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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 - 차별과 배제, 혐오의 시대를 살아내기 위하여
악셀 하케 지음, 장윤경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냥 저냥 살다보면 지금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해 수동적인 수용자로 남게 되기 마련이다. 중요한 변화들 그 방향이 좋던 나쁘던 가치판단이나 사건 자체에 대한 숙고 없이 하루 하루가 지나간다.
최근 소위 네이버, 다음 등의 포탈이란 것이 생기면서 그들은 언론보다 더 큰 권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감시나 견제의 대상에서 살짝 벗어나있다. 포탈 기사를 원래 잘 안 보는 본 필자는 21대 국회를 뽑는 총선을 치르면서 필요?에 의해 포탈을 통해 뉴스를 보고 일일이 댓글?을 다는 수고를 치렀다. (유권자로 할 수있는 의무는 단순히 내 한표 이상의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언론이 기레기라고 싸잡아 비판을 받고 있고 일부 언론은 노골적인 가짜뉴스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기에 그 비판은 어느 정도 합당하다. 엄혹한 군사독재 속에서 민주화운동의 숨은 공신 중에 언론도 한 역할을 했는데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는 논의도 별개로 하고, 언론 수준이 낮아지면서 포탈 환경 속에서 여론전도 언론처럼 수준이 낮아진 것은 아닌지라는 염려 속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으면서 희노애락이 교차하게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확증편향에 빠지지도 하는데 특히 나와 정치적 지향이 비슷한 익명이 남긴 속시원한 댓글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그렇지 않은 댓글에는 짜증을 넘어선 분노의 댓글을 덧붙이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오른다. 건전한 토론 보다는 가공하지 않는 모가 난 날 솟은 말들이 난무한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나찌들이 유태인을 대하는 것과 진배없는 주적?으로 다룬다. 유태인 학살하면 떠오르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정직하고 충직하며 신실한 사람이었다 다만 나치 동료들에게만.
책 속에서 한 구절이 다가왔다. "품위를 갖추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을 가끔은 의심하고 반문할 필요도 있다." 최근 트렌드 중에 '착한 소비'라는 것이 있다. 내가 마시고 있는 맥주 회사는 도덕적으로 올바른가? 나는 최근에 몇 개의 치킨 브랜드를 소비하지 않고 있다(이상한 집회를 선동하는 있는 무리에 돈을 대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에). 늘 마시는 커피도 커피원두 수확하는 농민들에게 잉여를 제대로 돌려주는 브랜드로 바꿔 마시려고 노력한다. 오뚜기처럼 공동체를 위해 공익을 실현하는 회사에서 제조하는 것을 이용하려고 애쓴다. 현대자동차가 코엑스에 본사 사옥을 짓는 게 아니라 (아직 그 건물 내에 무엇을 넣을지 모르겠으나) 세계 최대 공공도서관을 지었으면 어땠을까? 삼성이 한남동에 쬐그만 미술관 지을 것이 아니라 뉴욕 메트토폴리탄 같은 것을 건립했다면 어땠을까? 우리 재벌들이 욕안먹으면서 더 커다란 부를 창출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축적한 자본을 이렇게 썼으면 좋겠다.
책 속에 크니게 Knigge의 <<인간관계에 대하여>>의 인용이 소개되어 있다. (참고로 이 책은 독일어권 책이라 독일쪽 저자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장점이라고 본다) "모든 인간에게는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은 바로 도덕성과 분별력을 통해 우리가 속한 체계를 든든히 유지하는 것이다" 국가가 보장하는 복지제도 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네 재벌은 지금 정치권력보다 더 비대한 언터쳐블이다. (최순실이가 무서워서 말을 사줬겠나 이명박이 뭐가 이뻐서 돈 줬겠나) 미국이 아무리 민주주의가 무너졌어도 코로나 19에 의해 더 망가졌어도 그들의 기업가정신과 기업가들 본인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책무는 우리 기업가들에 비해 더 높다고 본다. 록펠러대학원 대학교 같은 것을 굴지의 대기업들이 왜 운영 못하는가? 일부 대학에 학과에 투자해서 인재 끌어당기려고만 하지 말고...정말 자기네 기업 연구개발이 아니라 인류공영을 위한 정말 큰 프로젝트 지구방위대는 미국만 하란 법이 있나? 코로나 19를 통해 우리가 최선진국임을 증명하지 않았나?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대사 기억하는가?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 "총수님들, 사업을 좀 지구적으로 하십시다"
책을 열어 몇 장 안 넘기면 품위에 대한 저자의 정의 비슷한 게 나온다.
누군가에게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라고 말하면 "왜 안 돼? 합법인데!"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저는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품위나 예의 같은 '말랑말랑한 가치들'을 더욱 집중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딱딱한 법이 아니라 부드러운 품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에게 저자가 주장하는 "품위"라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대륙법 체계 속에 사는 '독일'인들에게는 또한 조금 결은 다르겠지만 '프랑스'인들에게는 '똘레랑스'가 이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으려나. 법가로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멸망하고 세워진 한나라는 최초로 공자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삼았다. 공자의 사상이란 게 무엇인가? 논어에 허다한 언설이 있지만 仁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논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도 仁의 정의라는 것은 없다.
41p, 현대 사회는 결속과 분열이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그 한가운데에 이른바 '중간 세계'가 있다. 이 중간 세계에서 개인은 타인과 서로 조율하고 화합하며, 서로를 받아들이면서(사적 영역을 존중하며) 나란이 성장해 간다.
논어 옹야편에 "仁者先難而後獲,可謂仁矣"을 우리말로 풀어보면 "仁한 사람은 어려운일을 먼저하고 자신을 위한 것은 뒤에 하는데 이런 것을 仁하다 할 수 있겠다" 계속해서 최애제자 자공과의 문답에 다음의 구절을 보겠다. "夫仁者,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能近取譬,可謂仁之方也已." 우리말로 풀면 "仁한 사람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서게 한다. 자기가 도달하고자 하면 남을 도달케 한다. 가까이에서 능히 깨달음을 취하는 것을 인을 실천하는 방도라 부를 만하다."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도 책에 언급되고 있는데 "인간은 문명화라는 진보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충동을 늘 통제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에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갑자기 이런 협력 속에 번영한 인류가 기술진보로 24시간 지구촌 전체가 소통하는 시기와 왔는데 서로 잡아먹을 듯이 공격하면서 살고 있다. 유발하라리가 여러 책에서 인간은 진화를 통해 타인과 결속하는 능력이 발달되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소속되기로 인정한 집단 속에서만 살려고 한다. 요즘 소위 "관심경제학"이라는 경제학의 한 분과가 신생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좋아요'를 받고싶어서 피드를 올린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 대다수가 미쳐 채우지 못한 인정욕구를 채우는 곳이고 서로를 향해 지속적으로 관심과 애정을 교환하고 서로를 관찰하고 관찰당하는 ....그래서 이건 마약이나 다름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품위란 것이 규정하기 어렵다고 해서 나는 그 답을 동양철학 특히 '논어'와 '중용'에서 찾아진다고 생각한다. 좀처러 하기 힘든 일도 하게끔 만드는 무언의 강요같은 거. 누군가에게 닥친 문제를 우리가 직접 풀어줄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을 당사자에게 전달하고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 그것이 품위가 아닐까? (책의 서술 방식은 익명의 동료와 저자가 나누는 대화가 主를 이룬다)
까뮈의 <<페스트>>를 인용하며 저자는 품위는 한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게 愼獨이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인가?) 다른 이들과 기본적인 연대 의식을 느끼고 우리 모두가 생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품위다라고 저자는 결론맺고 있다.
공자선생님이 작금의 포탈 속에 댓글을 보면서 뭐라고 꾸짖으실까 생각하면서 논어 속의 구절을 찾아보았다. 문미의 두 구절을 음미해 보길 바란다. 작금의 코로나 19와 환경문제 등은 물질문명의 과도한 무절제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결국 우리는 자연친화적인 동양적 사유와 해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저자에게 감히 권하겠다 논어와 중용을 같이 읽읍시다.
"己所不欲,勿施於人"
"仁者其言也訒"