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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의 왕 ㅣ 비룡소 창작그림책 83
정진호 지음 / 비룡소 / 2025년 12월
평점 :
#협찬 #솔직후기

간단한 선 몇 개로 성을 짓고 이야기를 흐르게 만드는 작가, 정진호 님의 신작을 만나 보았습니다. 높게 쌓아 올린 건축물과 끝이 없을 것 같은 계단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생각보다 판형이 작아서 더욱 은밀한 분위기를 풍겼답니다.
볼로냐 라가치상 2회 수상, 황금도깨비상 수상에 빛나는 정진호 작가님은 '이야기가 담긴 집을 짓는 그림책 작가'라는 별칭에 걸맞게 그림책을 통해 깊이 있는 생각을 나누어 왔어요. 귀여운 외모의 "계단의 왕"이 빨간 왕관을 쓰고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이야기가 읽을수록 어쩐지 애처로웠어요.
흑백 그림 안에 오로지 색을 갖춘 것은 빨간 왕관뿐이었어요. 아침마다 표정 없이 일어나 92층에서 출발해 계단을 내려오고 또 내려와야 했습니다. 아침에 출발한 임금님은 밤이 되어서야 백성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다시 올라가야 했어요. 잠을 자야 내일 또 내려올 수 있으니까요.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에 임금님을 감시하며 한 마디씩 얹는 신하들의 목소리가 굉장히 거슬립니다. 계단의 왕을 옥죄는 신하들의 목소리는 임금님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거든요. 왕이 즉위할 때마다 성을 한 층씩 올려세웠기에 임금님은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허무 개그도 아니고 온종일 힘들게 계단을 내려왔다가 해가 저무는 모습을 보고 다시 계단을 올라야 하다니!
어느 날 갑자기 신발 뒷굽이 날아가면서 대반전이 일어나요. 닳고 닳은 신발 뒷굽이 빠지면서 임금님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쭉 미끄러져 내려옵니다. 어라?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힘들게 걷는 것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내려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제는 구멍 난 바지며, 망토며 다 깔고 앉아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왕의 권위를 뜻하는 빨간 왕관마저 깔고 앉아 계단을 타고 내려가요. 알 수 없는 쾌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지요.
임금님이 계단을 다 내려왔는데도 날이 밝았어요. 신하들과 노인들은 화를 내며 체통을 지키라고 난리였는데,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했어요. 벌거숭이 임금님은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오히려 웃으며 힘껏 손을 흔들어 보였지요. 그 후로는 92층 성 꼭대기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로소 화면 가득 색깔이 입혀졌네요.
높디높은 성은 권위를 내려놓고 백성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해 놓았어요. 임금님이 빨간 왕관 대신에 무엇을 쓰게 되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예요. 알록달록 행복이 흘러넘치는 결말에 미소가 번졌답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정해둔 틀 속에서 움직여야 했던 계단의 왕. 왕이라고 칭송받으면서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요. 권위를 내려놓고 나만의 행복을 찾은 왕을 지켜보니 해방감이 느껴졌어요. 오르고 올라도 '나만의 생각'이 없다면 그것은 성공이라고 할 수 없겠네요. 묵묵히 이어오던 일상들에 물음표를 던져주는 새로운 우화였습니다. 층마다 어떤 왕이 살고 있는지 하나씩 살펴보는 재미도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