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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ㅣ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평점 :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가정 학교 공장 병원 감옥에서의 시공간배치 교육 감시 훈육의 유사성과 상호침투에 대한 연구로 인간에 대한 앎-권력이 어떻게 근대적 주체(시민)을 만들었는지 정말 꼼꼼히 보여준다. 저 건전시민 육성의 최종 성과는 유명한 판옵티콘(일망감시타워: 중앙의 감시탑을 중심으로 360도 원형으로 배치된 감옥, 탑중앙에 감시자가 없어도 감시효과를 낸다)이 상징하듯이 스스로를 감시-훈육하는 자율적 시민, (신자유주의의 표준 모델이기도 한) 자기성찰과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이었다. 푸코는 이로써 전혀 별개의 구성체로 간주된 가정 학교 공장 감옥 등을 일거에 통합하고 지식(인문, 사회과학 등)과 권력을 일치시켜 '생명정치'라는 패러다임으로 근현대를 분해한다. (흔한 예 :아이와 부모는 같이 출근해서 학습-노동-평가-보상-복습-퇴근-소비하는 삶(생명)을 공유, '노동'만이 아니라 저 삶의 과정 전체가 앎-권력-자본과 일체화 또는 공명 ).
그래서 뭐 어쨋다고., 감시든 통제든 자율이든 타율이든 먹고살면 되고 가끔 '행복'하면 됐지...좀 좋은놈 뽑고 경제만 잘돌아가면 되지...어쨋건 주권은 계약서상(헌법) 국민에게 있고 시민권을 확대하면 되니까...라는 좌우파를 막론한 믿음 앞에서는 별 시원한 반론이 없다.
이 책은 대략 이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즉 푸코가 하지 못한 (생명)정치와 주권의 관계 해명... 이에 대한 연구를 책의 맨 뒤에 3가지 테제로 정리하는데,
1. 근원적인 정치적 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추방령 혹은 예외상태이다.
2. 주권 권력의 근본적 행위는 '시민'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다.
3. 오늘날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이다.
이상한 개념들에다 너무 멀고 어두운 빛깔이라 낯설고 어렵다. 더 난감한 점은 저 언어들이 단지 비유(일테면 '감옥같은 세상')나 상징, 주목을 끌기위한 수사법이 아니라 사실이자 법 그 자체라는 점이다(푸코는 이세계가 사회-감옥 연속체라 했다면, 이 냥반은 그냥 '수용소다'라고 ㅎㄷㄷ).
저 세가지 테제는 3부로 된 책의 구성이기도 하다.
1부 주권의 문제를 서양의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법과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다루는 주권의 논리학이다. 핵심은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칼슈미트의 정의에 따라 예외상태란 무엇인지 해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을 조에(joe 그냥 삶, 가치없는)-비오스(bios 가치있는, 정치적인)로 구분하여 비오스를 만드것이 폴리스의 목적이라고 했다. 따라서 두개가 섞여 분간할 수 없는 예외상태에서 조에를 추방하는 방식으로 권력에 포함시키는 것이 정치행위이다. 마치 목소리-언어에서 목소리의 자연성, 동물성(기쁨, 슬픔 등의 으아~ 등의)를 배제시키되 분절적 언어로 형식화되어 포함시킬 수 있을때 인간의 말(로고스)이 되듯이, 자연상태(퓌지스)를 배제하면서도 법적(노모스) 형식속에 포함시키는 폭력으로 주권은 등장한다. 보다시피 주권은 공동체들의 계약이 아닌 생명정치적인 관계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배제'되며 포함되는 예외상태는 '추방령'으로 나타나며 그 형상이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다.
2부는 책 제목이기도 한, 주권의 대립쌍인 호모 사케르, 즉 신성한 생명(벌거벗은 생명)을 서양의 신화와 역사 속에 나타난 모습을 등장시키는데, 고대의 희생제의, 왕의 장례식, 추방령, 늑대인간의 사례에서 '신성한' 생명(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모호한 형상을 만나게 된다. 호모사케르(신성한 인간)는 '살해가능 하지만 희생제물로는 쓸 수 없는 생명'이라는 모호한 대상이다. 이 수수께끼가 서양의 역사와 정치 나아가 심지어 형이상학의 중심부에서 메아리친다고 하니.. 이런 점에서 저자는 아예 서양의 제1철학인 형이상학을 정치철학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비오스가 되지 못한 조에, 언어에서 배제되는(흔히, 말도 안되는 소리ㅎㅎ) 목소리를 간직한자, 제도에서 추방된 진실(혁명), 본질에 닿지 못하는 내던져진 실존...으로 벌거벗은 생명은 현존한다고...
이런 논리와 역사를 배경으로 삼아, 3부는 현재, 바로 근대와 현대의 생명정치 패러다임을 분석하는데, 근대성의 노모스(법, 통치)는 국가공동체가 아닌 수용소라는 것. 여기서는 인권선언과 근대민주주의 시작점에서의 각종 법률, 정치문서의 분석을 통해 서양의 근대정치는 출발부터 생명정치였다는 것을 밝힌다. 물론 가장 중요한 자료는 나치의 수용소, 생체실험.. 등이다. 민주주의가 비난하는 나치즘과 파시즘, 전체주의는 생명정치의 극한을 보여준 것일 뿐, 근대민주주의는 시작부터 계약에 의한 국가공동체의 실현이 아닌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이 대립하는 수용소 체제라는 점을 밝히며, 당대(90년대)의 유고내전, 제3세계의 내전에 대한 미국, 유럽, 유엔 등의 소위 민주국가의 태도(특히,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난민'에 대한 '인도적 구호'라는 위선적 태도에서 두드러지듯)에서 '계급투쟁'이 어떻게 끝없는 '내전'의 형태로 생명정치가 지속되고 있는지 은연 중에 드러낸다(우리도 서유럽의 훌륭한 '국가공동체'를 부뤄하지만, 그 이면에 그렇게 되기까지 1492년부터 제3세계 대륙 전체를 수용소로 운영한 '영광'의 산물임을 자주 잊는다).
호모 사케르가 거주하는 수용소의 핵심은 무엇일까?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예외상태의 사회란... 나치수용소의 생체실험 중에 은어로 '무젤만(무슬림)'이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극도의 굴욕감, 두려움과 공포로 모든 의식과 인격이 제거되어 결국 절대적 무기력 상태에 이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무슬림 수도자처럼). 이 상태에서는 극도의 추위(사실, 자연, 생명)와 나치친위대 SS의 잔혹함(법, 규범, 정치)을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수용소는 곧, 사실과 법, 자연과 규범, 생명과 정치가 구별불가능한, 엔트로피 제로의 공간인 셈이다. 그렇다면 두려움이 저항으로 바뀔 수 있는 공간이 감옥이라면, 수용소는 절대적 무기력 상태가 되는 공간이란 뜻인가?
내 주변에서 이 책에 걸맞는 벌거벗은 생명은 누구일까? 세월호... 비정규직...
청와대, 국회, 사법, 언론...주권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그들의 '목소리'는 인간의 말이 되지 못하고 동물적 신음소리만...
죽여도(그들에 대한 모욕은 인격살해) 처벌받지 않고, 진실(자연)이 배제되고 모욕(날조된 특별법, 장그래법)이 되는 한에서만 주권에 편입되는 벌거벗은 생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