와 눈이 마주친다. 기나긴 갈등과 상처는 어느 덧 사라지고 행복한 미소가 서로를 마주한다. 참 아리고도 따스한 소설이다.
호박마차
"도깨비 놀기 좋은 날씨네." 붕어빵을 파는 '호박마차' 주인 여자가 이렇게 말하자 윤희는 어안이 벙벙하다. 뭐지? 게다가 저~기 대동강 옆 보통문 쪽에 도깨비들의 아지트도 있단다. 도깨비를 볼 줄 아는 사람인가? 윤희는 이상한 기분에 얼른 자리를 뜬다.
윤희. 29일째 집에서만 지낸 아이다. 아무리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지만 엄연한 성범죄에 노출당할 수밖에 없는 달콤엔젤93과의 성매매란 표현에 허걱 했다. 경찰 단속에 걸리고 학생이 자발적으로 만난 거면 '합의'를.. 그게 아니면 돈을 받았으니 성매매.. 머리가 하얘진다. 그런 윤희에게 호박마차 여자는 외로움을 먹고 사는 도깨비가 붙은 거라며 퇴치법을 알려준다. 윤희에게 나타나서 '너는 보호받지 못해. 너는 혼자야. 죄인이야. 벌을 받아야만 해.'라며 속삭이는 도깨비들의 소리로부터 윤희는 아니라고 정신없이 중얼거려본다.
외로움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소녀. 그런 소녀들만 골라서 악마같은 검은 손길을 마구 뻗는 어른들. 그 사이에서 외로움을 먹고 산다는 도깨비는 끊임없이 소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한다. 그런 소녀에게도 너의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해줄 수 있는 호박마차 주인 여자같은 사람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을까? 나부터도 스스로 연락해서 만난 성매매의 당사자에게 친절한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소녀의 배경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찔림이 느껴졌다. 표면적으로 문제아, 사고치는 아이라는 표현들을 하기 이전에 그 아이가 가진 내면의 아픔을 먼저 치유해줄 방법이나 장치가 안전한가.. 가정, 학교, 사회.. 국가 모두의 책임이란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법의 망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검은 손을 내미는 어른도, 마음의 외로움을 달랠 길이 없어서 그런 검은 손을 잡게 되는 아이들도 모두 치유받아야 할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런 모두를 건강하고 올바른 삶으로 정착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간절함이 차올랐다..
우주장
정신없이 도망자 신세가 된 은채가 숨죽이며 정찰로봇을 피해 달아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긴박한 숨소리가 종이책을 뚫고 내 귓가에까지 전해진다. 할머니를 훔친 아이, 은채. 은채는 할머니와 유독 친했다. 할머니와 우정 반지를 나눠서 낄 정도면 이건 웬만한 손녀와 할머니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할머니에게 딱 한번 크게 실망한 기억을 갖고 있다. 결혼에 실패한 엄마가 또 다시 재혼하려고 데려온 남자를 눈에 차지 않아 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은채까지도 나서서 실망감을 내비친다. 할머니의 기준으론 지구상에 맘에 드는 사윗감은 없을 거라며.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가벼운 감기처럼 차차 나아지리라 희망했던 것들이 산산히 조각나며 결국 할머니는 떠났다. 은채는 할머니의 유해가 담긴 캡슐을 품에 꼭 안고 할머니의 평생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한 목표로 무작정 도망자가 된 거다. 우주장. 우주로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장례식.
딱 한번의 실망으로 관계가 멀어진 뒤 제대로 된 사과조차 못했던 은채의 죄책감과 할머니에 대한 사랑의 힘은 은채를 행동으로 옮기게 했다.
"우주는 어둡고, 난 우주를 좋아하지. 까만 우주를 좋아하지. 은채도 좋아하니?"
할머니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 천문대 근처라도 가면 실제로 우주장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달려간다. 할머니를 무사히 우주로 보내드릴 수 있을까? 할머니의 소원대로 지구 바깥을 실컷 구경하다가 유성이 되어 빛을 내며 멀어질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할머니를 홀가분히 떠나보낼 용기와 행운이 나에게 있을까? 은채는 막연하지만 간절함으로 캡슐을 꼬옥 안고 별들 아래에 누워 눈을 감았다.
순간 나타난 할머니의 모습.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할머니의 말씀, 미안하다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은채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괜찮다고 다 잊었다고 말해주는 할머니의 말씀에 은채는 할머니를 향해 화이팅을 외친다!
"안녕!"
이 장면을 상상만 해도 속이 후련해졌다. 사랑하는 할머니의 평생 소원을 들어드리는 손녀딸의 정성과 사랑. 문득 나는 할머니와 얼마나 가까웠을까.. 나는 할머니가 평생 바라시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어린 날, 죽음이 뭔지도 모르고 뛰놀던 어릴 적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이 어렴풋이 마음에 담겼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이 한 편의 소설은 사실 목차상으론 두 번째 소설이다. 그러나 위의 소설들과는 결이 다른, 나에겐 섬뜩한 소설이어서 마지막에 적어본다.
안녕히_오세요
'살아남는 데 필요한 건 의심, 약간의 의심이다.' 이 한 문장이 이 작품의 처음과 끝을 모두 이해하게 해주는 문장으로 다가왔다. 합리적 의심이 인간을 얼마나 이성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인지도 생각해보게 한다.
어느 날 지구로부터 떨어진 운석. 그건 운석이 아닌 우주 생명체가 지구에 보낸 미래 기술들에 대한 정보였다. 냉동인간이 된 채로 우주 여행을 할 수 있는 시대를 연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학교에선 성적순으로 우주 초대권을 나눠줬고, 그 서열 아랫쪽에서 겨우 '나'도 초대장을 받는다. 그러나 지구 중력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은 '나'는 그 초대장을 반납하리라 결심한다. 당연히 우주로부터의 환대의 초대장이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선 '나'의 결정을 의아해하다 못해 비난하기까지 한다. 텅 빈 지구 속에 혼자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나'의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건 아마도 첫 문장 때문이었을 거다. 약간의 의심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힌트. 모두가 좋다는 것에는 순간 멈칫 하며 고르지 않게 되는 심리와도 같다. 그래서 '나'의 선택에 내심 동조하고 있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동면상태로 초대장을 보낸 곳으로 날아가고, 후기 메시지도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곳입니다. 우리의 예상대로.
-어서오세요. 이곳으로.
-다들 안녕히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품 후기 중에 믿을 만한 것이 몇 프로였던가? 우주에서 보내온 후기 메시지도 그런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누락된 메시지를 발표했다.
-오지 마세요. 안녕히.
진실을 왜곡하려는 사회의 움직임이 일사천리로 이뤄진다. 버그가 생기고 메시지가 삭제되고, 우주 여행에 대한 의문을 가진 단체의 사이트도 폐쇄되고.
점점 사람들도 의문을 이제야 갖기 시작한다. 아무리 그곳이 좋아도 고향이 그립지 않을까? 편도 티켓만 준 게 아닌데, 충분히 돌아오는 기술도 있는데 왜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걸까?
점차 지구는 극심하게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신을 똑바로 차린 소수 중 하나가 연설을 하기 시작한다. '생물을 산 채로, 혹은 죽더라도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지구의 사례를 언급한다. 광어 같은 활어 수출처럼 말이다. 그런 생선들은 완전히 해동되기 전에 식탁에 오른다. 마치 완전히 해동되기 전에 우주인들의 소화기관으로 들어가버리는 지구인들처럼.
소름이 좌악 끼쳤다. 이건.. 김동식 작가의 작품과도 같은데!!! 미래사회, 예측 가능할 듯 하면서도 불가능한 전개, 그리고 반전! 이필원 작가가 왜 이 소설을 다른 소설과 섞어서 담은 것일지!! 아예 따로 빼서 이런 종류로만 모아두면 제 2의 김동식 작가의 작품이라 할 정도로 짜릿하게 스며드는 무서운 이야기에 정신이 퍼뜩 차려졌다.
'살아남는 데 필요한 건 의심, 약간의 의심이다.'
‘살아남는 데 필요한 건 의심, 약간의 의심이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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