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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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파시즘이 가지는 독특한 영역을 역사, 상황, 조건 등 종합적인 관점에서 파헤친다. 따라서, 우리가 파시즘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전체주의, 권위주의, 개발독재와 분명하게 경계를 구분하고 있다. 나아가 파시즘이 가지는 분명한 성질들. 권력 장악을 위해 기존 권력과의 영합과 변용,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행사 방식의 폭력, 팽창주의 등. 그 세부 조건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파시즘을 설명하려 드는 책은 무수히 많다. 파시즘 자체가 20세기 사상계를 현실적으로 뒤흔든 혼돈의 정치 체제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해석과 관점도 천차만별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은 혼동하기 쉽고, 그 본래의 특색처럼 여기저기 붙여먹기도 쉽다.

하지만, 이 책은 파시즘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함에 따라 파시즘에 붙을 수 있는 무수한 변형적 해석을 담담하게 쳐내고, 파시즘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해 확고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정의를 내린다.

파시즘에 관한 거의 모든 책 중에서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파시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중심에 두고, 다른 파시즘 관련 책을 참고 인용 방식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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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비 이블, 사악해진 빅테크 그 이후 - 거대 플랫폼은 어떻게 국가를 넘어섰는가
라나 포루하 지음, 김현정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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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페이스북, 우버와 같이 최근 빅테크 기업의 폭주하는 행보에 우려를 보내는 시각이 많아지고 있다. 이들 기업이 실제 개인 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도 확실하나, 그만큼 개인도 빅테크 기업에게 지불하는 대가도 크다.

이 책은 빅테크 기업의 문제점을 종합하여 압축해 놓은 책이다. 그러다보니 내용에 딱히 빈틈이 없어 쉴틈없이 핵심적인 문장이나 문제적 사실 등에 밑줄을 긋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의 밀도가 높아서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기에 빅테크 기업의 추태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알아갈 것이 많다.

따라서 관련 책과 연계해서 읽으면 좋은 종합서적 성격을 보인다.
만약, 개인 정보의 상품화, 구글의 사생활 침해 문제에 대해 깊이 파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고 조지 길더의 《구글의 종말》을 같이 읽는다면 더 심도있게 보완이 가능할 것이다.

페이스북의 여론 조작 문제와 빅테크 산업의 정치적 영향, 로비 문제를 보다 심도있게 알아보고 싶다면.
이 책을 먼저 읽은 후, 페이스북과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의 내부고발을 다룬 《타겟티드》을 곁들여 읽어보라.

마지막으로 공유경제의 실체, 빅테크 시대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기업으로부터 아무것도 보호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 문제를 좀 더 알아보고 싶다면.
이 책을 중심에 두고, 《공유경제는 공유하지 않는다》란 책을 파보면 된다.

그만큼, 이 책은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빅테크 소재 책들의 중심축 역할을 할 만큼 필요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기에 추천하는 바이다.

"데이터 중심의 자본주의는 인간을 디지털 시대의 공장 원자재로 여긴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인간을 노동력으로 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품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내는 고객으로도 여겼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노동력에 대한 수요도 생겨났다.) 그러나 빅테크 시대에는 데이터 분석 자료와 감시 데이터를 구매하는 광고주와 바로 고객이다. 인간은 제품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구글과 '빅데이터'가 과거의 자본주의와 가장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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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아편 세창클래식 14
레몽 아롱 지음, 변광배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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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계기는

국내에 돌아다니는 레몽 아롱의 상당히 자극적인 문구 한마디 때문이다.


"정직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절대로 좌파가 될 수 없다.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가 좋은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 모순투성이인 사회주의 본질을 모른다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알고도 추종한다면 거짓말쟁이다."

상당히 자극적이지 않은가?


헌 데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레이몽 아롱은 그가 적극적으로 비판했던 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 지적 적수이자 라이벌 관계이긴 했지만, 그와 벽을 쌓고 마치 원수처럼 싸운 관계는 아니었다. 아롱은 말년까지 사르트르와 교유 관계를 유지했고, 그와 비록 사상적 방향은 달랐으나 지적 교류를 이어갔던 사이였다.

무엇보다 《지식인의 아편》의 중요한 핵심 주제가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편협함과 교조적 경색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내용의 책에서 과연 저런 문구가 나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해당 문구는 이 책에서 전혀 등장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 책의 관련 주제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 책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빠져있던 당대 사회의 좌파적 지평,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굳건한 유토피아에 대해 상당히 세심한 경고를 날리고 있는 지적 연구의 산물이다.

레이몽 아롱은 자유주의자로서, 이러한 지식인들의 경색된 행태에 안타까움을 표시할 뿐, 그것을 조롱하거나 적대하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소련을 중심으로 레닌-스탈린주의의 현실적 문제를 어떻게든 포장하려는 행태를 지적하면서도, 그의 대안책으로 제시할만한 북유럽의 조합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지점을 파고들만큼 유연한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레이몽 아롱의 견해는 경색된 유토피아주의에 빠진 마르크스주의 실망하여 작심하고 비판에 나선 자유주의자의 모습이다.

이는 비슷한 길을 택했으나 사뭇 다른 경로를 탔던 또다른 지식인 조지 오웰을 떠올리게 한다.


조지 오웰 역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통해서 좌파의 잘못되고 편협한 행태가 극우적인 여론을 부르는 방식에 대해 비판하였고, 평생 소련과 중국을 위시한 독재적 공산주의 방식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자부할만큼 평생 사회주의자였고 좌파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학자였다. 이는 곧 그의 지적 후손들에 의해 '오웰주의'라 부르는 한 가지 대안 좌파 노선의 탄생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레이몽 아롱의 주장은 현재 사르트르의 철학이 몰락하고 프랑스 철학판에 다시금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으면서 부활한 하나의 자유주의적 노선으로서 부를만하고, 그 핵심에 바로 《지식인의 아편》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꽤나 여러 측면에서 교조적 유토피아의 위험성을 경계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좌파들조차 자신들이 믿는 '개념'에 대해 전혀 통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일반적 마르크스주의 개념을 말할 때조차 그들은 분열했고, 어떻게 다뤄야할 지 감도 못잡았으며, 심지어 그 사상이 바라는 방향과 정반대 지점으로 향하고 있을 때조차 탈선된 선로를 고치기는커녕 애써 변명만 일삼는 행태를 보일 정도로 충분히 '좌파'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내 좌파 지식인들이 그러한 말장난을 하는 동안, 도리어 노동자 계급의 진보는 영국과 같은 자유주의 진영에서 혹은 북유럽과 같은 조합주의적 사회주의 진영에서 더 큰 영광을 누렸다. 반면, 프랑스의 상태는 그들을 전혀 쫒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롱은 거대한 모순을 느꼈다.


아롱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하면서, 눈 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포장하던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경색되고 교조주의적인 신념이 하나의 마약, 즉 '아편'과 같다고 보았다.


교조적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비판서를 생각하니 《지식인의 아편》을 역시 자유주의자이자 아마 아롱보다는 더 보수주의에 가까운 칼 포퍼의 《열린사회의 그 적들》을 비교할 수 밖에 없다.


본인은 만약 둘 중 한가지 책을 먼저 골라야 한다면 아롱에게는 미안하지만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먼저 일독하라 권하고 싶다.

이들이 비판하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접근 방식에는 꽤나 차이가 있다.


《지식인의 아편》은 아무래도 그 범위가 꽤나 한정적인데, 당대 전후 프랑스의 지식세계의 편중 사태를 집중 조명하다보니 아무래도 현상학적인 특징이 강하다. 때문에 냉전 체제를 지나 소련의 붕괴와 함께 미국 자유주의의 승리와 세계화의 선언이 있었던 90년대 "ZERO YEAR(《0년》, 이안 브루마, 글항아리)"의 희망이 솟구치던 시대가 도래했으나, 결국 리먼 사태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미-중 신냉전 체제가 다가온 지금 확실하게 그 내용을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있다.


반면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보다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근본적 철학의 문제에 접근한다. 그는 고대의 플라톤과 근대의 마르크스를 꺼내서 그 사상을 철저히 분석하며 이 사상의 근본적 모순과 오류를 짚어냈다. 단순히 당대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의 장본인이 될 만한 사상적 원천을 찾아 거기서부터 반박을 시작한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분명 포퍼는 플라톤의 《국가》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그 누구보다 훌륭하고 쉽게 《국가》를 해설하고 있다. 그래서 읽다보면 마치 비록 비판적 관점이라고 하나 내가 플라톤의 《국가》를 상당히 재밌게 읽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당대 시기의 현상학적 접근을 한 아롱의 《지식인의 아편》은 충분히 훌륭한 논점의 책이지만, 근본적 원천을 비판한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 비교해 같은 주제에 대한 생명력이 조금은 짧다고 느껴진다.


그렇다고 이 책이 별로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교조주의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즉 경색된 사고, 믿고 있는 신념을 어떻게든 버리지 못하는 태도, 상대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 등. 

자유주의자 아롱의 사상은 특히 극단적 양분화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는 좌우를 막론하고, 자신이 믿는 것이 무조건 '정의'다라고 외치는 우리의 모습에 폐부를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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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전문가와 강적들 : 나도 너만큼 알아
톰 니콜스 지음, 정혜윤 옮김 / 오르마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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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문제는 그 모든 이가 자세한 지식이나 정보에 대한 숙고도 없이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떠든다는 것이다.

그 어느 시대보다 소통수단이 다양해진 시대에 우리는 가장 극단적인 의견대립과 소통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나르시즘에 빠져있다. 인터넷에서 읽은 출처불명의 짧은 토막글들이, 이제는 단순히 직업훈련학교 기능 그 이상을 하지 않는 대학교 학위가, 그리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동질의 사람들끼리 모이는 커뮤니티에서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확고한 신념을 강화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나르시즘은 무지에 대한 찬양. 즉 자신의 무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문가나 엘리트에 양가적 감정을 지닌다. 실제로 우리는 필요할 때 쉽게 권위에 의존하면서도, 내 확고한 의견에 반대되는 상황에서 전문가를 세상을 위협하고 그들만의 사회를 사는 귀족같은 것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리고는 이런 고루한 전문가의 복잡한 설명에 넌더리치며, 사실상 보다 더 귀족같은 삶을 사는 인터넷 속 인플루언서들의 단순명료한(하지만 연구나 숙고, 출처는 불분명한) 주장에 대해 쾌감과 공감을 느끼곤 한다.

물론 그렇다고 전문가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전문가도 실패한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전문가가 일반인보다 적어도 그 분야에서 더 정확하다는 것은 그들은 직업적 측면에서라도 꾸준히 검증하고, 반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일반인에게서 볼 수 없는 덕목이다.

그러나 사회가 분업화 되어 있듯, 전문가의 영역도 분업화 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흔히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역 밖의 일에 대해 잘 아는척 간섭하는 월권행위를 저지르면서 일반인들을 선동하거나 호도하기도 한다.
심지어 전문가조차 아닌 사람들도 자신의 발언권을 얻기 위해 커리어를 쌓고 그 권위를 이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를 들어, 위근우 같은 인물을 보라. 그는 전문적인 사회학 학위도 없고 심지어 그 근본은 그저 디지털 관련 신문의 기자 출신으로 글을 써온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자극적인 글들로 유명세를 얻자 지금은 마치 정체성 정치를 대변하는 사회학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실 그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여러 부분에서 우리가 가진 무지에 대한 찬양과 알량한 학위와 인터넷 정보에서 오는 나르시즘에 대해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인 나 역시 일반인이기에 그 주장에 납득하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을 후벼파며, 저자의 주장이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생각이 일곤 한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의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저자는 전문가도 실수하고 실패하며 월권행위를 일삼는 다는 문제를 잘 짚고 있다.
그래도 전문가의 의견은 적어도 사회의 대해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리거나 무엇보다 공론장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조정하는 틀을 구축할 수 있다.

반지성주의 시대에 우리는 엘리트에 대해 불신하지며 경계하지만, 지금 권위주의와 극단주의,혐오주의가 절정에 다하는 상황을 본다면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전문가라기 보다는 무지와 사랑에 빠진 대중임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전문가는 예언자가 아니란 것이다. 전문가는 어떤 문제에 있어 최종 결정권한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은 조정하며 조언할 뿐이지 미래가 이렇게 될 거라 확답하는 예언자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문가에 모아니면 도식의 답은 내놓는 예언자 역할을 강요한다. 그리고는 그들을 쉽게 엉터리 취급한다.

마치 주식시장에서 전문가의 역할은 추이나 시장상황의 분석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저 "내 주시이 오를까요? 내릴까요?"의 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정말 읽는 이로 하여금 양가적 감정, 공감과 함께 불쾌함도 주긴 하지만. 그것이 내 안에 자리잡은 반지성주의임은 분명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극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한 번쯤은 읽어볼 책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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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 새로운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6
김진호 지음 / 오월의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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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나라 기독교의 보수적 근원

특히 대형교회, 전광훈이나 조용기와 같은 권위주의적 목사 중심의 교회가 보수주의의 첨병인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기독교 자체가 라인홀트 니부어를 필두로 한 해방신학 시점을 제외한다면 진보적 위치를 차지한 적이 없긴 하다.

따라서 기독교가 보수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단연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에 가깝다.


기독교의 창시자인 마틴 루터만 보더라도, 매우 혁신적인 개혁가 같은 느낌이 강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역시 체제의 변호자였다. 루터가 독일 농민 봉기 시절 보여줬던 모습은 많은 비평가들에게 있어서도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지금까지도 그의 평가에 상당한 흠집으로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니체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루터의 체제 변호적 모습을 비판했다.)

결국, 기독교는 애초에 그 기원부터가 체제에 보수주의적이었다.


그러나 유독 한국 교회가 보수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초기 선교 단계에서 미국에서도 가장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선교단체가 평안도 근처에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개신교 지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6.25를 기점으로 대다수의 근본주의 기독교 계열이 남한으로 내려옴에 따라 자연스레 진보적 이념에 대해 적대감을 넘어 혐오감 수준에 이르는 감정을 지니게 되었고, 이들이 그 유명한 반공 서북주의 단체들의 효시가 된다.


애초에 시작부터가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특징이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 교회의 역사란 그야말로 체제 순응주의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정부 체제의 방향이 무엇을 향하는가에 따라 교회의 방향도 바뀌었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교회는 가장 권위적인 목사의 힘을 빌려 성장했고, 개발도상국 답게 성장과 구원에 초점을 맞췄다.


여기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바라보는 점이 대형교회의 두가지 구분이다.

즉, 개발독재 시절의 권위주의형 대형 교회를 '선발 대형교회'라 지정하고, 민주주의 이후 성장한 대형교회를 '후발 대형교회'라 지칭하는데. 둘은 확실한 차이가 있다.


선발 대형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권위자의 힘이 중요하다면.

후발 대형교회에서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교육받고 지식있는 소위 '주권신자'를 붙잡는 테마가 중요했다.


특히 개발독재 중심주의 시절 민중이 정부의 요구에 거의 반강제적으로 호응 했던 것처럼, 선발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 존재가 신도들을 이끌며 쭈욱 빨아들이고 성장하는 형태였다면.

후발 대형교회는 중산층에 자리 잡은 신도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반영하는 곳을 찾기 위해 교회를 떠나면서, 성장이 정체되는 시기와 관련한다.

따라서 후발 대형교회는 신자유주의의 원칙에 따라 '주권신자'를 붙잡기 위한 무한경쟁체제에 돌입했고, 여기서 성공한 사례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사실 후발 대형교회의 대한 이야기도 따지고보면, 사회체제에 순응하여 변화하는 과정을 적나라히 보여주는 것 같다.

즉, IMF 이후 신자유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요소들을 교회가 그대로 흡수하게 되었다. 특히 노무현 - 이명박 정권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의 가치는 '웰빙'이란 단어로 자주 묘사되는데, 교회가 이 개념을 차용하여 자신의 신도를 그 사회에 순응하게끔 만든다.


이후 서술은 대부분 교회의 '웰빙' 전략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족, 선교, 청년모임 등과 같이 대형교회의 세부조직들의 활동과 행태를 살펴가며 세부적으로 파악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 기독교가 보수적 행태를 보이는 것은

정말 자연스러운 사회 체제(혹은 정부의 지침)의 방향에 녹아들고 순응하면서 변화하는 모습과 관련한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는 사실 종교와 가장 거리가 멀어야 할 세속주의가 중심에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제목만 보면 굉장히 도발적인 이야기로 가득할 것 같지만

실상 내용은 그렇게까지 날카롭진 않다. 그저 사회에 따라 변화하는 한국 교회의 변천사를 보는 느낌이다.


오히려 본문 보다는, 이후에 서술되는 보론들

'전광훈 현상'이나 '신천지 현상'에 대한 서술에서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과 시선이 번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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