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체의 딜레마 - 제7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작품집 사계절 1318 문고 130
임서진 외 지음 / 사계절 / 202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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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인물이 투명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다. 문득 다소 불편해 보이지만, 투명한 마스크를 쓸 수 있다면, 그나마 코로나 시대를 살아갈 영유아들의 기억 속에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작년부터 보아온 사람들도 순간 마스크를 벗으면 흠칫 놀란다.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올 때도 있고, 원래 모습을 내가 잊고 살았구나 싶을 때도 있어서다. 그러나 안전하고 실용적인 투명 마스크가 생긴다면 그나마 코로나 이전의 삶을 조금은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책을 읽을 때, 꼭 표지를 읽으라는 말이 있다. 앞 표지에는 산소마스크를 쓴 소년, 땅에 닿자마자 빠른 속도로 자라는 식물, 제비의 모습을 한 우주복이 있고, 뒷 표지에는 달과 로봇 강아지, 사람과 소통하는 식물, 무방비 상태의 한 남자의 모습이다.

이 책에 담긴 여섯 편의 이야기를 나타내는 이미지다. 표지를 제대로 읽지 않은 나로서는 읽고 나서야 눈에 띈 것이 못대 아쉬웠다. 미리 생각 해보고 읽을 걸...

제7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수상작이자 대표 제목인 <항체의 딜레마>가 역시 제일 흥미로웠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논(None) 바이러스가 지구를 완전히 장악한 미래사회에서 '이브'란 소녀는 부모님을 잃고, 혼자 살아간다. 지하에 설치된 감염인 구역과 비감염인 구역을 중심으로 청소일을 하는 이브의 일과는 꽤 단조롭다. 청소하고, 귀가할 때 온 몸을 소독하고. 한 번 감염되면 죽음으로 이어지게 하는 막강한 바이러스로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잃은 시대다.

그때 한 남자가 이브 앞에 나타난다. 공처럼 구긴 종이뭉치를 주며 다시 만날 때 답을 달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나를 도와줘, 그러면 네 발 크기만 한 금을 더 줄게.

13p.

여러모로 의심쩍은 남자의 엉뚱한 말이라 생각한 이브는 종이뭉치를 소각장에 버린 순간 반짝! 정말 금이었단 걸 발견한다.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이브는 그걸 이용해서 급한 불은 끄지만, 이후 다시 찾아오는 남자에게 어떻게 해야할 지 망설여져 그저 피하기만 한다.

친구에게 하소연도 해보지만, 그가 이브를 찾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 같다.

단 하루라도 자유롭게 살다가 죽고 싶어.

25p.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그의 말이 계속 귓전을 스친다. 결국 이브는 그의 탈출을 돕지만, 믿고 고백한 친구의 신고로 보안요원들에게 잡히고 만다.

그동안 그가 한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그는 인간이 아니라는 말들이 공중에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는 A라고 불리는 인조인간이었다.

A는 너무 똑똑해서 우리의 감정을 이용하고 마음을 조종할 수 있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로봇이야. 흉내만 낼 뿐이지.

35p.

자유라는 기억만 심겨진 인간과 흡사한 로봇 A. 그의 존재 이유는 인류 전체를 위한 항체로서의 역할이 아닌 일부 고위층만을 위한 치료용 항체 로봇이었던 것이다.

이브는 그런 A에게 마음이 쓰인다. 그리고 마음이 이끄는 데로 따른다. 아무리 로봇이라도 '자율'를 원하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픈 기억을 잘 잊지 못하는 이브의 성격때문일까? A를 돕기 위해 다시 나선 이브는 또다시 보안 요원들의 공격을 받고 산소마스크가 망가진 채 논(None) 바이러스에 침식당하고 만다.

자신들을 살릴 유일한 항체의 보유자인 인조인간 A를 공격하지 못하는 보안요원들. 그걸 아는 A는 연구소 안의 모든 전력을 차단하고, 모두를 논 바이러스에 감염시킨다. 오직 이브만을 지키며...

긴 꿈을 꾼 듯, 시간이 흐르고, 다시 눈을 뜬 이브는 수정처럼 맑은 세상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전혀 늙지 않은 아름다운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정말 긴 꿈을 꿨어. 아담."

풋! 엔딩에서 웃음이 나왔다. 아담과 이브. 여주인공의 이름이 이브인데 아담을 생각하지 못했지 싶었다. 이 작품은 바로 천지창조의 시작인 두 인간, 아담과 이브로 다시 시작하는 세상을 열면서 마무리가 된다. 이를 두고 추천사를 쓴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것으로 마무리된 결말이 훌륭하다'고 평했다.

그렇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인조인간이 오히려 이기심과 악한 마음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모두 없애고, 다시 시작하는 깨끗한 세상을 만든다는 설정과 성서의 '아담과 이브'로 시작하는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설정으로 본다면 '가능성'이라 여길만하다. 그런데, 결국 이 작품에서의 아담은 인조인간 아닌가? 인간이 스스로 지키지 못한 세상을 인조인간이 열어간다는 것은 과연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다음 작품들도 읽어봤다. <반달을 살아도>라는 작품이었다.

오염된 지구에서 대피하여 우주에서 살아가는 아이와 베이비 시터 역할을 맡은 로봇 개의 이야기도 '항체의 딜레마'와 같은 작가의 신작이다. 여기선 새로운 행성을 찾으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우주선에서 폭동이 일어나 가까스로 탈출한 아이와 로봇 개가 도달한 곳은 다름 아닌 지구. 그리고 이렇게 우주로 신호를 보낸다.

정착 행성을 찾았다. 반복한다. 정착 행성을 찾았다. 이곳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이곳은 우리가 떠나지 말아야 했던 곳, 지구다. 여기는 지구, 푸른 별 지구로 귀환하라.

<반달을 살아도> 86p.

같은 작가의 두 단편이란 점에서 점점 비교가 되었다. 오히려 두 번째 작품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보였다. 인간의 잘못으로 망가진 지구였지만, 지구만의 자생능력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인간이 거주하기 적합한 환경으로 다시 조성된 지구. 푸른별 지구. 이는 대자연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로서의 지구를 의미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더 심오했다. 그나마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 안타까움이 덜했지만, 대표작보다도 더 의미심장한 두 번째 작품에 더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다른 독자들도 이 두 편 '항체의 딜레마'와 '반달을 살아도'를 비교해서 읽어보며 토론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외에도 책 표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간여행이나 우주인 등의 소재로 쓰인 작품들이 있는데,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 옛이야기인 '흥부와 놀부'를 패러디 한 느낌의 작품도 있고, 신윤복의 '월하정인'이란 작품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쓴 작품도 있는데, 과학소설이지만, 뭔가 문학과 예술적 요소들을 융합해보려는 시도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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